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일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과도기적 전쟁’이었다.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을 생각까지 했다. 만주에서 러시아가 확보한 기득권을 부정했으며 ‘오렌지 작전’이라는 명칭의 대일(對日) 군사작전도 계획했다. 만주를 둘러싼 미·일 대립은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어진다.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러일전쟁 풍자삽화.
1904~1905년 조선·만주 이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청일전쟁이 동아시아 지역 전쟁(Regional War)이라면 러일전쟁은 영국·독일·프랑스·미국 등 열강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린 유라시아 전쟁(Eurasian War)이다. 열강 모두 전쟁의 추이를 심각하게 관찰했다.
조선 외무대신대리 뺨 때린 독일공사관 1등서기관
경부선 철도 공사 현장을 그린 기록화. [국립중앙박물관]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까지 조선은 영국, 미국과 일본, 러시아 간 세력 균형 아래 ‘무기력한 평화’를 누렸다. 조선 주재 독일공사관 1등서기관이 조선 외무대신대리의 뺨을 때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고종의 특사 호러스 알렌에게 미국은 ‘일격도 못 날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절 지원해줄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루스벨트는 조선 정부와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못난 정부, 못난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왕비 민씨가 시해된 1895년 10월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사건)을 성공시킴으로써 조선 정부를 친러화했지만,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 타협하는 정책을 취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1896~1898년에 걸쳐 체결한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 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 협정, 로젠·니시(Rosen·西) 협정은 두 나라가 타협한 대표적 사례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만주까지 번지자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난이 진압된 후에도 철군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고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는 것과 러시아와 협상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다가 영일동맹(1902년 1월)으로 방향을 잡았다.
러시아는 1902년 러불동맹 적용 범위를 동아시아로 확대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후 러청 철군협정(露淸撤軍協定)을 체결하는 등 극동에서의 이권 강화와 관련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듯했으나 제1기 만주 주둔군 철군까지만 진행했을 뿐 제2기 주둔군 철군 대신, 도리어 랴오닝성 남부와 지린성 전역을 점령했다. 러시아가 갑자기 정책을 바꾼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받은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를 비롯한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압록강 유역으로 병력을 파견한 후 삼림 벌채권 이행을 명목으로 신의주 부근 용암포를 군사기지화하는 등 조선 영토에도 야심을 보였다. 러시아는 19세기 말에도 함경도 경흥과 원산, 부산 영도 등에 욕심을 드러낸 바 있다.
日,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극동함대 기습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 [위키피디아]
1903년 8월부터 1904년 2월 개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와 일본은 여러 차례 만주 및 조선 문제를 두고 교섭했다. 일본의 견해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삼는 대신, 러시아의 만주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 독점과 북위 39도선 이북 조선반도를 중립지대로 설정하는 등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선반도를 이용해선 안 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일본의 제1차 협상안은 ①청·조선 양국의 독립 보전 ②상업상 기회 균등 ③조선·만주에서 러일의 상호 이익 보장이 골자다.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일본 외무장관은 10월 1차 수정안에서 조만교환론(朝滿交換論)을 명백히 하면서 일본의 조선반도 파병권은 물론 조만 국경 중립지대 설치를 요구했다. 12월 중순에야 제시된 러시아의 수정안은 청나라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없이 조선 북부의 중립지대화 및 조선 영토의 군사적 사용 금지 등 조선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12월 하순 제시된 일본의 2차 수정안과 1904년 1월 초 러시아의 답변도 기존 태도를 되풀이함으로써 타협의 여지가 사라졌다.
일본은 1904년 1월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기로 했다. 일본은 자국의 최후통첩에 대한 러시아의 답변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2월 임시각의에서 전쟁을 결정했다.
1904년 2월 6일 사세보항을 출항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함대가 2월 8일 러시아 극동함대 근거지 뤼순항을 기습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2월 9일 일본군은 다른 함대를 동원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했다. 그러곤 2월 10일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하얼빈 집결 러시아軍 반격 노리다
조선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인 1904년 1월 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러일 어느 쪽도 조선을 존중해주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반(反)러시아 동맹조약(조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도고 함대가 뤼순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으며 4월 말 조선반도를 거쳐 북진한 일본군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하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제2군은 다롄의 난산(南山)을 점령해 러시아군의 근거지 뤼순을 고립시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하던 러시아 함대가 6월 쓰시마해협까지 남하해 일본 육군수송선을 격침했으나 일본은 같은 달 만주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5개 사단으로 이뤄진 일본군이 9월 랴오양을 점령했다. 사무라이 스타일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지휘한 제3군은 1905년 1월 1일 3만~4만 명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른 끝에 요충 중 요충인 뤼순 203고지를 점령했다. 일본군의 203고지 점령은 뤼순항에 갇힌 러시아 극동함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육군 총사령관이 지휘한 25만 일본군은 1905년 3월 알렉세이 크로파트킨 극동지역 총사령관이 지휘한 32만 러시아군을 선양 전투에서 격파해 육전을 마무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병력은 120만 명에 달했다. 해군은 전함 7척, 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砲艦) 11척으로 이뤄졌다. 대다수 함정을 뤼순항에 기항시킨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을 보유했다.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은 정규군 10만 명을 보유했으며 철도수비대 2만4000명은 동청철도 부근 지역에 분산돼 있었다.
만주에 진입한 일본군은 대부분 1905년 이동했으며 40여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일본은 전투 여력을 상실했다. 1년 전비를 4억5000만 엔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간 19억 엔이 투입됐다. 보급로가 길어져 일본군의 전술상 취약점이 노출되자 러시아는 주력 부대를 하얼빈에 집결해 반격 기회를 노렸다.
선양전투 이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잃어 종전을 서둘러야 할 처지가 됐다. 러시아 역시 1905년 1월 발생한 반란(피의 일요일) 탓에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상실했다. 두 나라는 강화가 불가피함을 인식했다.
돈스코이호, 울릉도 앞바다서 自沈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러시아 해군은 △발틱함대 △흑해함대 △극동함대로 구성됐다. 흑해함대는 오스만투르크 해군을 견제해야 했기에 해군력 전부를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진해만 인근에서 기다리던 도고 함대는 24시간 계속된 쓰시마 해전에서 정자전술(丁字戰術)을 써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을 포로로 잡았다. 탈주한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일본 해군에 나포당하지 않고자 울릉도 앞바다에서 자침(自沈)했다.
쓰시마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도 만주의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으며 보급도 비교적 원활하게 유지됐다.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러시아 대표 비테가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04년 4월~1905년 5월 미국과 영국이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 제공한 차관 4억1000만 달러 중 40%가량이 전비로 충당됐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러일 교섭 시 제3국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일본의 요청을 받은 영국은 프랑스 외상 테오필 델카세와 러시아 외상 람스도르프의 중재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또한 러시아 함대에 대한 제3국의 석탄 공급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를 경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다시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 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서는 전쟁터를 확대하지 말고, 북중국을 포함한 중국 영토 불가침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러시아의 만주 기득권을 부정했다. 미국이 조선반도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을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 편을 든 배경에는 개전과 동시에 루스벨트의 하버드대 동창생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특사로 파견해 친일 여론을 일으키게 한 데도 원인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향한 ‘과도기 전쟁’
러시아와 동맹이던 프랑스는 영국과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러일전쟁에 말려들지 않고자 중립을 선언하고 4월 8일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우애협약)을 체결했으나 러시아 함대에 석탄을 공급해주는 등 동맹국으로서 의무는 다했다.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발칸·중동이 아닌 극동으로 돌리고자 한 독일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공격받을 시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1903년 7월 이후 여러 차례 암시했다. 그러면서도 1904년 1월 일본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실제로 개전과 함께 중립을 표명했다. 다만, 영러 간 도거뱅크(Dogger Bank) 사건(러시아 해군이 어선 등 영국 민간 선박에 포격한 일) 때 보인 독일의 노골적 러시아 지지는 여타 열강의 불신을 가중했다. 러일전쟁이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으로 이어지면서 대(對)독일 포위망이 구축된다. 러일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과도기적 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쓰시마 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잠재적 적국 독일을 견제하려면 러시아 군사력이 지나치게 약해져서는 곤란하다고 봤다. 미국 또한 일본이 동아시아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위험시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열강은 하나같이 자국 이익을 확보하려 들었는데 △러독 뵈르케(Koivisto) 밀약 △영일동맹 조약 개정 △미일 태프트·가쓰라(Taft·桂) 밀약 등이 모두 이런 목적에서 체결됐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5년 6월 8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제의를 수락했다. 미국은 6월 12일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공표했다. 강화회담 장소 선정과 대표 선임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 상륙을 결행해 러시아를 압박했다.
일본을 대표한 고무라·다카히라(小村·高平)와 러시아를 대표한 비테·로젠이 8월 9일~9월 5일 진행한 강화교섭은 일본이 제시한 12개 제안을 토대로 이뤄졌다.
러일 양국은 △조선에서 일본 우위(paramount) △랴오둥반도 (일부) 조차 △창춘-뤼순 간 남만주철도 및 지선(支線) 관할 문제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①사할린 문제 ②전비 배상 문제 ③중립국에 억류된 러시아 군함 인도 문제 ④러시아 극동해군 제한 문제에는 이견을 조율하지 못했다.
일본은 ①·②항을 합쳐 북위 50도 이북 북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주는 대가로 12억 엔을 내놓으라는 새로운 요구안을 제시했다.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배상금 문제는 철회하고 남사할린 할양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나라가 타결한 것이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다.
조선 왕족·귀족 76명 賣國 대가로 훈작·상금 받아
러일전쟁 결과로 조선반도는 물론 남만주에서도 일본군의 지배력이 확고해졌으며 일본은 열강으로 인정받는다.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을 청나라에서 보상받으려 했다. 고무라·우치다-경친왕·위안스카이가 1905년 12월 체결한 만주에 대한 청일조약은 지린-창춘 및 신민툰-펑톈(선양·瀋陽) 철도에 대한 비밀 합의가 포함돼 있다. 이 합의는 1930년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일본은 그간 주장해온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을 파기함으로써 열강 대부분을 적으로 돌렸다. 미국·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간 상호 견제를 통해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는 데 있었기에 남진 위협이 사라진 후 일본의 만주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확보 시도는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미국은 오렌지 작전이라는 대일(對日)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만주 관련 미·일의 대립은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의 길을 택하는데 그것이 1907년 러일협상이다.
미국과 화해하고 러시아와 타협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무혈 병탄했다. 조선 왕족·귀족 76명이 매국(賣國) 대가로 훈작과 상금을 받았다. 부일 왕족 외에 숭명(崇明)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노론(老論) 57명, 소론(小論) 6명, 북인(北人) 2명이 매국 대열에 포함됐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조선반도로의 남진이 좌절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발칸으로 진로를 바꿨다.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진출 시도는 1907년 영국과 협상으로 성사됐으나 이해관계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 남하 시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투르크와 분쟁 소지를 남겼다. 청나라는 러시아와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러일전쟁 중 러시아를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의화단의 난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가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건국
1902년 직례총독이 된 위안스카이는 신건육군과 북양군을 통합해 북양상비군으로 개편했다. 위안스카이는 부하 돤치루이(段祺瑞), 차오쿤(曹), 펑궈장(馮國璋) 등으로 하여금 북양상비군을 지휘케 했다.위안스카이가 군부를 장악하자 만주족 중신들은 위협을 느꼈다. 위안스카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시태후(西太后)가 일찍 사망하는 것이었다. 시태후 사망 시 권력을 회복할 광서제가 자신을 배신한 위안스카이를 처형하려 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태후는 1908년 광서제와 거의 동시에 죽었다.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아이신고로 자이펑(載)의 아들 푸이(溥儀)가 광서제의 뒤를 이었다. 푸이는 만 3세의 유아(乳兒)였으므로 자이펑이 섭정을 했다. 자이펑은 만주중심주의자였다. 집권한 그는 형 광서제의 원한도 있고 해 위안스카이를 처형하려 했다. 자이펑은 위안스카이를 직접 죽이려 하면 내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장즈퉁의 충고를 받아들여 암살 전문가를 고용했다. 이를 눈치 챈 위안스카이는 도주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쑨원, 황싱, 장빙린, 숭자오런, 왕자오밍 등 한족 혁명가들은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했다. 혁명을 향한 불꽃이 재점화한 것이다.
황싱이 주도한 창사(長沙) 봉기, 류다오이가 주도한 제2차 후난사건, 위지청이 주도한 황강(黃岡) 봉기, 친저우(欽州) 봉기 등 폭동이 끝없이 일어났다. 판촨자가 주도한 1908년 10월 안후이 신군사건(新軍事件)은 군대마저 청나라에 등을 돌렸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안후이사건 이후 신군 지휘관 상당수가 혁명에 동조한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 주둔 군부대에서 일어난 총성이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의 불길이 쓰촨과 후베이, 후난, 장시 등으로 번졌다. 혁명군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리위안훙(黎元洪)을 반강제로 도독에 취임시켰으며 각 성은 독립을 선언했다.
혁명파는 유감스럽게도 우창치이(武昌起義) 이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청나라가 쪼개질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쑨원이 귀국해 대총통에 추대됐다. 1912년 1월 1일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이 마침내 건국됐다.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 황제. [위키피디아]
청(淸)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지방 유력자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배치됐다. 1911년 6월 우전부(郵傳部) 장관 성쉬안화이가 전국 간선철도 국유화를 선언하자 쓰촨성 유력자들이 가장 먼저 이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다.
쓰촨 폭동은 다이너마이트 심지에 불이 붙듯 인접한 후베이로 번졌다. 쓰촨 폭동이 신해혁명의 부싯돌 구실을 한 것이다.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사태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자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총리로 기용했다. 섭정 자이펑의 ‘자기를 벌하는 조서’도 나왔다. 이는 청 왕조의 조종(弔鐘)을 뜻했다.
위안스카이. [동아DB]
위안스카이는 혁명군과 타협이 이뤄지지 않자 돤치루이와 차오쿤 등 부하들로 하여금 혁명군을 공격하게 했다. 쑨원을 지지하는 혁명군과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군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티베트, 몽골, 신장 등이 떨어져 나갈 움직임을 보였다. 나라 전체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자 쑨원은 위안스카이와 타협하기로 했다.
1912년 2월 위안스카이의 강요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했다. 건국 294년 만에 청이 멸망한 것이다. 나라 멸망에 항의해 수백 명의 만주족과 몽골족, 한족 관료가 순사(殉死)했다. 쑨원의 양보로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곧 독재를 강화했다. 중국동맹회를 전신(前身)으로 창당한 국민당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세력 확장에 나섰다. 위안스카이는 당세를 키우려고 동분서주하던 국민당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을 암살하고, 군사력을 보유한 장시도독 리러쥔(李烈鈞), 광둥도독 후한민(胡漢民), 안후이도독 바이원웨이(柏文蔚)를 다른 성(省)으로 전임시켰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