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21일) 박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육군 3군사령부를 방문해 “북한 도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우리도 ‘때리고 어르는 전술’로 나갔다. 합참과 통일부가 북한에 대화하자는 통지문을 보낸 것이다.
북한은 김이 빠졌는지 더 이상 때리는 전술을 펴지 않았다. 전선 대련합부대가 전시로 전환하기 1시간 전인 오후 4시, 김양건이 ‘23일 판문점에서 김관진 실장과 1대 1 접촉을 하자’는 응답을 보내온 것이다. 오후 6시, 한국은 ‘회담을 하려면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나오라’고 대꾸했다.
다음 날(22일) 오전 9시 35분, 북한은 ‘황병서가 김양건과 나갈 터이니 김실장은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나오라’고 했다. 한국은 대답을 주지 않고 오전 11시쯤 휴전선 남쪽에서 발사해 평양의 핵심 시설도 격파할 수 있는 슬램-ER 탑재형 F-15K 전투기를 미 공군기(F-16)와 함께 출격시켜 시위비행을 하게 했다 그리고 25분 뒤 ‘좋다’는 답을 보내자, 12시 45분 북한도 OK를 보내왔다.
‘때리고 어르는 전술’은 우리 것이 통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때까지 북한군이 일부 포병부대를 ‘방열(사격준비)’시킨 것은 확인됐지만,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구사하려 기동에 들어간 기미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가진 청와대는 북한이 말한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 남긴 오후 3시, 판문점 접촉을 발표했다.
오후 6시 30분 판문점 회담이 열리자, 황병서와 김양건은 대북확성기 철거만 집요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기에, 회담은 평행선을 달렸다.
CCTV로 이를 지켜본 우리 관계자들은 황과 김이 김정은에게 받은 지시가 대북확성기 철거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양측은 1시간쯤 자기주장을 펼치다 목이 아팠는지, 입을 다물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 ‘침묵의 지겨움’은 23일 오전 4시 15분, 정회를 함으로써 겨우 마무리됐다.
우리 군은 ‘북한은 말로만 싸운다’ 고 판단하고 자신감을 가졌다. 2차 회의는 23일 오후 3시30분 시작됐다. 그때 동·서해의 북한 잠수함 기지에 계류해 있던 잠수함정 50여 척이 사라진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인민군이 전시상태로 전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긴장했다.
북한 해군의 수상함 전력은 우리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해군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을 두 가지로 추정해왔다.
첫째, 수적으로 많은 잠수함정을 풀어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 항구를 봉쇄하고 우리 수상함을 공격해 우리 함정들이 작전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성공했다고 판단되면, 두 번째로 공기부양정을 비롯한 모든 수상함에 특작부대인 해상저격여단원을 태워 초고속으로 인천이나 경기의 서해안으로 돌진시킨다.
北 잠수함정 기동의 한계
해안에 상륙한 해상저격여단원들은 해안가에 있는 건물을 장악하고 시민을 인질로 잡아 출동한 한국군과 대치한다. 옆구리가 찔린 한국군이 움찔할 때 군사분계선에 대기하던 인민군 전연군단이 제파식 공격으로 돌파구를 뚫고 그 틈에 특작부대를 대동한 기동부대가 서울로 돌격해 ‘역시’ 인질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북한 잠수함정들은 기지를 이탈했는데 전방지대에선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위한 인민군의 기동 움직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군은 북한이 열세를 보인 회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쇼’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만큼 인민군이 전시 상태로 전환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
북한 해군은 84척의 잠수함정을 가졌는데, 가동할 수 있는 것은 70척 이하로 판단된다. 그중 수리해야 하는 배가 있으니 실제로는 50척 정도가 움직일 수 있다.
평소 북한 해군은 1주일에 한두 척의 잠수함정을 출동시켜왔다. 바다가 어는 겨울 3개월 동안엔 기동하지 못하니(52주 중 12주) 연간 잠수함정 출동횟수는 40~80회, 어림잡아 50~60회가 된다. 잠수함정이 많은데도 이 정도밖에 잠수함을 출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연료 부족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갑자기 50척을 풀었다면, 잠수함 부대에 배정된 1년치 연료를 다 쓰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한 전문가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50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목했다. 한미연합군은 워치콘을 2로 올려 더 많은 정찰 자산을 가동했다.
북한 잠수함정(연어급과 상어급)은 소형이라 하루에 2~3번 부상해 공기를 주입해야 계속 잠항할 수 있다.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정찰위성이나 초계기 등으로 찾아낼 수 있다. ‘예상 대로’ 북한 잠수함기지 앞바다에서 공기 주입을 위해 부상하는 잠수함정이 자주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태풍 ‘고니’가 북상하는 것에도 기대를 걸었다. 태풍이 불어와 파고가 높아지면, 공기 주입을 위해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파도에 휩쓸려 쓰러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잠수함정 하부에 있던 황산 등 배터리 용액이 흘러나와 승조원들이 사망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잠수함정은, ‘황천(荒天)’이 예보되면 ‘황천(黃泉)’으로 가지 않기 위해 전부 기지로 돌아온다. 전문가들은 고니가 접근하면 자동으로 ‘북한의 잠수함 쇼’가 중단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로미오급 등 큰 잠수함 몇 척은 공격을 위한 침투를 할 수도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지 주변에 숨은 북 잠수함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만난 4인은 같은 얘기를 주고받다 다시 길고 긴 침묵에 들어갔다. 날이 바뀌어 24일 오전 10시가 되자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날 박 대통령은 “우리 대표단을 그만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두 번이나 내렸으나 실무진이 반대해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의 직후 우리 군은 미군의 B-52폭격기와 공격 원자력잠수함을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을 미국과 협의한다고 발표했다. 잠수함정을 푼 북한에 슬쩍 겁을 줘본 것이다.
회담이 삐걱대며 이어지던 24일 오후 3시 30분쯤, 서해 북방한계선(NLL) 60㎞ 북쪽의 고암포에 북한의 공기부양정 20여 척이 출동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잠수함정 출동에 이어 북한은 2단계 해상작전을 준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쇼를 강화한 것인가. 그때 군사분계선 북쪽 일부 전선에서는 침투를 주임무로 하는 인민군 특작부대들이 DMZ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북한 쪽에선 볼 수 없는 곳에 확성기를 설치했기에 북한은 절대로 확성기를 격파할 수 없다. 따라서 특작부대를 우리 쪽으로 침투시켜 확성기를 부수려는 것으로 추정됐다. 물론 쇼를 한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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