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했을 때, 중국의 중요 공업지대는 모두 연해에 있었다. 연해는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미국의 세력권과 맞닿아 있기에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순식간에 모든 생산능력을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연해 생산기지의 일부를 쓰촨으로 옮겨 전략공업지대로 육성했다.
마침 6 · 25전쟁, 베트남전쟁 등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쓰촨의 군수공장은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노동자에 대한 대우도 당시 중국 기준으로는 매우 좋았다. 자장커 감독의 영화 ‘24시티(二十四城記)’에 따르면, 30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은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 때도 이 지역 노동자에게는 매달 2근의 고기가 배급됐고, 노동자 부모는 자식이 대학에 가지 말고 평생 이곳의 노동자로 살기를 바랐다.
전략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땅이지만, 정작 쓰촨인들은 매우 평온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산이 천하의 난리를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 여행 중 스페인 친구 하비에르를 만났다. 그는 쓰촨에 반해 쓰촨에서 스페인어 강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보통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이 시끄럽다고 싫어하는데, 나는 오히려 편해. 아마 스페인인들도 중국인들처럼 시끌벅적하기 때문인가 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쓰촨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교적, 외향적, 낙천적인 성격도 비슷하다. 다만 화려한 립서비스로 끝나기 일쑤인 라틴계보다는 쓰촨인들이 더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편이다.
중국의 큰 도시는 어디에나 인민공원이 있지만, 쓰촨성 성도(省都)인 청두(成都)의 인민공원이 가장 개성적이다. 구김살 없고 소탈한 청두인들이 노는 모습이 무척 흥겹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아저씨, 아줌마들이 말춤을 추다가 패션쇼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니 폼을 재며 레드 카펫을 밟는다. 신선하고 유쾌한 패션쇼 워킹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소신을 당당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줬다. 한편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요가, 서예, 합창 등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이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차 한잔을 즐기고 안마와 귀청소를 받는 사람도 많았다.
쓰촨인들은 제갈량을 숭상하지만 ‘바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三個臭皮匠,頂個諸葛亮)’고도 말한다. 소박한 생활 속에서 길러진 민초들의 자신감이 대륙의 역사를 바꿔왔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대 촉나라는 독창적이고 정교한 삼성퇴 문화를 꽃피웠다. 청두 진장(錦江)의 야경, 인민공원에서 유머러스한 패션쇼를 벌이는 쓰촨 사람들(왼쪽부터).
쓰촨의 자랑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쓰촨 요리[川菜]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너무 느끼하고 기름이 많은 중국 요리다. 그러나 매콤한 쓰촨 요리는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매콤함이 기름의 느끼함을 없애주고 고소한 감칠맛을 살린다.
쓰촨 요리는 재료가 싸고 구하기 쉬우며, 간편하고 신속하게 조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맛과 영양까지 좋다. 가정식으로도 최적의 조건이다. 여기서 쓰촨의 중요한 문화 코드인 ‘실속’을 발견할 수 있다. 진귀한 중국 요리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둥 요리다. 중국의 요리 영화에서 볼 수 있듯 곰 발바닥, 상어 지느러미, 원숭이 골 등 희한한 재료를 조각하듯 멋있게 차려낸다. 그러나 쓰촨 요리는 두부, 돼지고기, 가지 등 흔하디흔한 재료를 쓴 마파두부, 회과육, 가지볶음 등이 대표적이다. 요리 초보자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말한다. “체면치레로 대접하려면 광둥 요리를 시키고, 실속 있게 먹으려면 쓰촨 요리를 시켜라.”
중원이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천하에 널리 알리는 데 골몰한다면, 산 속의 쓰촨은 천하가 알아주든 말든 조용히 실속을 차렸다. 매콤한 삼겹살 볶음이라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회과육(回鍋肉)은 원래 먹다 남은 고기를 어떻게 새 고기 못지않게 맛있게 먹을까를 궁리하다 나온 요리다. 솥에서 나온 고기(肉)가 다시 솥(鍋)으로 돌아가니(回) 회과육이다. 물산이 풍부해도 낭비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내실 있게 살 수 있다.
중원이 오랑캐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만리장성을 쌓은 반면, 쓰촨은 2200년 전에 거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을 만들었다. 만리장성은 전시 상황이 아닌 평시에는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도강언은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시에도 평시에도 풍부한 작물을 선사했다. 중원이 용이나 호랑이를 숭상할 때 촉이 숭상한 것은 누에다. 폼 나는 동물보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숭상한 것도 실속을 중시하는 쓰촨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제갈량이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실속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천재 전략가 이전에 명재상이었다. 도강언의 수리시설을 보강해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제갈량은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상을 줘도 시기하는 이가 없고 벌을 받아도 억울해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량이 군사 천재이기만 했다면 결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동틀 무렵 아미산의 금정(金頂), 쓰촨 어린이의 밝은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