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사정(司正)의 칼잡이 ‘혹리(酷吏)’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입력2015-04-23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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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여곡절 끝에 국회 임명동의를 통과한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며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웠다. 대대적인 사정(司正)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집권 3년차 국정 운영 동력이 떨어지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이를 만회하려는 청와대의 의중과 그간 구길 대로 구긴 검찰의 이미지 제고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듯도 하다. ‘사기(史記)’에는 비리·부정부패와의 전쟁에 나선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사기’에서 가장 존경받는 혹리로 꼽힌 급암의 초상화.

    사마천은 역사적으로 비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을 ‘혹리(酷吏)’라는 다소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가혹한 관리’란 뜻이다. ‘사기(史記)’ 122권 ‘혹리열전(酷吏列傳)’ 편은 이런 가혹한 관리들의 행태들을 모아놓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내용이다.

    혹리란 오늘날 검찰의 검사장과 검사들에 해당한다. 이들은 주로 권세가와 토호, 상인들을 대상으로 가차 없이 법을 집행했다. 어떤 혹리들은 최고권력자의 의중을 헤아려 그에 맞도록 법을 집행했고, 상인과 결탁한 몇몇 부패한 혹리는 법을 빙자해 도리어 법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혹리의 모범으로 꼽히는 인물은 급암과 정당시다. 이들은 혹리열전에는 소개돼 있지 않다. ‘사기’ 120권 ‘급정열전’에 수록됐는데, 바로 앞편이 좋은 관리들을 다룬 ‘순리열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혹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물들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직 떠받칠 신하’

    급암은 강직과 직언의 대명사였다. 사마천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급암은 성품이 거만하고 예의를 갖추지 않아 면전에서 반박을 잘 했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용서할 줄도 몰랐다. 자기와 부합되는 자는 잘 대우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아예 보기조차 싫어했다. 이 때문에 부하 관리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이 있어 지조를 지키고 평소 행동도 결백했다. 직언하기를 좋아해 여러 번 무제와 대신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무제는 이런 급암의 강직함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를 ‘사직을 떠받칠 신하’라며 공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평소 자유분방해 복장을 풀어헤친 채 신하들을 만나던 무제가 급암이 나타나면 장막 뒤로 가서 의관을 정제한 뒤 만날 정도였다고 하니 급암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정당시 역시 강직, 청렴하기로는 급암에 버금갔으나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다음은 정당시에 대한 사마천의 설명이다.

    정당시는 청렴하며 집안을 챙기지 않았다. 녹봉이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손님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그가 선물하는 것은 대나무 그릇의 음식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회 때마다 틈나는 대로 무제에게 천하의 훌륭한 사람에 대해 칭찬했다. 그가 지식인 등 부하 관리를 추천할 때에는 늘 진지하고 흥미 있게 그 사람을 칭찬했고, 언제나 자기보다 훌륭한 점을 들었다. 관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부하 관리와 이야기할 때에도 혹시 마음이 상할까 걱정했다.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무제에게 전하면서도 늦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산동의 모든 선비들과 여러 손님들은 이 때문에 한결같이 정당시를 칭찬했다.

    사마천은 두 사람을 같은 열전에 함께 소개한 다음 이렇게 평가했다.

    급암과 정당시는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어도 청렴하고 사생활이 결백했다. 두 사람이 중도에 파면되자 집이 가난해서 빈객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군 하나를 통치했으나 죽은 후에 남긴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사마천은 혹리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급암과 정당시 열전을 통해 가장 모범적인 관리 이미지를 전했다. 뒤이어 사마천이 ‘혹리열전’에서 소개한 혹리는 20여 명에 달한다. 모두 서한시대 인물들이다. 사마천은 초기에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던 반듯한 혹리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사마천 당대인 한 무제 때 이르러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것은 물론 각종 악법을 만들어내서 백성을 못살게 구는 못된 혹리들로 변질돼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들의 행태에 오늘날 우리의 검찰과 사법부를 비춰보면 적지 않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표 참조).

    사마천이 맨 처음 소개한 혹리는 서한 왕조 4대 황제 경제(景帝) 때의 질도(都)라는 인물이다. 질도의 별명은 ‘보라매’란 뜻의 ‘창응(蒼鷹)’이다. 그만큼 사나웠고, 황제 앞에서도 바른소리 하기로 유명했다. 급암과 같은 직언 스타일이었다. 특히 권력을 믿고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권세가들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제남군의 호족 간씨 일가를 몰살한 적도 있다. 급암이나 정당시의 스타일을 유지하던 질도가 지킨 또 하나의 원칙은 ‘청탁 거절’이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편지는 뜯지도 않고 반송했다. 예물을 보내오면 곧바로 되돌려 보냈다. 청관(淸官) 그 자체였다.

    “걸리면 다 죽는다”

    문제는 그 도가 지나쳤다는 것. 법적으로 처리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죄가 다소 중하다 싶으면 집안을 통째로 몰살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걸리기만 하면 최고형으로 다스리니, 그를 보고 피해 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나라 개국공신 주발의 아들 주아부(周亞夫)는 매우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질도는 그를 반란죄로 죽였다. 아버지 장례식 부장품으로 무기를 무덤에 넣어주려던 것을 누군가 반란의 음모라고 밀고하자 ‘지금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죽어서 저승에 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라며 죄를 뒤집어씌웠다. 생전에 백만대군의 총사령관이던 주아부는 백만대군보다 더 무서운 게 질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경제 때는 질도가 이렇게 대쪽처럼 법을 처리해 국가 기강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런 질도도 두태후의 인척 임강왕(臨江王)을 가혹하게 다스렸다가 괘씸죄로 태후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다.

    질도는 너그러운 법 집행을 주로 했던 순리(循吏)에서 혹리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공직자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경제를 지나 다음 황제인 무제(武帝) 때의 혹리들과 대비되는 형상으로 혹리열전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순리들과 급암, 정당시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청렴에다 사나움과 가혹함이 합쳐진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질도에게는 권력자들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법을 적용하는 엄정한 이미지도 겹쳐 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맥을 못 추는 간신형 혹리들과는 질이 달랐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공직자는 이런 유형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혹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우와 함께 견지법(見知法 · 일종의 불고지죄 처벌법)을 만든 장탕(張湯)이다. 혹리열전에서도 그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다. 사마천은 장탕이 혹리가 되는 데 영향을 미친 일화를 소개하는데,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채록했는지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황제의 ‘의중’이 곧 법

    장탕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어느 날 아버지는 외출하면서 어린 장탕에게 ‘곡간을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장탕이 곡간을 소홀히 지킨 틈을 타 쥐가 곡식을 다 먹어치웠다. 이 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장탕은 온 집안을 뒤진 끝에 쥐를 잡아 꽁꽁 묶었다. 그런 다음 쥐를 탄핵하고 영장을 발부한 뒤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러고는 법조문에 근거해 고문을 가하고 끝내는 몸뚱이를 찢어 죽이는 책형을 판결했다. 장탕은 판결문을 직접 작성했는데, 그 판결문을 본 아버지는 기가 막혔다. 마치 노련한 형리가 직접 작성한 것 같았다. 이처럼 장형은 어릴 적부터 혹리로 성장할 기본 자질을 타고났던 것같다.

    장탕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리가 돼 혹리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황제의 친인척 비리 문제를 전담했다. 하지만 황제의 친인척 문제는 황제의 의중에 따라 판결이 달라졌다. 중죄를 범했어도 황제가 봐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가벼운 죄를 범했어도 황제가 봐주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 장탕은 황제의 이런 의중을 기가 막히게 간파했다.

    법에 따르면 명백하게 사형감이지만 황제가 살려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장탕은 무제가 좋아하는 유학 경전을 법조문 앞뒤에 배치해 황제로 하여금 구실을 삼게 만들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탕은 법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왜곡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유가 경전을 끌어다 그럴듯하게 꾸며낸 영악한 혹리였다.

    장탕의 수법 중 또 하나 기가 막힌 게 있다. 문서 보고는 한번 올라가고 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 하지만 구두 보고는 나중에 황제의 검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장탕은 황제에게 말로 보고할 것과 문서로 보고할 것을 교묘하게 구분했다.

    장탕이 또 하나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은 처세술이다. 그는 다른 관료들에게 욕을 얻어먹지 않으면서 호의호식했다. 때만 되면 선물 보내고 인사하는 겉치레 처세를 너무나 잘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관료들끼리 서로를 봐주고 서로를 이용하는 비리와 부패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됐다.

    그런데도 황제는 이런 그를 총애했다. 그뿐만 아니라 행정·경제·재정 등 조정의 거의 모든 문제를 장탕과 의논했다. 결국 황제는 법과 시스템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자신이 총애하는 이를 통해 통치하는 ‘인치(人治)’에 의존했다. 사마천은 혹리의 가장 큰 문제는 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할 그들이 그 법을 이용하거나 왜곡해 인치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법이 많으면 도둑도 많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한 무제는 독재통치 기반을 강화하려고 삐뚤어진 혹리들을 대거 기용해 사정 정국을 조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정 파탄과 사회 기풍 혼란이었다.

    공자(孔子)는 무슨 일이든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만 다스리려 하면 백성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덕(德)과 예(禮)로 이끌어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범법이 줄어든다”고 했다. 노자(老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법령이 많아질수록 도둑도 많아진다”고 꼬집었다.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촘촘한 법 조항과 가혹한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사마천도 “법이 통치의 도구이긴 하지만 백성들의 선악, 청탁까지 다스릴 수 있는 근본적인 장치는 아니다. 법망이 가장 치밀했던 때 간교함과 속임수가 가장 많았다”고 지적했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과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백성들 사이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하자 결국 관리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들은 법망을 뚫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관리들은 타오르는 불은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방식으로 대처했으니, 가혹한 수단이 아니면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법이 갖춰지지 않아서 범법자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한결같은 지적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회적 기풍이다. 공자의 말대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적 기풍이 우세하다면 굳이 요란을 떨며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 초기의 법은 배를 삼킬 만한 고기도 빠져나갈 정도로 느슨했지만 통치는 순조롭고 백성들은 편안했다는 사마천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나라의 안정은 도덕의 힘에 있지 가혹한 법령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디케는 최고의 혹리?

    지금 우리 현실은 도덕 운운할 상황이 못 된다. 법치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좋은 법을 만들어 그 법을 제대로만 적용한다면 백성들이 억울할 일이 없을 것이다. 고관대작이라도 나쁜 짓을 하면 법에 따라서 처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일반 백성에게만 법을 과도하게 적용해왔다. 형평성에 어긋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결국 법관들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지도층은 끼리끼리 봐주는 인치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나라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혹리 장탕은 법관으로서의 문제점을 모두 안고 있다. 오늘날에도 장탕과 같은 공직자가 판을 친다. 그래서 사마천은 ‘이상적인 관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순리열전’과 ‘혹리열전’을 썼다. 읽을 때마다 급암과 정당시, 아니 100보 양보해서 질도 정도의 공직자가 과연 우리에게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권세가나 토호들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그들을 아주 엄격하게 처벌한 초창기 혹리 같은 이들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국민을 절망에 빠지게 하진 않을 것이다.

    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한쪽에는 칼, 한쪽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만민에게 법을 평등하게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칼은 그 법에 따라 한 치의 사심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의 형상이다. 그런데 여신상은 왜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흔들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적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신의 이름은 디케다. 사마천도 디케처럼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하는 관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봤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제대로 된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에 적합한 혹리는 과연 누구일까. 노자, 공자, 사마천이 언급한 법의 본질과 한계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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