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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19

옛 시간이 줄지어 선 땅끝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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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학│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옛 시간이 줄지어 선 땅끝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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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이며 식당과 매점들이 있는 집단 시설구역에서 대흥사 절간까지 가는 길은 꽤나 멀다. 겨울철엔 이곳을 내왕하는 차편도 없다. 그러나 우거진 숲이 터널을 이루고 계곡 물이 따라 흐르는 이 길은 즐겨 걸음을 나선 이들에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길이 된다. 예전에 있던 편의시설이 죄 철거됐는데 유서 깊은 기와채 여관 유선장이 예전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화단이 있는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햇빛을 받고 있는 장독대뿐만 아니라 댓돌에 얹힌 손들의 신발까지 정다워 보인다. 여관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흥사 일주문을 만난다. 울퉁불퉁한 두륜산 봉우리들도 멀리 쳐다보인다.

계곡 따라 걷는 숲 터널

도대체 어느 느티나무가 그런 못된 버릇을 가졌고, 그런 가슴앓이로 속까지 텅 비었단 말인가. 일주문으로 가기 전, 어느 시인이 일러준 대로 개울가의 고목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피안교 아래쪽 유선장 여관 담장을 감고 도는 개울 양옆에는 늙은 느티나무가 한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기둥에 횅하니 구멍이 나 있는 모양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나무들을 둘러보던 내가 푸푸, 웃고 만다. ‘자발없는 관음증’을 가진 자는 개울가 느티나무가 아니라 굳이 그것을 찾으려는 나 자신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 무더운 한여름 밤 네댓 아낙 놀러 나왔지.

대흥사 피안교(彼岸橋) 밑 으늑한 개울가의, 말추렴 반지빠른 마흔 뒷줄 아낙들이 푸우 푸 멱을 감았지. 유선장 감고 도는 가재 물목 돌팍 위에 웃통이며 속옷이며 훌훌 벗어 던져놓고 멱 감았지, 멱을 감았어. 미어질 듯 풍만한 샅이며 둔부 이리 움찔 저리 움찔, 출렁거리는 앞가슴을 홀라당 드러내고 멱을 감았지. 접시형 젖가슴에 원뿔꼴 유방하며 반구형 사랑의 종 감긴 달빛 풀어내고 물장구 첨벙첨벙 멱 감는 아낙네들 곁눈질하던 저 느티나무, 아니 볼 것 훔쳐다 본 자발없는 관음증 느티나무. 벌거숭이 여인네들 속살 몰래 보기 송구하여 아으! 타는 가슴 쓸어내리다, 천년토록 쓸어내리다,

횅허니 도둑맞은 드키 속이 저리 비었대.

- 윤금초 시 ‘대흥사 속 빈 느티나무는’ 전문

에로티시즘 운운을 떠나서 시가 재미나서 잘 읽힌다. 느티나무를 음험한 노인네로 의인화한 수법이 그럴싸할 뿐만 아니라 멱 감는 여인네 그림이 탁월하다. 허나 느티나무 처지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세월 때문에, 병충해로 인해 속이 뚫렸건만 인간 여편네들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다니 이런 몹쓸! 그리고 궁금증은 따로 있다. 왜 하필이면 대흥사 절문 앞 느티나무란 말인가?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무슨 화두(話頭)라도 되는 양, 절 마당을 걸을 때도, 두륜산 봉우리를 쳐다보면서도, 추운 날 푸른 잎을 꼿꼿이 세운 파초 잎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그 질문을 해보았는데 결국 돌아온 내 답변은 에라이,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신동아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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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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