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 그는 일본과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아시아 전역에 테크노 댄스 열풍을 일으켰다. 상대적으로 국내 활동은 확연히 줄었다. 지난 11월 중순,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가 여느 게스트보다 큰 관심을 끈 것도 그 때문일 터. 게다가 그는 전보다 한결 평온해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매도, 다소곳한 자태도, 생글생글 잘 웃는 표정도. 11월 28일 그를 만나러 가는 내내 그런 변화의 흔적이 꼬리를 물고 궁금증을 자아냈다.
대체 그동안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 ‘범죄소년’에서 미혼모를 연기하며 삶의 지혜라도 얻은 걸까. 어쩌면 원래 온유했는데 본색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닐까. 1996년 영화 ‘꽃잎’으로 데뷔했지만 지난 16년 동안 그의 스크린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지금껏 그가 출연한 영화는 ‘하피’(2000)와 ‘범죄소년’, 단편인 ‘파란만장’(2010)까지 포함해 네 편뿐. 극장에 걸리는 장편만 놓고 보면 그의 스크린 복귀는 ‘하피’ 이후 12년 만이다. 이정현을 마주하자 자연스레 그 이야기부터 나왔다.
‘꽃잎’ 이미지 벗어나고 싶어
▼ 왜 영화를 멀리했나요?
“항상 같은 캐릭터가 들어왔어요. 공포 혹은 광적인 느낌의 캐릭터요. 해외에서는 ‘꽃잎’이라는 영화를 모르니까 연약하고 예쁜 역도 들어오는데 한국에선 ‘꽃잎’의 신들린 이미지가 세게 박혀 있어서 캐릭터가 늘 겹쳤어요. 그게 내키지 않았어요. 좋은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은 욕구도 무척 강했고요. 어설프게 연기 활동을 하느니 해외에서 꾸준히 연기 욕구를 채우면서 국내에서는 그 답답함을 음반 작업으로 푼 거죠. 1집 때부터 앨범 기획을 혼자 다 해서 작곡가 만나 녹음하면 바로 음반이 나올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영화는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감독님, 좋은 투자배급사를 만나야 하는데 운이 없었던 것 같아요.”
▼ 운이 좋은 거 아닌가요? 출연한 영화들은 대부분 국내외에서 큰 상을 받았잖아요.(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그에게 청룡영화제와 대종상영화제 등의 신인여우상을 안겼고,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은 도쿄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박찬욱 감독의 ‘파란만장’은 베를린영화제에서 단편 부문 황금곰상을 차지했다.)
“사실 일면식도 없는 박찬욱 감독님한테서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어요. 감독님이 같이 영화하자, 근데 단편이야 하셔서 괜찮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여주인공이야, 근데 무당이야, 이러는 거예요. 하하하. 감독님의 무당은 천번만번 할 수 있죠. 너무도 존경하는 분이니까.”
▼ 어째서 존경하나요?
“표현이나 메시지가 깊고 굉장히 상업적이면서도 예술적이에요. 감독님의 작품 중 ‘공동경비구역 JSA’와 ‘올드보이’도 좋았고 ‘박쥐’도 예술이었어요. 이병헌, 강혜정 씨 나오는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도 굉장히 특이했어요.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원한 외국인 노동자에 관한 작품이었죠.”
▼ 그런 존경심 때문에 센 역임에도 기꺼이 출연했다?
“네, 늘 촬영장에 신나게 뛰어가서 연기했어요. 욕심 없이 했는데 좋은 성과가 있어서 무척 기뻤어요. 극장에 개봉하지 않아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화 관계자들은 많이 봤더라고요. 강이관 감독님도, 다음 작품을 같이 할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 감독님도 그거 보고 연락하신 거예요. 그 외에도 여러 감독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 아이폰 내장 카메라로 촬영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박찬욱 감독님 촬영장은 일단 굉장히 풍족해요. 먹을 것부터 스태프나 모든 준비가 굉장히 완벽해요. 카메라는 아이폰이었지만 나머지는 여느 영화 촬영장과 똑같았어요. 저한테는 보물 같은 작업이었어요.”
▼ 정말 신 내림을 받은 무녀처럼 보이던데 어떻게 연기한 건가요?
“박 감독님이 연기를 잘 이끌어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말투나 표정 따위를 정확히 짚어주세요. 평소 제 목소리 톤과 달리 약간 사투리 섞인 허스키보이스로 나오는데 그런 걸 하나하나 잡아주시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셨어요. 배우는 그럼 너무 편하거든요. 콘티에 그림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어서 이해하기가 한결 쉬웠어요. 감독님 만난 게 행운이죠.”
▼ ‘범죄소년’은 어쩌다 출연하게 된 건가요?
“2011년 말 미혼모 역을 처음 제의받았을 땐 내키지 않았어요. 싱글 여배우들이 싫어하는 캐릭터거든요. 이미지가 고착되면 위험하니까요. 더군다나 ‘노 개런티’라고 하는 거예요. 소속사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연말에는 공연이 몰려 더 바쁘거든요. 물론 내가 아주 예쁘게 나오는 작품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반대하진 않았겠지만, 제작 규모도 너무 작은데다 미혼모 역이고 화장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심지어 다크서클을 그려야 한다고 하니 제 주위 사람들이 다 뜯어말렸죠. 이걸 왜 상의하러 오느냐는 식으로요. 그래서 저도 여러 번 거절했는데 감독님이 안 해도 좋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다큐멘터리 몇 편을 추천해주셨어요. 난 정말 미혼모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네가 이걸 보고 느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