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버렸다 | 궁리, 370쪽, 1만8000원

돌이켜 보니 나는 이런 상황들에 익숙해 있었다. 문화비평가로서 십수 년간 영화, 만화, 소설 속에서 최악의 상상들을 만났고,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발견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막연한 불안에 흔들리지 말자. 진짜 닥쳐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검토하자. 거기에서 해결 방법을 찾자.
처음 내가 한 것은 나를 노리고 있는 온갖 파국의 시나리오들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전쟁과 테러, 지진과 쓰나미, 좀비와 전염병, 파산과 노숙, 쪽방과 골방…, 멸망의 괴물들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어 나는 부챗살처럼 넓게 퍼진 파국의 시나리오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 위기들이 내게 가져올 공통적인 상황을 정리했고, 멸망 그다음 순간부터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와 해결책을 기록했다.
내 운명이 뻗어나갈 가능성은 다시 방사선처럼 다양한 시나리오로 흩어졌다. 나는 절망과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몸뚱이를 좀비에게 내줄 수도 있다. 수도자의 체념으로 인류라는 종(種)이 사멸해가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볼 수도 있다. 혹은 유전자 깊숙한 곳의 야수를 끄집어내 숲 속의 짐승과 뒤엉키고, 먹거나 먹혀 자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다른 생존자들과 만나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어볼 수도 있다. 반대로 무리 속에서 생겨난 작은 반목 때문에 서로의 목에 칼을 꽂고 나란히 죽어갈 수도 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러한 파국의 상황은 결코 미래의 상상만이 아니다. “세상은 망하지 않았는데, 나는 망했다.” 그렇다. 이미 파국은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골방에 갇힌 은둔형 외톨이, 사채에 쫓겨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는 노숙인, 깜깜한 취업 전쟁터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 이들은 이미 현실 속에서 좁은 상자 안에 고립된 채, 바깥의 모든 이를 좀비로 여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아주 닮아 있었다. 나는 세상의 불안을 벗어던지기 위해 낙원을 찾아 떠난 사람들 역시 고립된 자급자족의 생활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티베트고원의 샹그릴라, 니어링 부부의 숲 속 농장, ‘남쪽으로 튀어’의 아나키스트 가족…. 이제 밑바닥을 똑바로 바라보자.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얻어낼 것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짐을 줄여야 한다. 필요 없는 것부터 내던져야 한다.
이명석│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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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혼 부여의 얼 | 소종섭 지음

충남 부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수도’ 정도로 알려져 있는 고향이 실은 남다른 역사와 문화, 정신을 가진 곳이라고 여긴다. 이 책은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부여인’의 뜻과 정신을 살려 새로운 ‘부여 정신’을 모색하기 위해 쓴 것이다. 저자는 백제의 삼충신으로 꼽히는 계백·성충·흥수,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최영 장군, 조선 최고의 지식인 매월당 김시습, 4월 혁명을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낸 월하스님 등 부여가 낳은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전하고, 백제·고려·조선의 충신을 모신 부여읍 동남리 산 3번지 ‘의열사’ 등 부여의 명소도 소개한다. 저자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장이다. 황금알, 255쪽, 1만5000원
와인으로 말을 걸다 | 김한식 지음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홍성민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