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 뿌리는 사람’
귀농은 태초적 건강 찾기
최근의 귀농 현상을 물론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은 고된 작업입니다. 게다가 자연이 언제나 온화한 것도 아닙니다. 관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주체의 관점에서 살아내야 하는 자연은 때때로 무섭고 두렵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 가뭄, 한파 등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줍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귀농에 담긴 현대인의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날 현대 문명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인간의 능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 상담과 정신의학적 약물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률의 하락과 정신 건강의 회복에 중요한 구실을 해온 게 사실이지만, 그 불안과 우울을 포함한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 및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줄 수는 없다는 점 역시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갈수록 메말라가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사회생활의 기본 코드를 이룹니다. 이런 삭막한 현실에서 인간에게 참다운 치유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태고의 순수인 자연입니다. 많은 현대인이 귀농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해 태초적 건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짓는 데는 상당한 수고와 불편함이 따르고 귀농의 결과가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위안과 기쁨, 그리고 치유를 얻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연으로 귀환
밀레는 정치적 이념이 두드러진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리얼리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비교할 때 밀레는 오히려 소박했습니다. 쿠르베가 진부한 아카데미 양식을 거부하고 삶과 사회 현실을 그림 안으로 당당하게 끌어들여 왔다면, 밀레는 산업화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농촌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밀레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7월 혁명(1830년), 2월 혁명(1848년)이 일어나고 파리코뮌(1871년)이 등장한 정치적 대격변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밀레는 자연으로의 귀환과 소박한 생활의 예찬이라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한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밀레 식의 대안은 적극적인 대안이 아니라 방어적인 대안입니다. 현대 문명의 도도한 물결은 거역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회화의 역사를 돌아봐도 바르비종파는 인상파로 대체되고, 도시 문명의 경쾌함과 화려함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말년에 밀레는 비평가와 대중 모두에게 따뜻한 평가를 받았지만, 밀레 풍의 그림은 회고주의적 취향으로 취급됐습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의 발전이 밀레 작품이 주는 감동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초고속화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밀레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와 사랑을 받을 만합니다.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초록색 대지, 울창한 나무, 향기로운 숲,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새와 동물은 바로 우리 인간의 가장 가까운 벗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문명에 지친 현대인에게 자연이라는 벗을 통해 깊은 위안과 평화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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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올림픽공원 안 소마미술관에서 마련한 ‘밀레 탄생 200주년 기념전’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씨 뿌리는 사람’ 앞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봤습니다. 현대 생활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한 저로서는 귀농을 해 살아갈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지 위를 힘차게 걸어가며 씨를 뿌리는 그림 속 주인공의 당당한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연 속에서 소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