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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명품학과 육성으로 지방대학 한계 넘는다”

신흥 명문 일군 이병하 신성대 총장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명품학과 육성으로 지방대학 한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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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밀착형 대학

“명품학과 육성으로 지방대학 한계 넘는다”
신성대의 취업률은 1997년 91.7%를 기록했고, 2년 뒤 88.7%로 떨어졌다가 2000년부터는 95%대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취업률이 가장 높은 해는 2003년으로 98.3%였다.

▼ 해외 8개국 27개 대학, 국내 8개 대학 등과 공동학위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학교들과 어떤 과정을 개설했는지요?

“공동학위 과정은 세계 명문대학들과 재학생, 교수, 직원 등의 교류를 통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학점 교환, 공동학위제, 학술교류 및 공동협력사업 추진 등을 통해 대학을 발전시키려는 취지입니다. 2007년 이후 신성대 재학생 150여 명이 미국 에딘보로대학, 중국 칭다오 빈하이대학, 윈난교통기사대학 등에서 공부를 해왔습니다.”

▼ 학생들이 해외에 나가서 적응을 잘하는지요?



“중국 쪽에 가서는 학생들이 잘들 하는 것 같아요. 생활비도 싸고, 언어 문제도 잘 극복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1년, 한국에서 2년 공부해서 공동 학위를 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주로 간호과 학생들이 진출했는데, 비싼 생활비와 언어 문제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자격증까지 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신성대는 한국생산성본부와 미시간대가 공동으로 실시한 국가고객만족도 조사에서 2006년, 2007년 연속으로 전문대학부문에서 전국 2위에 올랐다. 90% 이상의 높은 취업률과 실험실습 현대화, 교수와 학생 교육역량강화 투자비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객이란 곧 학생을 의미한다. 학생들의 만족도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신성대의 전 교직원은 학생들의 면학 및 생활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대학자체감사제도를 확립하고 있다. 또 2001년부터 매년 학생시설 확충을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휴식공간과 강의실 리모델링, 박물관과 공연장 시설 확충 등의 노력을 해왔다.

“현대적인 시설 등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대해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취업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공학과 2학년 김선강 씨(20)는 “실용적인 기술들을 잘 배울 수 있고, 취업도 잘되는 학과에서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고향을 위해 고향에다 신성대를 세웠다. 그래서 이 대학은 어느 곳 못지않게 지역밀착형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지역 내 중·고교나 공공기관들과 지속적으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산학협력단을 설치해 기술이나 인적 교류에 힘쓰고 있으며, 학생들의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물리치료과 학생들은 분기별로 노인들에게 물리치료를 해드리고 있어요. 피부미용과 학생들은 주민의 머리와 피부를 관리해드리고, 호텔조리제빵계열 학생들은 맛있는 뷔페 음식을 제공합니다. 다문화가정 자녀에게는 학자금 50%를 지원해주고 있어요. 해마다 노인 1000여 명을 학교로 초대해 경로잔치를 마련해드리기도 하고요. 현대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따뜻한 정을 주고, 이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는 경로효친의 사상을 심어주는 행사였어요.”

신성대는 또 당진시가 신청사에 입주하면서 남게 된 구청사를 장기 계약해 평생교육원과 산학협력단을 그곳으로 이전했다. 평생교육원은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고, 산학협력단은 당진에 기반을 둔 크고 작은 기업들에 사무실 등 여러 가지를 지원하고 있다.

농사꾼이 될 뻔하다

이병하 총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꾼의 길을 걸을 뻔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농사꾼으로 단련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해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중학교 교복에 학교 모자를 쓰고 동네를 활보하는 꿈을 꾸던 그다.

“제가 몸이 좀 약했어요. 그래서 장골이던 형님과 달리 늘 기운이 없고 육체노동은 자신이 없었지요. 그땐 왜 아버지가 내 맘을 몰라줄까 무척 아쉬워하기도 했지요.”

그러던 그는 중학교 진학을 못한 아이들만 모아서 가르치는 재건학교가 당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일반 중학교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갈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반대를 계속했고, 고심하던 그는 안방 벽에 걸린 갓집에서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몰래 꺼내다가 입학 원서에 도장을 찍어 제출했다고 한다.

“얼마 뒤 입학 날짜가 다가와서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때는 크게 반대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꿈에 그리던 중학교 생활을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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