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호

사교육 철옹성 대치동

‘명문대 운동권’이 일구고 어설픈 교육 정책이 키웠다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8-09-2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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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입정책 좌지우지하는 ‘대치동’의 힘

    • 1993년 수능 도입과 논술전형 확대가 방아쇠

    • 운동권 및 전교조 출신 사교육 스타들

    • 상류층 반칙, 사교육업계 탐욕, 일반의 불안이 만든 괴물

    대치동 은마아파트 인근 학원가 [동아DB]

    대치동 은마아파트 인근 학원가 [동아DB]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사교육 업계가 더욱 힘을 얻게 됐다는 분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범 교육평론가에게 물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비율 유지, EBS 반영 비율 축소, 현행 고교 체계 유지…. 이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 방향을 보면 전반적으로 사교육이 늘어날 우려가 크죠.” 

    이 평론가의 답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학원가의 서태지’로 불리던 인기 강사 출신이다. 2003년 사교육업계를 떠난 뒤 교육평론가로 변신했고, 지난 대선 때는 문재인캠프 정책자문단에서 교육 공약 입안에 참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선관위에 제출한 공약서에는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경감하겠다’는 대목이 있다. 취임 1년여가 지난 지금, 이 약속이 지켜졌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도 찾기 어렵다. 

    이 평론가는 우리나라 사교육의 상징적 공간으로 통하는 ‘대치동’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몸담고 있던 시절에도 대치동은 이미 괴물이었다. 지금은 좀 더 작고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 괴물이 됐다. 복잡하고 챙길 거 많은 입시 현실에서 큰 플레이어가 줄어든 대신 작은 플레이어가 늘어났다”고 평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대치동은 영원하다

    대치동 강사 출신으로 지금은 학부모운동가가 된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에게 다시 물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대입정책이 사교육 억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보십니까. 

    “정시 확대는 대치동이 가장 바라는 방향입니다. 정시로 뽑는 인원이 늘면 부유층 자녀들은 재수, 삼수하며 몇 번씩 입시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학종 전형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니 관련 사교육업계 역시 다 살아남죠. 게다가 지난 1년여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꾼다’ ‘자사고 외고를 없앤다’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새로운 교육정책이 추진되면 학부모들은 일단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입시 전문가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여론이 ‘정시 확대’ 쪽으로 기우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이제는 ‘입시 문제에서 학교는 뒤로 빠지라’고 내놓고 요구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공교육은 확실히 힘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사교육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은 새로운 교육으로 시작한다’며 강력한 ‘교육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가 야심만만하게 내건 △수능 절대평가 전환 △외고·자사고 일반고 전환 등의 정책을 제대로 추진해보지도 못한 채 자리를 떠나게 됐다. 

    현직 고교 교사인 김진우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에게는 아예 이렇게 물었다.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업계가 결국 ‘김상곤’을 이긴 겁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김 정책위원은 최근 법원 판결로 서울시교육청의 자사고 폐지 정책에 제동이 걸린 데 주목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시내 6개 고교의 자사고 지정을 취소했다. 교육부가 이 처분을 ‘직권취소’하고 자사고 지정을 유지하자 서울시교육청은 법원에 ‘교육부 직권취소 처분을 무효로 해달라’는 내용의 소를 내며 맞섰다. 최근 대법원은 이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서울시교육청이 단독으로 자사고 지정을 취소할 수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희연 교육감과 함께 ‘자사고 폐지’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김상곤 전 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 정책위원은 “지금으로서는 외고·자사고가 존속할 가능성이 커졌고, 대입 정시 확대로 외고·자사고에 매우 유리한 입시 환경이 조성됐다. 조기 사교육업계에는 호재가 생긴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분석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입 경쟁은 일종의 상수(常數)입니다. 그걸 단박에 정리하기는 힘들죠. 하지만 조기 사교육은 좀 다릅니다. 초등학생, 유치원생까지 사교육 시장으로 달려가는 건 상당 부분 고교 단계 입시 경쟁 때문입니다. 이 부분만 정리해도 사교육 수요가 확실히 줄어들 텐데, 지금 상황으로는 이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교육 공화국의 역사

    1989년 8월 5일 전교조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아DB]

    1989년 8월 5일 전교조 조합원들이 단식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아DB]

    한국 사회에서 대치동은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동네 이름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도 잡히지 않는 거대 사교육 시장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다. 교육 전문가들은 취임 전부터 사교육비 절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문재인-김상곤’ 체제 아래서도 대치동이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 단계 더 성장할 발판까지 마련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 배경에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이 있음은 분명하다. 정부가 2007년 발행한 ‘국정브리핑’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과도한 교육열은 수십 년 전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민학생’부터 입시 전쟁에 뛰어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흐름은 1980년 7월 30일 신군부가 전면적 과외 금지를 선포하며 ‘일시 정지’된다. 당시 신군부는 과외를 ‘반국가적 행위’로 여겼고, 과외를 하다 적발된 사람을 ‘사회정화’ 차원에서 처벌했다. 이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정태수 전 문교부 차관은 그 배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민심이 ‘과외만 잡아라. 그러면 대통령 시켜준다’였다.” 1980년에도 이미 상당수 국민이 ‘망국적 사교육’에 고통받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신군부 조치 후 한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사교육 열풍이 언제, 왜, 그것도 하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다시 불기 시작한 걸까. 돌아보면 ‘대치동 공화국의 탄생’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인화(人和)가 맞물린 결과다. 

    천시의 측면에서 볼 때 출발점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로 여겨진다. ‘전면적 과외 금지’를 몰아붙인 신군부는 1987년 ‘6·10항쟁’ 이후 사실상 힘을 잃었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1970~80년대 학번 대학생들은 ‘투쟁’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1989년 교육민주화 운동을 하다 교단을 떠나게 된 ‘전교조 해직교사’들과 더불어 수많은 고학력자가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사회에 진출했다. 사람들은 ‘운동 전과’를 가진 이들을 존중했지만 같이 일하기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동아일보는 1990년 5월 22일자에서 ‘전교조 해직교사는 1500여 명이며, 상당수가 서점·문방구·출판사 경영, 학원강사, 번역업 등에 종사한다’고 보도했다. 일반적 직장생활이 어려운 이들의 호구지책 중 하나가 학원강사였던 셈이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이 펴낸 ‘대치동 사교육 1번지’는 이 흐름을 이렇게 정리했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대학생 세대 중 일부는 (중략) ‘운동판’의 주인에서 강남 사교육의 공급자로 위치를 바꾸었다.’ 

    사교육업체 메가스터디가 2014년 2월 28일 개최한 신학기 설명회. 수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참석했다. [동아DB]

    사교육업체 메가스터디가 2014년 2월 28일 개최한 신학기 설명회. 수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참석했다. [동아DB]

    실제로 정파에 관계없이 많은 운동권 출신이 사교육업계에 진출했다. 크게 성공한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조동기논술학원’으로 유명했던 조동기(고려대 85) 씨는 전대협 출신이다. ‘청산학원’의 최원극(외국어대 84) 씨는 ‘자민통’ 계열로 분류됐고, 유레카논술아카데미를 이끈 장민성(성균관대 84) 씨는 사노맹 활동을 했다. ‘메가스터디’를 창업한 손주은(서울대 81) 씨와 대표강사 이범(서울대 88) 씨, 스카이에듀를 만든 이현(서울대 83) 씨 등도 운동권 출신으로 알려졌다. 이현 씨는 대학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뒤 강사 생활을 시작한 경우다. 정봉주(외국어대 84)·정청래(건국대 85) 전 의원 또한 정치권에 나서기 전 각각 사교육업체를 운영했다. 

    현재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진경 씨는 2006년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원 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 이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주범”이라는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 자신이 운동권 출신인 데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라 당시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386 운동권’ 사교육 중심에 서다

    전문가들은 사교육 분야에서 운동권의 세력 확장이 본격화한 건 1990년대 초중반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1992년 9월 서울시내 중고교 재학생의 학원 수강이 전면 허용됐다. 사교육 업계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에 힘을 실어준 건 1993년 처음 치러진 수능이다. 기존의 암기식 학력고사와 달리 수능은 학생의 사고력, 논리력, 비판 능력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 시절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토론과 세미나를 반복한 운동권 출신에게 최적화된 입시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논술 전형 또한 신설됐다. 교육 당국의 잇단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는 논술의 영향력을 점점 강화했다. 

    예를 들어 2000년 수능은 사상 유례없이 쉬웠다. 만점자가 66명에 달했다. ‘물수능’이 사회적 논란이 되자 교육 당국은 이듬해 수능 난도를 또 ‘사상 유례없이’ 높였다. 수능 점수가 1년 사이에 평균 66.5점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권 대학이 그나마 변별력 있는 논술의 비중을 높이면서 운동권 출신 강사들은 날개를 달았다. 장민성 씨와 함께 유레카논술아카데미를 운영했던 박홍순(성균관대 82) 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달에 수천만 원이 과외비로 오갔고, 아예 ‘얼마면 되느냐.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며 일종의 ‘백지수표’를 건네는 일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2003년 사교육계를 떠나기 전 연봉이 18억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 이범 씨는 이 시기를 “‘한국 경제의 검은 구멍에서 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사교육이 무섭게 커져가던 시절, 대치동은 이들을 품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른바 지리(地利)다. 조선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던 대치동 일대는 1963년 서울 성동구에 편입됐다가 1975년 강남구의 일원이 된다. 동아일보 1976년 2월 28일자는 대치동을 도곡동과 함께 영동의 변두리 지역이자 ‘가장 싼 곳’으로 거론한다. 서울 중심지인 종로구 무교동 땅값이 3.3㎡(1평)당 30만~90만 원에 달하던 시절, 대치동의 3.3㎡ 당 가격은 4만~5만 원에 불과했다. 당시 기사에는 ‘영동 개발이 성공하려면 주택 건립을 유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치동이 주택지로 거듭난 건 1979년 은마아파트가 준공되면서부터다. 28개동 4424가구에 이르는 이 단지를 시작으로 속속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대치동은 1990년 전체 주택의 83.8%가 아파트인 ‘아파트 숲’으로 변모한다. 이 집을 가득 채운 건 새롭게 성장하는 중산층이었다.

    대치동의 地利와 人和

    서울시는 인구 분산을 위해 강북의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썼다. 1976년 경기고를 시작으로 1988년까지 20여 개의 공·사립학교가 강을 건넜다. 이들을 따라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젊은 엘리트도 대거 강남 이주를 결정했다. 특히 초등학생 학령기 자녀를 둔 386세대의 이사가 많았던 걸로 알려졌다. 이들은 사업가와 고위 관료 등이 이미 자리를 잡은 압구정동 등 강남구 북쪽 대신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남쪽에 터를 잡았다. 대치동 도곡동이 이에 해당한다. 

    저렴한 임대료는 막 사교육계에 뛰어든 386에게도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대치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 입시 컨설턴트는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강남에서 학원이 많은 지역은 반포, 청담, 신사 쪽이었다. 이들과 비교할 때 대치동은 사교육업계 후발주자인 386도 진출할 수 있는 수준의 ‘합리적 임대료’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대치동 언저리에서 자녀 교육에 관심 많은 중산층 386과, 사교육을 생업으로 삼은 운동권 386이 조우했다. 

    이들의 인화(人和)는 놀라운 시너지를 발휘했다. 마침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영향으로 삼성물산이 도곡동에 지은 타워팰리스에 미분양 사태가 발생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들까지 대거 대치동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앞의 입시컨설턴트는 “강남 남쪽에 사람이 모여드는 시기는 정부의 과외금지 정책이 완화되고 수능이 도입되면서 사교육업계가 성장하던 때와 겹친다. 이때 자녀를 경기, 서울, 휘문 등 이른바 ‘명문고’에 보내려고 강남행을 택한 중산층이 대학 입시에 사교육업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니즈’에 386운동권이 부합하면서 대치동은 사교육의 메카로 입지를 굳힌다”고 설명했다. 

    대치동이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이 된 건 운동권 출신 강사들의 남다른 ‘전략’ 덕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루에 6일씩 학교에 다니던 2005년, 정부가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쉬는 ‘놀토’ 정책을 내놓자 대치동 학원가엔 바로 ‘토요집중반’ 프로그램이 생겼다. 명절 기간에 집중적으로 국영수를 파고드는 이른바 ‘명절 특강’을 만든 것도 대치동이었다. 

    사교육 전문가로 거듭난 386들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못잖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정부가 학생들을 공부 부담에서 해방시키고자 입시 전형에서 ‘비교과’ 평가 비율을 높이자 대치동은 즉시 최고 수준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에 대해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은 “조기교육, 선행학습 같은 ‘반칙’을 대중화한 곳도 대치동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차별화된 교육’을 원하면 386운동권이 방법을 찾아내 제공했다. 2000년대 이후 대치동에서는 운동권의 기획력과 부유층의 자본력이 결합된 상품이 끝없이 출시됐고 그것이 대중의 공포를 부추겼다. 그 결과 공교육 현장이 망가져버렸다. 나는 운동권이 한국 교육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대치동을 한국 사교육의 메카로 만든 386 강사들은 이제 대치동의 주류가 아니다. 50세를 훌쩍 넘긴 이들은 상당수가 은퇴했거나 새로운 인생 항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사교육 전문가들은 대치동의 명성을 흔들림 없이 공고화하고 있다. 박 소장은 “최근 대치동의 새로운 흐름은 포스텍과 KAIST 출신이 컨설팅 업계에 늘어난다는 거다. 이들은 온갖 데이터 분석으로 학부모를 현혹하며 입시 사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대치동은 ‘상류층의 반칙과 사교육업계의 탐욕과 일반인의 불안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사교육비 획기적 경감’을 목표로 하는 문재인 정부와 이들의 큰 싸움에서 일단 첫 판은 정부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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