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2012년 대선 당일인 12월 19일 밤 기자회견을 열고 “패배를 인정한다. 모든 것은 저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친위대 역할을 해온 친노계에 사면장을 주기 위한 포석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1차 책임은 문재인 후보가 져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 안에서 정작 주류 친노계 측이 먼저 안철수 전 후보를 상대로 책임론 포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후보 사퇴 이후 문 후보 지원이 왜 늦어졌는지, 문 후보 유세 지원에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는지, 문 후보를 지지한다고 해놓고 왜 새 정치에 대한 지지와 투표 참여만 호소했는지, 그래서 결국 자신의 정치만 하려 든 게 아닌지,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의 네거티브전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움으로써 결국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의 문 후보 지지 편입을 막은 것은 아닌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선은 패배했지만 민주당의 권력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친노계는 대선 이후에도 수적으로 주류이며 논리로는 어디 가도 밀리지 않는다. 실제 할 말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당내에서는 이런 안철수 책임론이 먹힐 여지가 많다.
다수의 친노계가 이길 것
반면, 비노계 비주류는 이런 공세에 맞서 이번 대선의 패인(敗因)이 친노계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은 데에서 비롯됐다고 맹공을 퍼부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당 쇄신을 제대로 하지 못해 대선에 패배했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4월 총선거 패배 이후 친노계 기득권 비판론이 등장했을 때, 인적쇄신론이 제기됐을 때, 제대로 된 당 쇄신만 했더라도 대선에서 과반수 패배라는 아픔은 없었을 것이라며 친노계의 목을 조를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이유가 새누리당보다 정당 쇄신 측면에서 뒤처진 탓이라는 비판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 전 대표 등 친노계의 인적 쇄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것도 시점을 놓침으로써 결국 단일화 과정에서도 안철수 전 후보 진영과 분란만 야기했다는 지적이다. 결국 친노계 기득권 때문에 안 후보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후보 사퇴 이후 안 전 후보 지지 세력의 급속한 이탈을 가져왔다는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안 후보가 유세 지원에 나선 이후에도 이탈한 지지 세력을 다시 끌어와야 했지만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네거티브전에 주력함으로써 차별화에 실패했고 그들의 재흡수에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두 옳은 말이지만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비노계 비주류의 목소리는 묻힐 가능성이 높다. 비노계 비주류는 어쨌든 민주통합당에서 소수이기 때문이다.
친노계 대선 패배 잘된 일?
어떻게 보면 친노계는 이번 대선 패배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되고 안 전 후보가 새정치 공동선언을 근거로 국민연대를 주도하며, 이를 발판으로 신당 창당을 주도한다면 그들에게는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 무엇보다 다음 총선거 때에 공천을 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민주통합당을 흡수하는 방식의 신당이 창당되면 친노계가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진다.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안 후보가 친노계의 인적 쇄신을 강력하게 원한 사실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권 재창출과 국회의원직 유지, 둘 중 어느 것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친노계 대부분은 마음속으로 후자라고 답할 가능성이 크다. 문 후보의 대선 승리로 여당 국회의원이 됐지만 다음에는 금배지를 달 수 없다면 차라리 야당 국회의원을 하면서 다음 기회에도 금배지를 달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회의원 임기는 앞으로도 3년 이상 남았다. 공격받는 여당 국회의원보다 공격하는 야당 국회의원이 더 나은 측면도 없지 않다. 더욱이 거대 야당 아닌가? 책임을 져야 하는 여당보다 책임이 덜한 야당. 나쁘지 않다.
미궁 속에 빠질 대선 패배 책임론 그리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민주통합당의 주력부대 친노계의 인식은 그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다. 정치 쇄신이 필요하지만 서두르지 않을 것이고 정당 쇄신이 필요하지만 모르는 척할 것이고, 인적 쇄신이 필요하지만 애써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문 후보가 대선 패배 이후에도 건재하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하지만 1차적 책임을 지고 뒷전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그가 당 운영에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당은 결국 여전히 친노계의 관리하에 놓일 것이다.
친노계는 문재인과 안철수 사이에 맺었던 새정치 공동선언을 자신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받아들였던, 하지만 단일화 효과도 보지 못한 마당에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개인 문재인과 개인 안철수 사이에 맺은 계약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대선에서 문 후보가 승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계약 당사자인 문 후보가 그 계약에도 불구하고 쓴맛을 본 마당에 당사자도 아닌 그들이 새 정치의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따지고 보면 결국 자신들의 목을 칠 수도 있는 그 계약을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할 대안은 ‘당분간은 이대로’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에 새누리당이 정치 쇄신 요구를 강력하게 하고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선에서 승리한 당당한 여당 새누리당이 정치 쇄신을 서두르지 않을 수도 있다. 선거 국면에서 내놓은 정치쇄신안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여기까지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순진한 사람이다. 새누리당이 정치쇄신안을 내놓은 것은 결국 안철수 바람을 잠재우는 데 필요해서였을 뿐이다. 단일화 국면에서 안철수 지지 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편입시키려고 급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