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호

대만은 지금도 中 해양진출 막는 美 불침항모

신동아-미래연 연중기획 중·국·통 | 문흥호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장 |

  • 입력2018-10-03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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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 경지 오른 양안 교류… 강자가 약자 포용한 결과

    • 남북도 양안처럼 경제적으로 win-win할 우회로 찾아야

    • “中 6개로 쪼개진다” 대만이 꾼 백일몽

    • 독립도, 통일도 바라지 않는 美 “카드로 남아 있으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문흥호(60)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양안(중국-대만) 관계에 천착해온 중국 정치 연구자다. 한양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대만 푸싱강(復興崗) 정치연구소에서 석사학위,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일연구원 중국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오리건대 정치학과 초빙교수, 현대중국학회 회장,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자유중국’에서 ‘타이완’으로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공영(共榮) 네트워크 구축과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을 대주제로 한 중장기 연구 과제를 진행하면서 중국과 남북한, 중국과 대만 관계를 심도 있게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13억인의 미래-중국은 과연 하나인가?’(1996) ‘중국의 대외전략과 한반도’(2006) ‘북한, 어디로 가는가?’(2010) ‘중화전통과 현대중국’(2012) ‘한국-대만 관계사 1949~2012’(2015) 등이 있다. 

    중국과 대만은 하나인 듯 둘이며 둘인 듯 하나다. 양안 관계는 미·중, 중·일 관계뿐 아니라 중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대(對)대만 정책 또한 동아시아를 요동치게 하는 변수다. 7월 27일 한양대(서울 성동구)에서 그와 대담했다. 

    양안 관계 연구에서 존경받는 학자로서 최근엔 한국 신남방·신북방 정책과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연계하는 정책 연구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 대만에서 공부했습니다. 지금처럼 ‘타이완’이 아니라 ‘중화민국’이라고 일컬을 때입니다. 과거 양안 관계는 중국 대륙 공산당과 대만으로 물러난 국민당 관계를 가리켰습니다. 우리에게 공산당은 적, 국민당은 친구였죠. 국민당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와주기도 했고요.” 

    ‘자유중국’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죠.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할 수 없을 때예요. 어릴 적부터 ‘중국’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중국 유학은 불가능했습니다. 미국, 홍콩, 대만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게 대안이었죠.” 

    첫 학술논문도 양안 관계를 다뤘더군요. 



    “장제스(蔣介石) 총통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1988년 1월 사망합니다. 종신직이니 죽어야 집권이 끝나는 것입니다. 장징궈 사후 중국-대만 관계가 어떻게 될지 논문으로 썼습니다.” 

    그가 중국-대만 관계에 관심을 둔 것은 양안 관계에 빗대 남북 관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장징궈가 죽기 직전 통제를 느슨하게 풀어줍니다. 1987년부터 중국과 대만이 빈번하게 접촉해요. 그해 11월부터 친척 방문(探親)을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공산당과 담판·협상하는 게 불법이었어요.” 

    국민당은 1949년 이래 불접촉·불담판·불간섭 3불 정책을 고수하면서 공산당과 대화에 응하지 않다가 1987년 11월 3촌 이내의 친족 방문을 허용했다. 경제 실리와 외교 고립을 피하고자 교류 확대에 나선 것이다.

    “남북도 우회로 찾아 교류 늘려야”

    “지금이야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이따금 하지만 남북은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중국-대만 간 친척 방문을 지켜보면서 남북 지도자들이 이런 것도 해결하지 못하냐는 생각이 들었죠. 장징궈가 민간 교류를 확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북 관계와 양안 관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지금도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몇 명이 만날지, 며칠간 만날지를 두고 지루한 정치적 논의가 이어집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는 1991~1995년 통일연구원에서 일했다. 

    “1991년은 남북 관계가 매우 좋을 때입니다.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됩니다. 고위급회담을 시작한 후 15개월 만에 남북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과 관련한 기본 문서에 합의한 겁니다. 기본합의서 채택 18일 뒤인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되고요. 통일연구원에서 대만의 전례를 우리가 어떻게 벤치마킹할지 연구했습니다. 양안이 인적 교류에서 남북보다 크게 앞서 있었거든요.” 

    현재도 양안 간 경제 교류는 일각에서 대만 경제의 중국 종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활발합니다. 

    “남북과 양안 교류 협력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도 정치적 문제가 생기면 ‘올 스톱’ 됩니다. 중국-대만 교류는 정치와 경제가 따로 놀아요. 정치·이념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남북이 경제·사회적으로 윈윈(win-win)할 우회로를 어떻게 만들지가 제 관심사입니다. 사상이 달라 결혼할 수는 없으나 둘 다 이익을 보는 방법을 살피는 것입니다. 경제와 정치가 따로 노는 중국과 대만은 이런 부분에서 최고 경지를 이뤘다고 봐요.” 

    남북 관계와 양안 관계는 닮은 듯하나 구조나 배경이 크게 다릅니다. 

    “매우 다르죠. 중국인은 양안 관계와 남북 관계를 비교하면 못마땅해합니다. 양안은 한 나라거든요. 중화인민공화국이 1971년 10월 제26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 2758에 따라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분으로 확정되고요.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대체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됐습니다.”

    ‘동시에 그리고 각각’ 유엔 가입한 남과 북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한국과 북한은 1991년 9월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동시에 그리고 각각’ 유엔에 가입했다. 

    “중국에 대만은 ‘하나의 중국’에 속한 지방정부입니다. 대만성(省)일 뿐이죠.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중앙정부-지방정부 관계라고 중국인은 인식합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았다. 일본은 대만성을 폐지하고 총독부를 설치했다. 대만이 청(淸·1616~1912)에 복속된 것은 1685년이다. 푸젠성 대만부로 존재하다 1885년 대만성으로 승격했다. 

    “중국과 대만이 나뉜 건 내전 탓입니다. 공산당, 국민당이 수십 년간 전쟁을 치렀습니다. 내전 와중에 일제에 맞서고자 합작도 했고요.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했는데 대만을 해방하지 못한 겁니다. 대만과 중국 사이에 대만이 관할하는 진먼다오(金門島)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푸젠성 샤먼(廈門)에서 10㎞밖에 떨어지지 않았어요. 푸젠성에서 눈으로 빤히 보이는데도 해군력이 부족해 대만 본토는커녕 진먼도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국제법상 남북은 주권국가 관계인 반면 중국과 대만은 한 국가지만 공산당 통치권이 대만에 미치지 못합니다. 대만은 그들 나름대로 총통도 뽑고 총리도 있고 장관도 있습니다. 경제력도 상당하고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6000달러(2018년 IMF 기준)에 달해요. 요컨대 양안 관계는 한 국가도 아니면서 다른 국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국제법이 규정하는 규범과 현실에 괴리가 있습니다.” 

    남북 및 양안 관계에서 가장 큰 외부 요인은 미국입니다. 

    “남북 및 양안 관계에서 미국은 무엇인가? 또 다른 제 연구 주제입니다. 양안 관계가 설정되는 데 중국과 대만보다 큰 역할을 한 나라가 미국이에요. 당사자보다 미국이 좌지우지한 게 더 많습니다. 남북 관계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이 한국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양안 및 남북 관계에서 미국 요인이 과거보다는 약해졌죠. 

    “그렇기는 합니다. 중국 요인이 커지다 보니 과거보다 약해졌죠. 과거에는 100개의 대만 문제가 있다면 90개를 미국이 좌지우지했습니다. 지금은 70개 정도 될까요. 지금도 양안 문제에 개입하지만 과거처럼 함부로는 못 합니다.”

    각자표술(各自表術) ‘하나의 중국’

    양안 관계는 미·중 패권 경쟁과 맞물려 있습니다. 

    “중국 지도자가 누구든 대만 문제에서 미국에 밀리면 굉장한 타격을 입습니다. 주권, 영토 문제인 동시에 혁명 완수라는 측면에서 대내적으로 대만 문제는 굉장히 커요.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도 대만은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중국 견제가 부딪치는 최전선이에요.” 

    남북은 정치적 접촉은 빈번했으나 민간 및 경제 교류는 부족한 반면 양안은 정치 교류는 거의 없으나 민간 및 경제 교류는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합니다. 

    “대만은 정치적으로는 중국과 대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히 국민당이 그렇죠. 대륙에서 속았으면 됐지 또 속을 수는 없다는 투예요. 공산당이 말하는 통일전선에 속아 대만으로 쫓겨왔다는 인식입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상황을 보면 객관적 인식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공산당과 만나지 않겠다는 원칙이 강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엮이는 게 유리하니 대만은 해협교류기금회, 중국은 해협양안관계협회를 조직해 양안이 소통합니다. 민간단체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 국가주석과 대만 총통이 최측근이나 신뢰하는 이를 임명해 대리합니다. 정치적으로 만나지 않으면서도 만나는 것과 같은 우회로를 만든 거죠.” 

    중국과 대만이 맺은 ‘92년 합의(九二共識)’가 양안 관계에서 뼈대 노릇을 합니다. 

    “92년 합의, 그러니까 ‘92공식’에서 공식은 컨센서스(consensus·공감대)라는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중국이 하나라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맥락에서 ‘중국은 오로지 하나’라는 원칙에 합의한 겁니다.” 

    중국과 대만이 인식하는 ‘하나의 중국’은 어떻게 다릅니까. 

    “지구상에서 ‘중국은 하나’라는 것은 같습니다.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합의하면서 해석은 각자표술(各自表術)하기로 했습니다. 대만이 얘기하는 하나의 중국은 중화민국, 중국이 얘기하는 하나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입니다. 92공식을 통해 중국은 대만이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반면 대만은 ‘중화민국’ 명칭을 사용하는 준(準)독립 상태를 유지합니다. 대만식으로 말하면 ‘중국은 하나야, 그런데 내가 말하는 중국은 중화민국, 네가 얘기하는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야’가 된 건데요. 한반도에서 이 같은 방식으로 합의가 가능할까요. 제가 농담으로 중국인 아니면 할 수 없는 합의라고 말하는 까닭입니다.”

    “중국의 포용이 교류·협력 토대 노릇”

    언뜻 보기에 중국이 양보한 모양새입니다. 

    “중국이 훨씬 크니 양보한 거죠. 대만도 일부 물러섰습니다.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공비(共匪)’라고 일컬었습니다. 1992년 중국 국력은 지금보다 약하지만 양안 관계가 교류·협력으로 나아가게 된 키워드는 중국의 포용입니다. 중국이 양보하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교류·협력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호혜 및 대등의 교류 원칙에서 중국이 항상 양보했거든요. 답답한 게 남북은 양보를 아예 안 하려고 합니다. 대등, 호혜가 제일 중요해요. 남쪽에서 이산가족 100명이 가면 북쪽에서도 100명만 와야 합니다. 수십만 명이 순서를 기다리는데 다른 사안으로 다투면서 이산가족 문제를 연계합니다. 여유 있는 쪽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난국이 돌파되지 않아요. 요즘엔 북한이 핵무장을 했기에 다르게 볼 수 있으나 과거에 북한은 절대적 약자였습니다. 중국은 왜 양보했을까요. 남북 관계에서도 약자 처지를 배려하는 게 필요해요. 네가 항복하기 전까지 너하고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윽박질러서 뭘 얻습니까? 중국이 대만을 경제적으로 옥죄겠다고 마음먹으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대만이 경제의 40%를 중국에 의존하거든요. 중국이 대만 기업에 굉장한 특혜를 줍니다. 대만 관광업도 중국 덕분에 먹고살아요.” 

    대만 현 집권당인 민진당은 국민당과 달리 독립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92공식’을 한 차례도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양안 관계 및 통일에 대해 중국은 공산당 일당 지배이기에 견해가 단일하지만 대만은 다당제 국가로서 중국 대륙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분열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다툰 관계가 회복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구성원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통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언젠가 통일하자는 것은 다르지요. 

    대만은 독특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1895년 일본 식민지가 된 후 1945년 중화민국으로 귀속됩니다. 한반도에서 독립은 민족이 해방되는 굉장히 기쁜 일이었는데 대만은 조금 달랐어요. 친일 청산이라는 게 대만에서는 지금도 논란이 되지 않아요.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졌거든요.

    ‘독립’에 방점 찍은 민진당

    8월 19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방문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이 NASA 소속 우주비행사 마이클 핀과 함께 존슨우주센터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현직 대만 총통이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중국은 차이잉원의 NASA 방문에 반발했다.

    8월 19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방문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이 NASA 소속 우주비행사 마이클 핀과 함께 존슨우주센터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현직 대만 총통이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중국은 차이잉원의 NASA 방문에 반발했다.

    일본이 패망한 시점은 내전이 격해지면서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릴 때입니다. 국민당 정부는 대만을 후방 병참기지로 활용했습니다. 일본 식민지 때도 없던 아사자가 1946~1947년 나타납니다. 내전에서 패배한 패잔병들이 대만으로 들어왔는데 어땠겠습니까. 규율도 없고 엉망이었습니다. 대만 사람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요. 17세기부터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이지만 대만 사람인 원주민은 ‘조국에서 왔다더니 일본보다 더하네’라고 생각했죠. 

    국민당이 대만을 장악하고자 무리수를 둔 게 1947년 2·28사건입니다. 대만에서 일어난 봉기를 국민당이 진압하면서 학살이 일어납니다. 1949년 5월부터 장징궈 집권기인 1987년 7월까지 계엄령이 이어집니다. 40년 가까이 계엄이 이어지다 보니 대만인들은 계엄령을 숨 쉬는 공기처럼 여기고 살았죠.” 

    대만에 원래부터 살던 이들은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일컫고 자신들은 본성인(本省人) 혹은 내성인(內省人)이라고 규정했다. 외성인이 고위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민진당이 2008년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냅니다.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2000~2008년 집권하는데 정치를 잘 못했습니다. 이념적으로 대만 독립만 강조하다 역풍을 맞았으며 경제 관리에도 잘못이 많았어요. 미국은 대만이 독립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통일도, 독립도 안 된다는 게 미국이 가진 생각이에요. 워싱턴이 카드로 사용할 상태로 남아 있으라는 거죠. 천수이볜이 미국에도 골칫덩어리가 되면서 워싱턴과 베이징이 동시에 국민당 정부를 원하는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마잉주가 정권을 되찾아와 국민당이 2008~2016년 집권합니다. 2016년 차이잉원이 승리하면서 민진당이 다시 집권당이 됐고요. 독립 지지 세력이 가진 꿈은 싱가포르처럼 되는 것입니다만 중국과 미국이 그렇게 해줄 리가 없죠.” 

    민진당도 대만 사람들이 중화민족 일원이라고 여깁니까. 


    “부정합니다. 천수이볜 집권기 대만사(史)를 새로 편찬합니다. 차이잉원이 2012년 총통 선거에 나왔을 때는 당선하기 어려웠습니다. 2016년에는 왜 당선됐느냐? 친미주의자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대만 사람들에게 미국은 할아버지 격입니다. 미국의 다리를 붙잡아야 한다고 여겨요. 차이잉원은 속으로는 철저한 독립주의자지만 천수이볜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자제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경제 관계를 망쳐서도 안 되고요. 대만 사람들은 차이잉원이 대만의 생존 공간을 넓혀 준(準)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리라고 기대했는데 중국 압력으로 수교국이 계속 줄어듭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수교국을 계속 잃고 있죠. 최근엔 경제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아 지지율이 떨어지는 형국입니다.” 

    미국 관점에서는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대만의 가치가 더 커졌겠습니다. 


    “올해 3월 미국 의회가 대만여행법을 통과시킵니다. 미국과 대만의 고위 공직자가 자유롭게 상대 국가를 방문할 수 있게 된 거죠. 미국은 또 국방수권법을 통해 대만과 군사 교류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차이잉원을 미국이 도와주는 모양새예요. 미국재대만협회(American Institute in Taiwan)가 대만 주재 미국대사관 구실을 하는데 청사를 굉장히 크게 증축했어요. 대만의 잠수함 국산화 작업을 미국이 돕는 것으로 알려졌고요.”
     
    앞서도 언급했듯 남북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안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외적 변수는 미국이죠. 양안 관계에서 미국 요인은 동아시아 지역 정세 전반의 문제와 관련되기에 매우 복잡합니다. 그런데 중국도 똑같습니다. 대(對)미국 관계 연장선상에서 대만을 다루려 합니다. 특히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화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됩니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도 나날이 커지고요.

    미국-중국-대만 ‘애증의 삼각관계’

    “미국, 중국, 대만은 애증의 삼각관계예요. 늘 변합니다. 국공내전 때 미국이 국민당을 돕습니다. 전폭적으로 지원했는데도 국민당이 패배하죠.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난 후 트루먼 정부는 영사 1명만 남기고 외교관을 모두 철수시킵니다. 미국이 보기에 국민당이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장제스를 살린 게 6·25전쟁입니다. 냉전 시기 미국은 대만을 두고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썼어요. 중국과 미국이 수교하고 베이징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평가절하됩니다. 사고나 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투였죠. 그때는 링거만 꽂은 상태로 장기 요양하라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보약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도를 펼쳐봅시다. 캄차카에서 홋카이도를 거쳐 일본 열도, 대만으로 이어지는 선이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습니다. 베트남 항구를 미군이 쓴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필리핀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대만은 남중국해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동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곳이죠. 지금도 미국에 대만은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에요. 미국재대만협회 무관이 예전에는 예비역이었는데 현역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진먼다오의 레이더 기지가 중국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봅니다. 미국이 이런 대만을 왜 버리겠습니까. 불침항모를 유지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대만에는 미군이 주둔하지 않습니다. 국방수권법은 대만에 무기를 파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중국을 견제하는 데 대만만 한 카드가 없어요.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대만의 전략적 가치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만 독립선언 시 무력 사용 法으로 규정한 中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중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합니까. 

    “전쟁하지 않으면 시진핑이 권좌에서 내려와야 해요. 대만여행법이 통과되자 중국 공군이 대만을 향해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미국도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중국이 커졌어요. 구축함 몇 대? 항공모함 몇 대? 중국이 열세인 건 맞죠. 그렇더라도 중국은 대만 독립을 결코 방치하지 않습니다.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을 사용한다고 법으로도 규정해놓았고요. 미국이 대만을 지키고자 파병할까요.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물론 미국이 파병할 가능성이 0%라고 보지는 않아요. 앵글로색슨만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켜온 민족을 찾기도 어렵죠.” 

    공산당 집권이나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중국이 대만을 돌파구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만을 카드로 볼 때 80%는 미국이 쥐고 있다고 봅니다. 중국 내부 문제 탓에 대만에 개입한다?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면 자연스럽게 대만을 흡수할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중국 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면 서운하니 중국이 불리한 부분을 꼽아봅시다. 중국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변수로 따져볼 수 있습니다. 1988~2000년 집권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중국이 6개로 쪼개지기를 바랐습니다.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질 때 대만은 ‘소련도 무너지는데, 중국 저까짓 거야’ 하면서 꿈에 부풀었죠. 중국이 통합돼 있으나 광둥공화국, 푸젠공화국, 상하이공화국 같은 측면이 있긴 해요. 1990년대 초반 대만 학자가 푸젠, 광둥, 저장과 대만을 묶어 통일하자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희망사항일 뿐이죠. 중국에 혼란이 오더라도 분열될 것 같지 않아요. 시간은 어쨌든 중국 편입니다. 가능성은 낮으나, 미국이 중국과 일전을 벌이는 상황이 연출되면 시간이 대만 편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이 엄청난 경제 위기에 빠지는 시나리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아요. 대만 경제가 중국에 의존하는 형국이라 중국 경제에 위기가 오면 대만 경제도 함께 날아갑니다.”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합니다. 하루아침에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휘날렸습니다. 한국과 대만 간 교류 현황은 어떤지요. 

    “대만이 한류를 확산한 거점입니다. ‘꿍따리샤바라’를 부른 클론이 대만에서 각광받은 게 한류의 시작이에요. 인구 2350만 명은 중국 어떤 성(省)보다도 적습니다만 대만으로부터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통상 분야에서 대만은 교역액 5, 6위를 오가는, 한국의 굉장히 중요한 무역 파트너입니다. 대만과는 국교를 맺을 수 없으니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 합니다.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는 측면도 있는데 상호 보완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윈-윈 할 길을 찾아야죠. 우리는 미국만큼 힘이 없기에 중국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대만과 교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만,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할 게 많은데 그만큼 못 하고 있어요.”

    뿌리 깊은 대만의 ‘반한 감정’

    대만의 반한(反韓) 감정을 어떻게 봅니까. 

    “국민당 어법으로 말하면 ‘우리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너희가 총 한 자루가 있었느냐, 우리가 다 해줬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단교했느냐’는 겁니다. 반한 감정의 뿌리가 굉장히 깊습니다. 한국에 서운함이 많은 거죠. 반한 감정에는 일종의 대국 의식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도왔는데 모두가 변해도 너희는 변하지 말아야지’라는, 한국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인데 역사적으로 중국이 한반도를 바라볼 때의 대국 의식이 국민당을 통해서도 이어집니다. 국민당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중국이거든요. 이 같은 인식이 아래세대로도 이입됐습니다. 한국이 서운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단교하면서 대학, 연구소들도 대만과 연을 끊고 중국으로 달려가기 바빴죠. 단교 이후 대만이 북한에 접근합니다. 북한과 관계 발전을 도모해 한국에 복수하려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97년 대만에서 나온 핵폐기물을 북한에 보내 처리하는 합의까지 맺습니다. 서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람들이 평양을 뻔질나게 드나들더군요. 핵폐기물 이전은 무산됐으나 국가 간 관계가 이렇습니다.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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