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팀이 있는 지역이 대부분 도시가 아닌 시골이다. 원정경기를 하려 이동하려면 직항이 없어 비행기를 타고 도시로 나왔다가 다시 시골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이오와 컵스에선 원정 가려면 무조건 새벽 4시에 출발했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 나름 재미도 있었다. 하이 싱글A가 있는 플로리다에선 쉬는 날 파도타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번은 앨라배마로 원정을 갔다가 우연히 한국 식당을 발견했는데 3일 동안 삼계탕과 김치찌개 등을 먹으면서 행복했다. 삶이 참으로 단순해지더라. 야구하고 쉬고 먹고 이동하고…. 미국의 넓은 땅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여러 지역을 돌고 돌았다. 내 인생처럼.”
루키리그에서 만난 상대 팀의 코치나 감독의 연령대가 임창용과 비슷했다고 한다. 임창용이 야구장에 나가면 상대 팀 선수들은 그를 선수가 아닌 코치로 알고 인사를 했다. 일본 리그에서 다섯 시즌을 뛰며, 128세이브와 방어율 2.09를 기록한‘미스터 제로’가 루키리그에서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공을 던지는 장면은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목표가 있었기에 그조차 색다름으로 품었고, 새로운 도전으로 포장했다.
잘못된 계약
2013년 9월 8일. 임창용은 이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 마운드에 처음으로 오르며 한국인으로는 14번째 메이저리거의 탄생을 알렸다. 밀워키전에서 3-4로 뒤진 7회 초에 등판, 3분의 2이닝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을 기록했다. 최고 구속은 93마일(150km), 14구를 투구(스트라이크 7개)했다.
임창용은 이날 등판을 앞두고 당시 에이전트와 시카고 컵스, 그리고 선수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고 말했다.
사연인즉 임창용은 구단과의 2년 계약 중, 1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면 2년째에는 자동으로 메이저리그에 오르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에이전트가 구단과 맺은 계약은 1+1년이었고, 남은 1년은 자동으로 빅리그로 올라가는 게 아닌, 구단의 선택에 따른다는 내용이었다는 것.
“루키리그부터 시작해 오로지 한곳만 보고 모든 고생을 감수하며 달려왔다. 그리고 빅리그 데뷔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에이전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빅리그 데뷔에 빨간불이 켜졌고, 구단은 계약서를 제시하며 우리를 압박했다.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단 한 번이라도 빅리그 마운드에 서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구단의 제안을 따랐고, 구단은 수정된 계약서를 다시 가져와서 그곳에 사인을 하라고 요구했다.”
임창용은 수정된 계약서에 사인했고, 마침내 9월 8일 밀워키전에 등판할 수 있었지만, 계약 문제로 마음이 복잡한 터라 메이저리그 데뷔를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3년 시즌을 메이저리그에서 마친 임창용은 이후 구단과 마이너리그 계약을 다시 맺었고, 그즈음 당시의 에이전트와 결별 수순을 밟게 된다. 임창용의 일본행을 도왔던 박유현 씨였다. 5년 넘게 인연을 맺었지만, 마지막은 서로 상처만 안은 채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 했다.
선동열과의 불화

임창용은 “앞으로도 5년은 거뜬히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2005년 팔꿈치 통증을 느끼면서도 팀에서 요구할 때는 핑계 대지 않고 등판했다. 하지만 부상 탓에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고, 이런 내 모습에 실망한 선동열 감독이 인정사정없이 엔트리에서 바로 제외하더라. 그래서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LA 조브클리닉의 조브 박사로부터 팔꿈치인대접합수술을 받았다. 재활을 겸한 2군 생활 동안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 선 감독이 엔트리에서 제외해주신 덕분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2군에 머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고민할 수 있었으며, 일본 야쿠르트와 헐값으로라도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한국에선 더 이상 내가 설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국을 떠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임창용도 없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선 내가 30만 달러에 야쿠르트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니 걱정과 비난 섞인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난 자신 있었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뒤 2년 후에는 더 많은 몸값을 받아낼 자신이.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나.”
사실이었다. 그는 2년 후에 야쿠르트와 3년, 209억 원의 계약을 맺게 된다. 삼성에서 퇴물 취급을 받다시피 했던 선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만에 200억 원대의 재계약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인생역전’이었다.
임창용은 첫 시즌부터 시속 160㎞에 육박하는 강속구로 돌풍을 일으키며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속구가 뱀처럼 휘어 들어온다고 해서 ‘뱀직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일본에서 5시즌 동안 11승13패 128세이브 평균 자책점 2.09를 기록했다. 임창용은 2012년 7월 일본에서 또다시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재활 중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이상하게 팔꿈치 수술만 받으면 생활터전을 옮기게 됐다. 삼성에서도 수술 후 일본으로 건너갔고, 미국 구단 계약도 일본에서 수술받은 후 맺은 것이다. 모두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할 때 나는 도전을 선택했다. 모두가 반대할 때 난 내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하지만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남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이 크다. 나이가 있기 때문에 재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포기하거나 단념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삼성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결정하고 싶지 않다는 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