2012년 10월호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베이징의 기적 일군 ‘화수분 야구’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9-20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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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할대 타자가 세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뒤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다.
    • 어떤 감독은 이때 이 타자를 버리고 안타를 칠 확률이 높은 다른 선수로 교체한다. 그러나 다른 감독은 “3할대 타자가 연속 삼진을 당했으니 이제는 확률적으로라도 안타를 칠 때가 됐다”며 그 선수를 믿고 기다린다.
    • 두 감독 중 누가 더 훌륭한 지도자일까. 정답은 없다.
    • 확실한 것은 NC다이노스 김경문(54) 감독이 후자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수를 믿는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김경문 감독이 지휘한 한국 야구대표팀은 베이징에서 9경기 전승 신화를 써내며 올림픽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이 성과로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오른 그는 올림픽 경기에서 극도로 부진했던 4번 타자 이승엽을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리며 중용해 일본과 치른 준결승,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열매를 맺어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록 8년간 지휘봉을 잡은 프로 소속팀 두산베어스에서는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줬다. 팀 전력이 약세여서 하위권에 머물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을 깨고 매년 팀을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소극적인 번트보다 도루 등 공격적인 야구를 표방하며 두산베어스에 ‘젊고 역동적인 팀’이라는 확실한 팀 컬러도 입혔다. 특히 될성부른 신고선수(연습생), 무명선수 등을 눈여겨보고 이들을 중용해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간판스타들로 바꿔놓은 그의 지도력은 김 감독에게 왜 ‘화수분 야구의 창시자’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를 잘 알려준다.

    ‘안전한 1점’보다 ‘위험한 모험’을 택하고, ‘믿음’과 ‘고집’ 사이에서 날카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김 감독은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2011년 8월 신생 야구단 NC다이노스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기 때문. 2011년 창원을 연고지로 창단한 NC 다이노스는 팀 마스코트인 ‘공룡’처럼 지역에서 야구 붐을 일으키고 있다. 신생팀이지만 프로야구 2군 리그인 퓨처스리그에서도 맹활약했고, 2013년에는 프로야구 1군 무대 진입까지 확정되면서 기존 8개 야구단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김 감독은 “1군 리그 참여 첫해에 곧바로 4강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를 제시했다. 새로운 팀에서 젊은 선수들과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의 리더십을 탐구해보자.

    소년 포수의 아찔한 경험



    김경문 감독은 1958년 11월 인천에서 태어났다. 8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자주 이사를 다닌 까닭에 어릴 때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자랐다. 소년 김경문은 11세에 대구의 야구 명문 옥산초등학교에서 야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그러나 주전 포수의 부상으로 갑자기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어린 소년의 인생 항로는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아마추어 야구에 입문하는 어린 학생들은 주로 투수와 유격수를 선호한다. 가장 눈에 띄는 포지션인 데다 실력이 우수한 선수가 맡는 포지션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지션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기피하는 자리가 있으니 바로 야구단에서 어머니 역할을 하는 포수다. 무거운 포수장비를 착용하고 앉아서 땀만 흘려야 하는 데다, 아마 야구에서는 크게 빛이 날 기회도 적어 많은 선수가 포수가 되길 꺼린다.

    하지만 포수는 상당히 매력적인 자리다. 포수는 선수 중 유일하게 그라운드 전체를 바라보면서 경기를 한다. 투수, 타자, 주자, 야수, 벤치, 심판 등 동시에 여러 곳을 살펴야 하므로 시야가 넓고 분석력이 뛰어나다. 포수를 흔히 ‘그라운드의 야전사령관’으로 부르는 이유다.

    지도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전·현직 감독은 대부분 투수 아니면 포수 출신이다. 그중 김경문 감독, 이만수 SK와이번스 감독, 조범현 전 KIA타이거즈 감독은 저마다 상당한 성과를 내며 야구계의 포수 출신 감독 선호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소년 김경문은 포수로서는 작은 체격이었지만 정교한 타격을 자랑했다. 그는 공주고 3학년 때인 1977년 제11회 대통령배대회에서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거머쥐며 공주고 야구부 창단 후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어 태극마크를 달고 한일 고교친선대회 대표팀에 발탁됐다.

    김 감독은 고교 시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는 아찔한 경험도 했다. 그해 5월 청룡기 충남지역 예선에서 지역 라이벌인 대전고의 한 선수가 고의로 배트를 크게 휘둘러 포수로 앉아 있던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포수가 마스크만 썼을 뿐, 지금처럼 헬멧을 착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김경문은 그 자리에서 뇌진탕으로 쓰러져 5일간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 사고 이후 포수는 반드시 헬멧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1980년 한미 대학친선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러나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서 디스크 수술을 해야 했다. 허리를 이용하는 스윙을 하지 못하면서 수비형 포수로 자리를 잡았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김 감독은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당시 김 감독은 조범현 전 KIA 감독과 번갈아 포수 마스크를 쓰며 OB베어스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투수 박철순과 마운드에서 뜨거운 포옹을 하며 뒷모습만 보였던 포수가 바로 김경문 감독이다. 1982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두 사람의 포옹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의 주전 포수라는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 감독은 이후 프로에서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잦은 부상과 포수치고도 낮은 타격 성적이 그를 괴롭혔다. 1989년까지 OB베어스의 포수로 활약했지만 주전 포수로 등장하는 빈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벤치를 지키는 신세로 밀려났다.

    미국서 찾은 지도자의 길

    결국 김 감독은 1990년 현금 2600만 원의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태평양돌핀스로 이적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는 한 시즌만 뛰었고 1990년 12월에 송재박 현 두산베어스 코치와의 트레이드로 다시 OB베어스 유니폼을 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OB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1991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의 프로 통산성적은 700경기 출장, 타율 0.200, 6홈런, 126타점이다.

    김 감독은 은퇴 직후인 1992년부터 2년간 미국 프로야구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지금이야 야구단에서 은퇴한 선수들에게 해외 코치 연수를 보내주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20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김 감독 역시 자비로 미국에 갔다.

    세밀한 작전, 잦은 투수교체, 강공을 통한 대량득점보다는 번트 등을 통한 안정적 1점 확보를 중시하는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한국 야구 풍토와 달리 그는 선수 때부터 강공을 선호하는 메이저리그식 빅볼에 관심이 많았다.

    김 감독은 애틀랜타에서 미국 야구에 더욱 매료됐다. 이때 그가 느낀 경험들은 김 감독이 훗날 한국식 빅볼 야구, 소위 된장 빅볼의 철학을 성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09년 2월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 야구 지도자들이 잠재력 있는 선수를 알아보는 방식부터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애틀랜타의 한 인스트럭터가 그에게 ‘교육 리그에 있는 선수 중 누가 훗날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는 선수가 되겠느냐’고 묻기에 그는 A라는 선수를 점찍었다. A선수의 타격 자세나 현재 실력이 가장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스트럭터는 김 감독의 눈에 ‘뭐 저런 친구가 다 있나. 저게 야구 선수의 폼이란 말인가’ 싶은 B선수를 지명했다. 이에 김 감독은 코웃음 쳤다. 명색이 메이저리그 인스트럭터가 선수 보는 눈이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김 감독이 찍은 A선수가 아니라 인스트럭터가 선호한 B선수가 결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일이 잦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김 감독은 “미국 야구 지도자들이 특정 자세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 개개인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끄집어내려고 애쓰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교과서적으로만 보면 B선수의 자세가 아주 엉성해 보이고 가망성도 없을 것 같지만 이 친구에게 어떤 부분만 추가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교과서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물론 교과서적인 자세가 나쁘지는 않지만 모든 선수가 똑같은 자세로 운동할 수는 없다. 다른 자세로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잠재력을 볼 줄 아는 지도자가 진짜 지도자”라고 말했다.

    친정팀 사령탑으로 귀환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귀국한 김 감독은 1994년부터 3년간 삼성라이온스에서 코치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8년부터 친정팀 두산베어스에서 배터리 코치로 활동한 그는 2003년 10월 성적 부진 등으로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김인식 당시 감독의 후임자로 갑자기 뽑혔다. 선수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되자 야구계가 술렁였다.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사정도 숨어 있었다. 당시 두산베어스 구단은 차기 감독으로 국보급 투수 출신인 선동열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을 낙점했다. 문제는 계약 과정에서 선동열 홍보위원이 일부 계약조건에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이 깨졌다는 것. 두산 구단이 선 위원에게 감독직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인식 감독은 이미 사퇴해버렸고 선 위원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갑작스레 두산의 감독직이 무주공산이 된 셈.

    당시 김경문 감독 또한 두산베어스에 큰 미련이 없었다. 1998년부터 6년간 같이 일했던 김인식 감독의 사퇴에 큰 충격을 받은 김 감독은 2004년 시즌부터 다른 구단에서 코치로 일하기로 마음먹고 이미 친정인 두산에 작별을 고한 상태였다. 다급해진 두산 구단이 김경문 코치를 붙잡고 호소하면서 결국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지 약 10년 만에 친정팀의 사령탑에 올랐다.

    이런 불안한 배경 속에 출발한 데다, 당시 두산의 전력이나 팀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던 탓에 많은 야구인은 ‘김경문 호(號)’가 얼마나 갈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보 감독 앞에 놓인 가장 큰 난제는 김인식 감독 시절 두산베어스의 전성기를 이끌던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클린업 ‘우동수 트리오’의 해체였다.

    김동주를 제외하고 모두 타팀으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두산베어스의 장타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우동수 트리오는 용병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라는 3번, 4번, 5번 타자의 모임을 일컫는 말로 세 선수는 2000년에는 무려 308타점을 합작했고, 2001년에도 가공할 파괴력을 선보이며 두산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두산은 정규시즌 3위로 페넌트레이스에 진출해 2위와 1위팀을 연달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하위팀이 상위팀을 꺾고 우승한 것은 두산베어스가 마지막이었다.

    국민감독의 탄생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지역 라이벌 롯데 2군을 상대로 승리한 NC 김경문 감독이 모자를 벗어 홈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하지만 초보 감독 김경문은 장타력의 감소에 매우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예전처럼 홈런타자는 많지 않지만 선수들의 빠른 발을 이용한 적극적인 주루플레이, 탄탄한 수비 등을 강조하며 ‘곰’‘뚝심’ 이미지로 유명하던 두산베어스에 ‘날쌘돌이’‘쌕쌕이’ 이미지를 입힌 것.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지휘봉을 잡고 맞은 첫 해인 2004년 시즌에 바로 두산베어스를 정규시즌 3위로 만들었다. 2005·2007·2008년에는 3차례에 걸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고, 2009년과 2010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두산베어스를 2000년대 프로야구의 강팀으로 만들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지도자 김경문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김 감독은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2005년에는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삼성라이온스에, 2007년에는 ‘야신(野神·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숙적 SK와이번스의 벽에 막혀 준우승에 그쳤다.

    특히 2007년의 패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7전4선승제로 치러지는 한국시리즈에서 두산베어스는 1차전과 2차전을 모두 이겼다. 하지만 이후 4연패의 늪에 빠지며 준우승에 그쳐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야구 역사상 한국시리즈에서 2연승한 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 감독은 1차전 선발투수였던 용병 에이스 투수 다니엘 리오스를 불과 3일만 쉬게 하고 4차전에 투입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19세의 신인 투수 김광현에게 대패한 것. 당시 김 감독의 용병술은 두고두고 많은 말을 낳으며 지도자로서 그의 한계를 노출했다. 장기 레이스를 벌이는 정규 시즌에서는 김 감독 특유의 ‘뚝심 야구’가 빛을 발하지만 매 경기가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단기전에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 감독은 그 자신과 한국 야구의 위상을 대폭 격상시켰다. 당초 야구 대표팀의 베이징 올림픽 목표는 선수들의 군 면제가 가능한 동메달이었다. 아시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일본 야구팀은 프로의 초특급 선수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아마추어 야구의 황제로 평가받는 쿠바, 현대 야구의 본산 미국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김 감독은 베이징에서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을 펼쳐 난공불락이나 다름없었던 미국, 일본, 쿠바 등 세계 야구 강국을 차례로 격파했다. 김 감독이 “타선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이승엽은 예선전에서는 극도로 부진했지만 일본과의 4강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잇따라 결정적인 투런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김 감독의 기대에 화답했다.

    또 베테랑 투수 대신 당시 막 약관을 넘긴 류현진, 김광현 등을 강팀 상대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내보내는 배짱을 보이며 막강한 일본과 쿠바 타선을 무력화시켰다. 왼손투수가 나올 때 왼손 대타를 내 안타를 만드는 상식을 파괴하는 절묘한 대타 작전도 돋보였다. 김 감독의 굳은 믿음은 결국 우승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전 세계가 놀란 9전승이었다. 메이저리그(MLB) 공식 홈페이지는 당시 한국 야구대표팀의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 소식을 ‘9명의 전사가 9경기를 치러 9승을 해냈다. 완벽이란 이런 것이다(Nine starting players. Nine games. Nine wins. Perfect)’라고 칭송했다. 한국 야구팀이 직전 올림픽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본선에 출전조차 못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 대단한 성과였다.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김 감독은 2008년 당시 한국에서 2002년 축구 대표팀 감독이던 거스 히딩크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또다시 SK와이번스에 막혀 준우승에 그쳤지만 김 감독의 인기와 존재감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김경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붙은 그의 별명 즉, ‘달(moon) 감독’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달처럼 다시 뜨다

    세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우승에 실패한 김 감독은 서서히 우승에 대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영광은 물론 한국 야구 역사에 전무후무할 정도로 대단했지만 일단 프로팀 감독으로서 지상과제인 우승을 해내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와이번스의 벽에 막혔다. 2009년에는 한국시리즈에도 진출하지 못한 채 플레이오프에서 SK에 져 정규시즌 3위로 한 해를 마쳤다. 이때도 2007년과 마찬가지로 다 잡았던 승리를 눈앞에서 놓쳤다. 당시 두산베어스는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1, 2차전을 모두 이겼지만 내리 3경기를 패했다.

    2010년에는 아예 천적 SK와이번스를 만나기도 전에 또다시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2위인 삼성라이온즈에 패했다. 이에 ‘명장인 건 인정하지만 우승팀 감독이 되기에는 2%가 부족한 것 아니냐’라는 평가가 내외부에서 일기 시작했다.

    김 감독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2011년에는 반드시 우승을 하겠다며 칼을 갈았다. 자신감도 남달랐다. 두산베어스는 2011년 개막 전 전문가들이 뽑은 우승후보 1순위였다. 더스틴 니퍼트라는 걸출한 용병 투수를 영입해 객관적인 전력이 다른 7개 구단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주전 선수들의 잇단 부상, 투수 임태훈의 예기치 못한 이탈 등 숱한 악재가 겹치면서 개막 초반 1위를 달리던 두산은 5월부터 성적이 급전직하하기 시작해 7위까지 미끄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김 감독은 과감히 야인의 길을 선택했다. 2011년 6월 13일 자진사퇴를 발표한 그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 구단의 지원도 풍부했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지만 구상대로 풀리지 않아 힘들었다”며 “지금 이 시점에서 사퇴하는 것이 선수들이 서로 뭉치는 계기가 되고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평소 대쪽 같은 성격답게 팀 성적에 모든 책임을 지고 지휘봉을 내려놓자 이는 오히려 김 전 감독에 대한 평가를 좋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감독 사퇴 후 불과 2달 만인 2011년 8월 신생 구단 NC다이노스의 사령탑이 된 것.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감독이 불과 두 달 만에 새 팀의 수장이 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지도자 김경문에 대한 야구계 안팎의 기대가 높았다는 뜻이다.

    NC다이노스는 “선수의 명성보다는 잠재된 능력이나 장점을 뽑아내는 김 감독의 능력에 주목했다”며 “NC다이노스에서 또 한 번 ‘화수분 야구’의 정점을 꽃피워주기를 기대한다”고 그의 선임 배경을 밝혔다.

    김경문 리더십의 교훈

    ① best보다 unique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10년 가까운 지도자 생활 동안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김 감독이 야구계 안팎에서 신임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베이징 올림픽의 영광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지도자라면 남과 다른 확실한 색깔을 보여줄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다른 감독과 마찬가지로 항상 우승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김 감독에게 우승만큼 중요한 것은 ‘우승을 못 하고 끝나더라도 확실한 김경문 스타일의 야구를 하고, 이를 좋아하는 팬을 늘리는 것’이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의 8개 구단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야구만 한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느냐”며 “프로스포츠의 존재 의미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기업 경쟁은 창의력 싸움에 달려 있다. 애플은 기기의 성능 면에서는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가 아닐지 모르지만, 디자인이라는 다른 업체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으로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로 거듭났다. 유명 경영학자들이 입을 모아 “베스트(best)가 아니라 유니크(unique)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경영 전략 분야의 세계 최고 석학인 마이클 포터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전략은 경쟁사보다 더 나은 물건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사가 줄 수 없는 우리 회사만의 가치를 고객에게 전달해 차별화를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소속 업종의 구분이 따로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종(異種)업계의 기업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 산술적 1등을 하는 것이 큰 의미도 없다. 즉 현대 사회는 자동차와 휴대전화도 경쟁 상품이 될 수 있는 사회다. 유영만 한양대 교수는 “소니의 경쟁자는 삼성전자가 아니라 페이스북과 싸이월드일 수 있다”며 “소니 게임기보다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시간이 많다면 삼성전자 게임기보다 훨씬 위협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적만큼 차별화가 중요하다는 점은 프로야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3년부터 무려 10시즌 동안 4강에 들지 못한 LG트윈스는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의 인기팀이다. 10년간 6~8위를 오가는 LG트윈스의 성적을 감안할 때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성적이 좋지 않은 팀인데도 왜 성적이 좋은 일부 팀보다 더 많은 팬을 불러모을까. 바로 ‘잘생기고 세련된 선수가 많은 팀’이라는 LG트윈스의 독특한 팀 컬러 덕을 상당 부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김경문 감독하의 두산베어스는 한국 야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일본 야구가 지배하는 한국 야구계에 미국식 빅볼 야구의 호쾌함을 알려준 팀’‘발 빠른 선수들이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하는 팀’‘젊은 유망주가 끊임없이 나오는 화수분 야구팀’이라는 이미지를 야구팬들에게 깊이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 우승하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야구팬에게 다른 팀과 확실히 차별화된 두산만의 팀 컬러를 안착시킨 김 감독의 공은 경영자들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② 마음 움직이는 소프트 리더십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에 빛나는 김응룡 전 삼성라이온즈 감독 등 과거 유명 야구감독들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십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선수들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사생활도 강압적으로 통제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말해 ‘소프트 리더십’이다. 지시와 명령으로 선수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하드 리더십’이 아니라 선수들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히어로즈에서 방출됐던 이종욱, 신고선수 출신의 김현수가 두산베어스의 간판선수가 아니라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간판선수로 성장한 것은 김경문 감독의 소프트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감독은 베이징 올림픽 경기에서도 소프트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표적 예가 마무리투수였던 한기주 선수다. 한기주는 올림픽 예선전 첫 경기인 미국전에 등장해 다 이겼던 승리를 날릴 뻔 했다. 일본과의 예선전에서도 똑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한기주를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김 감독은 한기주를 다시 대만전에 내보냈다. 한국 야구의 미래를 책임질 투수이기에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한기주는 대만전에서도 완벽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점수는 내줬지만 삼진 두 개를 잡으면서 한기주는 자칫 야구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위기를 잘 넘겼다. 1할대 빈타에 허덕이던 이승엽을 꾸준히 4번 타자로 기용한 것 역시 믿음으로 표현되는 소프트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인터뷰에서 “감독님께 미안했다”는 이승엽의 말에 김경문 감독은 “승엽이가 미안해할 게 하나도 없다”며 “존재만으로도 팀타선에 힘을 준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 선수는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무한 신뢰를 주는 것이다. 기회를 줄 만큼 줬는데도 선수가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내친다. 냉정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승부를 다투는 프로 세계의 생리다. 김 감독은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선수에 대해서는 웬만해서는 기용 문제를 놓고 흔들리지 않는다. 감독은 선수가 그라운드 안에서 마음껏 제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자리다. 내가 믿고 기용한 선수가 부진하거나 결과가 나쁘면 그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선수와 감독이 서로 믿을 수 있는 분위기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의 이 같은 지론은 그대로 팀의 색깔이 됐다. 두산이 ‘끈끈한 팀’‘세대교체에 성공한 팀’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김 감독의 뒤를 대비하는 리더십이 통했기 때문이다.

    ③ 리더는 허명(虛名) 경계해야

    김 감독은 연이은 한국시리즈 준우승이 자신에게 큰 보약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베이징 올림픽 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두 번 했어도 두산베어스 팬을 제외하면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올림픽 후에 분에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환대해주고 칭찬해준다.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그런데 인터뷰 때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자신을 포장하고 꾸미고 있더라. 허명(虛名)에 취한 거다. 이 와중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으면 내가 얼마나 기고만장했겠느냐”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그 무엇이라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 2등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매일 산해진미만 먹으면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배가 고파봐야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는 것.

    실제 많은 경영학자는 1위를 유지하는 것보다 2위에서 1위로 뛰어오르는 게 차라리 더 쉬울 수 있다고 평가한다. 1위를 유지한다는 것이 굉장히 모호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공격할지, 어떤 점을 개선할지에 대한 혼란을 느낄 수 있는 1위와 달리 2위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1위라는 목표가 있다. 이 때문에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업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김 감독은 그 자신이 발탁해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가 된 김현수에게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이 보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신고선수에 불과했던 김현수가 실질적인 프로 데뷔 첫해인 2007년 타격왕에 올랐다. 이 와중에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최우수선수(MVP)까지 차지했으면 어땠을까. 젊은 선수가 허명에 취해 오히려 선수 생명을 단축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이 김현수로 하여금 더 훈련에 매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경문 감독은 “감독이든 선수든 항상 뒤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상에 서 있을 때 안주하거나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면 언제든 그 자리를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팀의 4번 타자나 1선발은 전력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감독의 신뢰도 강하고 선수의 실력도 뛰어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4번 타자에게만 의존하면 안 된다. 선수가 장기간 슬럼프에 빠지거나 감독에게 반감을 갖고 태업을 하면 팀이 무너진다. 축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항상 다음을 대비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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