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제복(祭服)과 땔감

  • 최성각│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입력2013-01-21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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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좀 들어 시골에서 겨울을 맞이한 게 벌써 아홉 번째, 50대 초반부터 시작된 내 시골살이를 나는 청복(淸福)으로 여기고 있다. 변변찮은 사람에게 비록 주중이지만 시골살이를 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늘 땔감이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장작을 돈 주고 사서 쌓아놓고 겨울을 난다는 것은 왠지 옳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농사야 텃밭 수준이지만, 땔감만은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길을 가다가도 땔감으로 쓸 만한 것들이 보이면 차로, 리어카로 열심히 실어 나르곤 했다. 어디 산비탈에 간혹 넘어진 나무가 눈에 띄었다 하면 어김없이 멈춰 서서 옮겨 나를 궁리를 하곤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잘라가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 때로는 도끼로, 때로는 엔진톱에 기름을 넣고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엔진톱을 쓰든, 도끼질을 하든 텅 빈 산속에서 혼자 나무를 자를 때에는 그 노동만큼의 소음이 나는데, 도끼날이 나뭇결에 제대로 박혔을 때 나는 소리는 아주 맑고 아름답다.

    여덟 번째 겨울까지는 어떻게든 한 해 내내 모아 토막 내고 쪼개어 쌓아놓은 잡목들을 때는 것으로 그럭저럭 견뎌냈다. 그러다 지난가을에는 그만 복이 터졌다. 전봇대보다 큰 잣나무 두 그루, 오동나무 한 그루가 거저 생긴 것이다. 작은 트럭으로 네댓 번쯤 실어 날라야 했던 그 엄청난 땔감은 산속 호숫가 옆 개활지에 서 있던 것들인데, 땔감 욕심이 많기로 소문난 내게 마을에서 선물을 한 것이다.

    “소장님, 요즘도 땔감 모으시지요? 저 위 호숫가 털풀님네 오두막 가는 모퉁이 있잖아요! 거기 오동나무 하고 잣나무랑 세 그루가 있는데, 그거 잘라 가세요.”

    어느 날 좁은 마을길에서 서로 차를 비켜주다가 만난 이장이 차창을 내리고 말했다.



    “아, 거기 오동나무라면 아주 오래된 놈인데…그걸 잘라 가지라고요?”

    “예, 며칠 전에 마을회의에서 최 선생님한테 선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하핫!”

    나보다 열 살쯤 아래인 우리 마을 이장은 늘 한잔 걸친 것처럼 볼이 발그스레하다.

    “마을회의?”

    “아, 그렇다니깐요.”

    그러고 이장은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그길로 나는 마을 꼭대기에 있는 호숫가의 현장으로 치달렸다. 오래전에 누군가 호숫가 옆에 집을 지으려고 기초공사만 해놓은 공터 가장자리에 잣나무 두 그루, 그리고 오동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것을 마을에서 통째로 내게 선물을 한 것이다. 우와, 그때의 감격이라니. 사시장철 온 마을을 헤집으며 부러지고 버려진 나뭇가지나 주워 모으던 내가 멀쩡한 나무를, 그것도 세 그루나 얻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았겠는가.

    며칠 뒤, 이장을 다시 만났다.

    “그거 멀쩡한 나무들인데, 정말 잘라 써도 되는 거요?”

    “그 땅이 본시 우리 마을 김씨네 땅인데, 어차피 거기 집을 짓자면 잘릴 것들인데, 이번에 마을회의에서 김씨가 기분 좋게 최 선생님한테 내놓았지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잘라 가세요.”

    며칠간 나는 흥분 상태로 보냈다. 그 나무를 어떻게 잘라 연구소로 실어 나를 것인가, 앉으나 서나 그 걱정뿐이었다. 내 지프로는 어불성설의 작업이었고, 그렇다고 호수까지 리어카로 작업하기에는 부지하세월의 작업량이었다. 트럭이 한 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만 뜨면 그 생각뿐이었다. 마침 그즈음 마을 입구에서 마농사를 짓는 후배가 건넛마을 골짜기에 사는 한 친구가 20만km쯤 굴렸다는 고물 트럭을 팔려고 한다는 정보를 줬다. 그 소식을 듣자 댓바람에 트럭이 있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흥정엔 누구를 만나도 ‘봉’인지라 한푼도 못 깎고 고물 트럭을 100만 원에 구입했다. 나로선 트럭 값이 매우 무리였으나 나무를 실어 나르자면 그 수밖에 없었다.

    트럭은 폐차 직전 상태였다. 정기검사를 하고, 타이어를 바꾸고, 머플러까지 교체하는 데 든 돈이 트럭 값보다 더 많았다. 우리는 그 트럭을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을 줄여 ‘배배꼽’이라 불렀다. 무리해서 배배꼽을 구하고, 차가 제 구실을 하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지만, 그 비용을 불사한 것은 오로지 거저 얻은 다량의 땔감 때문이었다.

    겨우 세 그루였지만, 나무를 자르고, 얼추 토막을 내서 싣고, 다시 연구소 마당에 내리고, 내린 나무들을 다시 짧게 토막을 내어 처마 밑에 쌓는 데 자그마치 한 달여가 걸렸다. 날품으로 사는 제자가 와서 며칠 도와줬지만,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내내 땔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복에 겨워 곤한 줄도 몰랐다.

    왜 마을에서 이 나무들을 내게 선물했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은 작년 정월에 내가 일하는 연구소 이름으로 마을에 선물한 제복(祭服)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있고, 이장 또한 그런 암시를 희미하게라도 한 것만 같다.

    제복 이야기는 이렇다. 작년 겨울, 마을 총회 때였다. 총회가 끝나고 50대 이상 남자들만의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그때 팔씨름도 하고 발씨름도 하고, 노래방 기기를 틀어 노래도 불러쌓고 한바탕 잘 놀았는데, 그러던 즈음, 누군가가 마을의 동제(洞祭)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에서 매년 동제를 지내는데, 최 선생, 그걸 알고 계시우?”

    내게 팔씨름은 이기고 발씨름은 진 전 이장 정씨가 막걸리 사발을 건네며 물었다.

    “듣긴 들었지만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이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 동제는 음력 삼월삼일 밤에 지낸다”고 했다. 제관(祭官)이 셋인데, 제관들은 그 열흘쯤 전부터 부부생활이나 몇 가지 금기를 지키며 조신하게 동제를 기다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쪽으로 이야기가 번지자 “논 한가운데에 있는 서낭이 비록 초라해 보여도, 예전에 댐을 짓기 전의 큰 홍수 때 주변의 집들이 모조리 쓸려나갔어도 그 서낭당만은 멀쩡했다”고 누군가 보탰다. 말하자면, 마을에서 그곳을 매우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긴다는 이야기였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는 이 나라 어느 마을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취중이었지만 마을 서낭당 이야기를 하는 이웃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순간 정갈했다. 그래서 나 역시 예를 다한 얼굴로 동제 이야기를 듣다가, “제관들은 그날, 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겠군요?”라고 깊은 밤 동제를 올리는 제관들을 떠올리며 묻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머쓱해지면서 “아니, 아직까지 뭐, 제복은 못 갖추고, 그냥 깨끗한 옷을 입고 그저 정성을 다해…”, 지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자, 그러잖아도 마을 사람들에게 늘 받기만 하고 준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든 나는 “아, 그렇담, 혹시 괜찮다면, 제관들이 동제에 입으실 제복을 저희 연구소에서 마련해드려도 될는지요?”라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볍게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후, 우리는 여기저기 알아본 뒤에 한 불구점(佛具店)에서 흰색 두루마기와 검은 허리띠, 그리고 제관(祭冠)까지 구했고, 그것을 정성스레 분홍 보자기에 싸서 마을 이장에게 전달했다. 제복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이 나라 다른 마을에서는 동제를 올릴 때 제관들이 어떤 복식을 취하는지 알아보는 시간도 다시 생각해보니 즐거운 시간이었다.

    총회 뒤풀이 때 술자리에서 한 약속을 연구소에서 잊지 않고 지키자 마을 사람들이 받은 작은 감동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러곤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겠나 싶다.

    “거 참, 우리가 귀한 제복 선물까지 받았는데 연구소 최 선생을 어떻게 하나? 그 양반이 평소 뭘 좋아하실까?”

    제복(祭服)과 땔감
    최성각

    1955년 강원 강릉 출생

    1979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환경단체 풀꽃세상 창립

    등의 소설집과 생태에세이집 를 펴냄

    교보환경문화상 수상

    現 작가 겸 환경운동가, 풀꽃평화연구소장


    “그분이야 탱천에 땔감, 땔감 하는 분이지요.”

    “아 그래요? 그렇담, 우리가 그 양반한테 겨울 땔감이나 선사하는 게 어떨까?”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가 돌아가지 않았겠나, 추측된다.

    올겨울의 한파는 전례없이 혹독하건만, 나는 이 한파를 그리 차고 매섭게 여기지 않으니, 곧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푸짐한 땔감 때문이다. 난로 속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내가 받은 것이 꼭 땔감뿐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그렇겠지만, 시골에서는 가끔 난데없이 감동적인 일이 일어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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