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정지용

  • 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입력2014-02-20 09: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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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는 고뇌의 증거다. 문인의 깊은 고뇌는 한 모금 담배연기와 함께 하늘로 흩어진다. 예술과 담배 사이에는 ‘건강’이라는 척도로 판단할 수 없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시 ‘향수’ ‘유리창’ 등을 남긴 서정시인 정지용.
    • 그는 스물하나, 일본 유학 떠나던 길에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고백했다.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다시 담배가 이슈다. 최근 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에 최대 3326억 원에 달하는 흡연피해 소송을 제기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대해 한국담배협회는 이번 소송이 궁극적으로는 담뱃값 인상만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마도 담뱃값 인상에 가장 민감한 것은 작가가 아닐까. 몇 해 전 담뱃값 인상안이 발표되자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는 “창작의 유일한 벗인 담뱃값을 올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작가들이 직접 나서서 ‘담배는 창작활동의 원동력이며 예술가들에게 담배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라는 고정관념을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이러한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공초(空超) 오상순이다. 하루에 담배를 10갑 이상 피웠을 정도로 니코틴 중독이었던 그는 ‘나와 시와 담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와 시와 담배는

    이음동곡(異音同曲)의 삼위일체



    나와 내 시혼은

    곤곤히 샘솟는 연기

    끝없이 곡선의 선율을 타고

    영원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刻刻) 물들어 스며든다.

    -오상순, ‘나와 시와 담배’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상순의 시는 그저 니코틴 중독자의 변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담배의 강렬한 유혹을 약물 중독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관점은 유독 예술가들이 담배에 중독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뇌과학’이 ‘시혼(詩魂)’과 같은 영역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실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무력하다.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담배가 유럽에 전래된 이래, 문학과 담배는 서로 뗄 수 없게 밀접하다. 특히 작가들에게 담배는 그저 기호품에 그치지 않고 창작을 위한 도구이자 시적이고 신성한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또한 담배는 서로 갈등하는 여러 담론이 마주치는 지점이기도 했다. 최초에 약으로 소개됐던 담배는 ‘위생담론’과 ‘건강담론’이 파급되면서 점차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지목됐다. 옹호론과 비판론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그럴수록 담배 소비는 늘었다. 담배가 현재로서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쾌락’을 제공하며, 근대적 합리성이나 과학기술의 논리와는 대치되는 ‘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가 주는 신비로운 쾌락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시인 공초 오상순. 그의 오른손에 담배가 쥐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을 정도로 애연가였다.

    프랑스문학 연구자인 리처드 클라인은 담배의 유혹을 미학적 측면에서 해명했다. 그는 담배가 조장하는 미(美)의 독특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칸트가 말한 ‘숭고’라고 분석했다. 그는 담배의 심미적 매력, 즉 담배가 흡연가의 삶에 가져다주는 숭고하고도 어두운 미적 쾌락을 보장해주는 것은 ‘담배의 무익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담배는 이롭기 때문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에 오히려 강렬한 매혹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이 담배에 매혹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리처드 클라인은 보들레르를 예로 들어 근대 예술의 출발점이 된 ‘댄디즘’의 목표가 ‘진정한 흡연가’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지적한다. 흡연은 마치 칸트적인 예술작품처럼, 어떤 목적성을 지니지 않으며 자신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목표도 없다. 또한 흡연은 예술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두 가지 모순된 상태를 창조해낸다. 즉 체념을 통해 자아가 강화되면서 ‘집중’하게 되고, 신비적 팽창 속에서 자아가 상실돼 ‘증발’의 상태가 된다는 것.

    흔히 담배를 ‘백해무익’이라고 규정하지만, 리처드 클라인에 따르자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담배는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촉진한다. 또한 여성의 손에 들린 담배가 그러하듯이, 때로 담배는 성적·정치적 자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표현한다. 오히려 리처드 클라인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유일한 가치판단 기준인 ‘건강’에 부여된 가치는 무엇이냐고.

    리처드 클라인은 건강을 모든 판단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것을 비판하면서 ‘흡연의 효용성’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흡연마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과 담배 사이에는 건강이라는 척도로 판단할 수 없는 모종의 관계가 있으며, 한국의 근대문학 또한 담배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모두 골초인가

    1920~30년대의 작가들 중 실제 흡연자는 얼마나 됐을까. 1937년 월간지 ‘조광’에 실린 ‘담배 피는 사람’이라는 글은 당대 작가들의 흡연 경향을 소개한다. 이 글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애연가는 탐정소설가 김래성이었다. 그는 하루에 열 갑을 피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열 개비가 한 갑이었으므로 하루에 100개비를 피웠다는 것인데, 오상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적은 양도 아니다. 월탄 박종화는 하루에 40개비를 피웠고 하루에 30개비를 피우는 사람으로는 서광재, 김진섭, 서항석, 임화 등이 있었다. 10개비를 피우는 작가로는 박태원, 김광섭, 이헌구, 엄흥섭 등이 있었고, 채만식은 파이프로 40대 정도를 피웠다.

    반면 안회남은 하루에 한 개비만 피우는 ‘괴벽’이 있었고, 이태준, 김상용, 주요섭, 김환태, 박용철, 윤기정, 유치진, 김남천 등은 전혀 담배를 못 피우는 ‘무연파(無煙派)’였다. 담배를 끊은 ‘금연파(禁煙派)’로는 양주동과 박영희 등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당시에도 작가라고 해서 모두 흡연자였던 것은 아니다. 담배를 전혀 못 피우거나 담배를 끊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당대에는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담배를 즐겼다.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인의 흡연 경향은 놀라울 정도였다. 독일인 에손 시드 씨는 1902년 ‘조선왕국 이야기: 100년 전 유럽인이 유럽에 전한’에 실린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 연기만으로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라고 썼다.

    흡연율 증가에 비례해, 금연운동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확장됐다. 개화기부터 전국에서 단연(斷煙)·금연(禁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최초로 금연운동을 벌인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청교도적이었던 그들은 담배를 악으로 규정하고 금연을 독려했다. 선교사들의 금연운동에 힘을 더한 것은 1907년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었다. ‘국채보상취지문’은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연초를 끊고 한 달에 20전씩 모은다면 1300만 원이 될 터이니 국채 갚는 것이 어찌 걱정이랴”라는 셈법을 내놓았다. 1300만 원은 대한제국의 1년 예산 규모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단연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금연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된 것은 역으로 금연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는 반증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예술가는 모두 골초’라는 고정관념은 적어도 1920~30년대에는 통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20년대 후반부터 문인의 아지트로 자리 잡은 다방이 ‘담배 연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묘사되면서 고정관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동인 “담배는 百利”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서울 상수동 ‘제비다방’에서.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상.

    당시에는 담배가 건강을 위협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지 않았다. 20세기 초 ‘니코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담배의 해독성이 대두되긴 했지만 담배가 온갖 질병의 원인일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오히려 담배의 해로움을 지적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유용한 면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심지어 김동인은 “백리(百利)가 있고도 일해(一害)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담배라며, 담배를 멀리하는 사람을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식후의 제일미(第一味), 용변시의 제일미, 기침의 제일미쯤은 너무도 상식적이매 거듭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소위 제일미라는 것은 심신의 상쾌를 의미하는 것으로, 심신의 상쾌가 보건상 큰 영향을 주는 것도 거듭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이 막혔을 때에 한 모금의 연초는 막힌 생각을 트게 하는 것은 흡연가가 다 아는 바다. 근심이 있을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근심을 반감케 한다. 권태를 느낄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능률을 올리게 한다. 피곤할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피곤을 사라지게 한다. 더울 때의 흡연은 그에게 양미(凉味)를 주고 추울 때의 흡연은 온미(溫味)를 주고 우중에 떠오르는 연초 연기는 시인에게 시를 줄 것이며 암중(暗中) 연초는 공상가에게 철리(哲理)를 줄 것이며 꼽아내려 가자면 연초의 효용이라는 점은 수없이 많고 또 이 많은 조건이 결합해 인체에 끼치는 좋은 영향은 능히 사람의 수명에까지 좋은 결과를 줄 터이니, 연초는 가히 예찬할 자이지 금할 자가 아니다.

    -김동인, ‘연초의 효용’

    김동인의 글에는 지금껏 애연가들이 담배의 유용성으로 주장하는 모든 논리가 담겨 있다. 식후, 용변 시, 기상 시 등에 피우는 담배가 가장 맛있다는 것은 흡연자들의 오랜 증언이다. 또 근심과 피곤을 덜고 일의 능률을 올리며 창작이나 공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담배 예찬론자들의 한결같은 논리다. 김동인은 한 술 더 떠 담배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먼저 담배 맛부터 변하기 때문에 조기에 질병을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배에 입문하는 나이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엷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담배에 대한 규제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담배에 ‘입문’하는 시기도 지금보다 훨씬 일렀다. 1949년 잡지 ‘신천지’는 저명인사들의 ‘애연지(愛煙志)’를 연재했다. 필자로 참여한 계용묵, 홍기문, 김용준, 김동명, 서천순, 손우성, 안종화 등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처음 담배를 접한 것은 이르면 7~8세 때였고, 늦어도 중등학교 때를 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어른들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고 회고하지만, 당시에는 남성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담배를 접했다.

    소파 방정환이 1930년 신문지상에 발표한 ‘담배갑’이라는 동화에서도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동화는 서울 어느 소학교에서 담배 피는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몸 검사를 실시하다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교사들이 담배를 소지한 학생들을 적발해낸다. 몇몇 학생이 적발되자 누군가 다급한 나머지 담뱃갑을 버렸고, 그것을 발견한 교장 선생은 그 범인이 자수할 때까지 두 시간 넘게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놓는다. 교장 선생의 지루한 훈화가 이어지고 쓰러져가는 학생들이 생겨날 때쯤 한 학생이 자신이 담뱃갑을 버린 범인이라고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학생은 괴로워하는 동료들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었고, 사정을 알게 된 교장 선생은 그 학생의 희생정신을 치하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동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희생정신을 길러야 한다는 것과 소학교 학생들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 두 가지인 셈이다.

    1930년대 들어서는 담배가 특히 미성년자에게 해롭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성년자들의 흡연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자 총독부는 1938년에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금주·금연법을 제정한다. 일본에서 이 법이 제정된 것은 1900년이었다. 이 법에 따라 미성년자의 흡연과 음주가 금지되었고, 흡연을 묵인한 부모나 판매자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법에서 규정한 미성년자란 만 12세 미만을 의미했으므로 사실상 규제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만 12세 이상인 경우에도 중학교 등에서는 흡연을 금지했지만, 지금처럼 학교 화장실은 항상 흡연자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정지용의 ‘선취(船醉)’라는 시다.

    배 난간에 기대서서 휘파람을 날리나니

    새까만 등솔기에 팔월달 햇살이 따가워라.

    금단추 다섯 개 달은 자랑스러움, 내처 시달품.

    아리랑 쪼라도 찾어 볼가, 그 전날 부르던,

    아리랑 쪼 그도 저도 다 잊었습네, 인제는 버얼서,

    금단추 다섯 개를 삐우고 가자, 파아란 바다 우에.

    담배도 못 피우는, 수탉 같은 머언 사랑을

    홀로 피우며 가노니, 늬긋 늬긋 흔들 흔들리면서.

    -정지용, ‘선취’

    이 시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선상에서, 일본 대학의 교복을 입은 식민지 청년의 자괴감을 담은 작품이다. 화자는 식민지 지식인의 상징인 ‘금단추 다섯 개’를 단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금단추를 뜯어 바다에 던져 버린다. 이어 화자는 식민지 조국에 대한 애정과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담배도 못 피우는, 수탉 같은 머언 사랑”이라는 말로 드러낸다.

    청춘의 상징

    당시 학생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어릴 적부터 담배를 피웠고, 그것은 모방심리의 소산이자 청소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반항심리의 표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담배도 못 피운다는 한탄은 그만한 치기조차 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다. 정지용은 유학길에 나서던 때의 모습을 담은 ‘다시 해협’이란 시에서도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라고 썼다. 이렇듯 정지용의 시에서 담배는 연애와 더불어 청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소래섭

    1973년 전북 익산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저서 : ‘백석의 맛’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시는 노래처럼’ 등


    담배와 연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는 이런 노래가 나온다. “연인들의 달콤한 이야기, 달콤한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은 담배연기라네!/ 그들의 희열, 그들의 희열, 그리고 그들의 맹세/ 이 모든 것들은 담배연기라네./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떠도는 것을 우린 바라본다네.” 담배와 연애 모두 농도 짙은 쾌락을 선사한 뒤에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또한 두 가지 모두 쾌락만큼이나 강렬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춘 시절에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정지용이 34세에 쓴 ‘다시 해협’에서야 비로소 담배와 연애를 동렬에 놓을 수 있었던 것도, 연애가 담배 연기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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