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색 인물

세계여행에 꽂힌 ‘글로벌 거지 부부’

나이·국적·상식 초월한 소소한 행복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세계여행에 꽂힌 ‘글로벌 거지 부부’

2/4
세계여행에 꽂힌 ‘글로벌 거지 부부’

남편 박건우 씨와 아내 나카가와 미키 씨.

그날 저녁 현관문에 들어서자 펜치가 날아왔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그는 흥분한 아버지를 피해 2층 방으로 도망쳤다. “창문으로 뛰어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더 이상 다른 연장은 안 날아오더라고요. 그길로 집을 떠나 독립했어요. 가출이 아니고요. 사실 무단결석 기간에 학교는 안 갔지만 교복 입고 자원봉사 활동하러 다녔거든요. 대책 없는 불량학생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도 학교도 안 알아주니 알아서 독립한 거죠.”

박씨의 나이 17세, 고교 입학 3개월 만이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19세 때였고, 그 후로도 1~3년에 한 번씩 띄엄띄엄 얼굴을 보는 부자 사이가 됐다.

고심 끝에 서울 잠실의 한 테마파크 지하식당을 ‘결혼 통보’를 위한 장소로 정하고 아버지와 누나를 불러냈다. 설마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욱! 하실까’ 싶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말 대신 미키 씨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폭탄선언을 했다. “이 여자와 결혼할 겁니다.” 며느리 될 사람이 일본인에다 아들보다 9세나 많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태가 어떻게 번질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내친김에 밀고 나가기로 했다.

“결혼을 인정하고 부자지간에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남남이 되든지 선택하시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긴 한숨을 쉬시더니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의외의 반응이라 그때 처음 아버지한테 큰 빚을 진 기분이었어요. 앞으로 잘사는 걸로 보답해야죠.”

“애를 낳으라”



미키 씨와 예비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예상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었다. “장래에 시아버지인 나를 모시고 살 수 있느냐?”는 말에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싫은데요. 둘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던 것. 결혼 후 첫 추석 때 20여 명의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도 미키 씨는 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아빠, 커피 마셔!” 아직 한국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개성 강한 아내를 보호하려고 그가 짜낸 잔꾀가 명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집안어른들께 미키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각인시키려고 절대 존댓말을 쓰지 말라고 했거든요. 미키가 주방에서 커피를 내오면서 아버지한테 커피를 건넬 때 뭐라고 해야 되는지 묻기에 ‘다가가서 귀에 대고 작게 말하라’고 했어요. 근데 멀리 있는 아버지한테 냅다 우렁차게 소릴 지른 거예요. 또래 사촌들은 어른들 때문에 큰소리도 못 내고 웃음을 참느라 눈물을 쏟고,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죠. 그 와중에 당신 며느리가 저질러놓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태연스레 ‘아까 마셨어. 미키야, 너 마셔’라고 하시더라고요.”

미키 씨를 만나기 전 일본에서 체류하며 노약자용 세발자전거를 이용해 장기 여행을 한 경험이 있어 일본 문화를 웬만큼 아는 박씨에게도 그녀 못지않게 적응하기 힘든 게 처가 분위기였다. 결혼 전 예비 처가에 인사를 가려고 일본으로 떠난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배로 갈아타고 미에현에 도착했다. 선착장으로 마중 나온 예비 장모의 첫인상은 예사롭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팬 데다 입엔 담배를 물고 계셨어요. 옷은 밤무대 스테이지에서 방금 내려온 것 같은 차림이었고요. 나중에 다방에서 나갈 때 찻값도 본인 건 따로 내시고요. 4대가 대대로 농사짓는 처가에 갔을 때도 형님(미키 씨 오빠) 부인만 빼고 나머지 식구들한테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어요.”

처가 방문에 앞서 일단 예비 사위를 다방으로 안내한 미키 씨 어머니는 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첫마디부터 “애를 낳으라”고 했다. “장모님이 우리 2세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주신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기가 찬 듯 혀를 차시더니 ‘일주일 정도는 키워줄 수 있다’고 했어요. 다행히 결혼은 반대하지 않는 표정이어서 안심이 됐죠.”

양가 부모는 지금도 두 사람에게 2세를 재촉한다. 2대 독자인 박씨에게 집안에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준다면, 처가 쪽은 특히 장모가 부부를 심하게 압박 중이다. 딸이 나이가 많은 데다 아이가 없으면 ‘9세 어린 젊은 사위가 살다 도망갈까’ 걱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부는 2세를 가질 생각이 없다.

한창 팔팔한 나이에 유부남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종종 그에게 묻는다. 결혼해서 행복하냐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Yes’라고 대답하면 열에 아홉은 같은 반응이다. “원래 신혼 땐 다 그래. 쫌만 더 살아봐!” 그는 “안타깝게도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성인이 돼도 ‘2차 성장기 반항아’로 살아가는 자신의 삐딱한 심보(?)가 결혼 선배들의 확신에 예외를 만들어버릴 작정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만나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내달린 배낭족 부부답게 두 사람은 올해에만 벌써 한 달 반 정도 해외에 머물렀다. 지난해까지 1년 중 한국에 머문 기간은 고작 90일 정도에 불과했다. 해마다 평균 8개국을 넘나든 부부는 그동안 인도,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대만,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지를 다녀왔다. 그중 호주와 뉴질랜드는 ‘워킹홀리데이’를 이용했다.

2/4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목록 닫기

세계여행에 꽂힌 ‘글로벌 거지 부부’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