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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⑭

“텅 빈 마음으로 지은 누비옷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

‘무기교의 기교’로 세계 누비는 ‘누비장’ 김해자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텅 빈 마음으로 지은 누비옷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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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음으로 지은 누비옷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

그는 창녕에서 15년을 산 뒤 경주에 터를 잡았다. 그의 침방이자 살림집이기도 한 이 집에서 그는 제자들과 손님을 맞고 작업도 한다.

젊은 시절부터 누비에 관심을 가졌던 김해자 명장이 누비 기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이 가운데는 절집 출신도 있다. 물론 김 명장이 처음부터 누비 바느질을 했던 것은 아니다. 경북 김천 출신인 김 명장의 바느질 인생은 어머니의 삯바느질에서 시작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그의 집안은 서울로 이사 왔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솜씨 좋은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를 돕게 됐다.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김 명장은 어머니의 보조에 머무르지 않고 한복학원에 다녀 한복재단을 익혔고, 종로 거리에 즐비했던 ‘주단집’에 취직해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 우리 옷 수요가 많았고, 특히 종로 주단집에서는 혼수용 한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자칫 실수라도 하면 여지없이 노임에서 깎아버리므로 어떤 이들은 한 달 내내 일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때 기억으로 그는 남의 노동의 대가를 깎는 것이 얼마나 야박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낀 듯하다. 그는 곧 자신의 한복집을 차렸고, 또 그때 이미 불교와 인연을 맺어 누비 바느질에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누비 바느질 기법을 배울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한제국 황실침방 나인 출신인 성옥염 상궁이 탑골선방(현 보문사)에 계신다고 해서 거기까지 찾아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연세가 너무 많아서 기술을 전해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창녕에 살고 있는 황신경 씨를 알게 돼 찾아갔는데, 당시로서는 누비 기술을 가진 거의 유일한 인물로 승복을 전문으로 만들고 있었다. 황씨 역시 절집에서 옛 침방 나인 출신인 선복스님과 지내며 누비 기술을 보고 배웠는데, 선복스님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옷을 지은 인물이다. 김 명장의 누비질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황신경 씨와 선복스님으로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그 계보가 사제관계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텅 빈 마음으로 지은 누비옷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

이 작품은 18세기 파평 윤씨의 유물을 재현한 것이다.

“‘창녕 할매(황씨)’도 선복스님에게 제자로서 배운 게 아니라 함께 절 생활하면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고, 저 역시 창녕 할매 밑에서 반 년 정도 머물면서 솜도 넣어주면서 일을 거들며 눈치껏 보고 배운 거지요. 그래도 누비 바느질을 할 때 천이 밀리지 않도록 밀대를 대고 하는 기술 등은 그때 배운 겁니다.”

그는 곧 ‘창녕 할매’ 곁을 떠나 혼자 누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비옷을 공부하기 위해 그가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박물관이다.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도록을 그저 눈으로만 보고 이를 직접 만들어보고 익혔으니 그의 진정한 스승은 그의 말마따나 ‘박물관의 유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30대와 40대 중반까지 15년 동안 경남 창녕에서 누비를 연구하면서 바느질만 하며 살았다. 생계는 유명 한복디자이너나 서울 한복집의 ‘작품’을 주문받아 대신 바느질해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어떤 면에서 철저한 ‘기능인’으로 살았던 그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그가 만든 작품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발표할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심지어 어떤 디자이너는 그가 연습하다 ‘실패’로 치부한 누비옷까지 얻어가지고 가서 잡지에 자신의 작품으로 낸 경우도 있었다.

일도 공부도 수행하듯

“나중에 물어보면 웃으면서 시인을 해요. 저를 그저 기능인으로만 봤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겠죠. 저 자신도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마음도 없었고, 그저 주문을 받아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시급했죠.”

그는 누비질의 전통을 잇기 위해 제자도 키웠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우리 옷을 점차 입지 않게 돼 일감이 떨어지자 제자들도 하나둘 떠났고, 주문받은 한복집에서 공임을 떼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복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대신 만드는 일도 그에겐 아쉬운 일거리였던 것이다.

“한 달에 한 사람 주문 받으면 밥을 굶지는 않았으니까 크게 번거롭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일이 없어서 오히려 고요하고 정갈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신 누비옷 연구만은 아주 열심히 했지요.”

일도 공부도 수행하듯 했던 그 15년 동안 그의 얼굴도 맑은 기운에 넘쳐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에게 말 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후 그가 원하지 않던 명성과 지위가 생겨 번잡하게 살아온 15년 동안 그는 속으로 늘 고요했던 그 시기를 그리워해왔다.

하지만 실제 창녕에서 보낸 15년간은 혹독한 시련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옷이 인기를 잃어가던 시기였고, 누비옷은 더더욱 수요가 없었다. 일반 한복집이 쇠퇴하는 대신 ‘한복 디자이너’라는 이들이 등장하던 시기, 어느 유명 한복 디자이너는 그에게 “당신이 만든 누비옷은 잘 해지지 않으니, 누비옷만 계속 만들다가는 당신은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옷인데 누군가는 사주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누비에만 매달렸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에도 그는 누비질을 하면 편안해지는 그 순간이 좋아서 누비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창녕에 ‘처박혀서’ 누비만 하던 그는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 누비옷을 출품했다.

“이름 내려고 출품한 게 아니고, 주문이나 받아볼까 하고 내본 것이었습니다. 당시 침선장이었던 정정완 선생님이 격려해주셔서 출품을 결심하게 됐지요.”

정정완 선생은 위당 정인보의 맏딸이자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의 누이다. 평소 김해자의 솜씨를 눈여겨본 정 선생은 그가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장인으로 커나가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려면 출품작으로 유물 재현품이 하나쯤은 들어가야 했다. 그러자면 실제 유물을 얻어야 했다. 그는 단국대 석주선 박사가 많은 유물을 모으고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누비옷 한 벌을 들고 석 박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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