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20대 리포트

‘전단지 배포 알바’ 감춰진 세계

“행인에게 성추행당하고 알선업체에 시달리고”

  • 김상준 고려대 언어학과 4학년

    kim.sangjun56@gmail.com

    입력2018-12-05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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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별 감추려 동물 탈 써”

    • “수도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 “근로계약서? 사업주 말이 법”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없음. [동아DB]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없음. [동아DB]

    토요일 오후 12시 30분 서울 명동. 붐비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고양이 탈을 쓴 사람이 부지런히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이따금씩 고양이 탈 속으로 손을 넣어 땀을 닦기도 했다. 그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손사래를 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겨우 입을 연 그는 여고생 정모(18) 양이었다. 정 양은 필자와 말하는 것을 망설인 이유에 대해 “여자인 걸 숨겨야 해서”라고 답했다. “여자인 걸 알면 이상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자면서 접근해 몸을 만지기도 해요.”


    “사진 찍자며 몸 만져”

    처음 성추행을 당했을 때 사장에게 이야기하자 “여자인 걸 숨기라”는 ‘주의사항’만 들었다고 한다. 정 양은 “전단지 알바하면서 성추행당할 줄은 몰랐다. 큰 탈을 쓰고 큰 신발을 신고 팔 토시를 착용해 여자인 걸 드러내지 않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라고 말했다. 

    명동역 6번 출구에선 양모(64) 씨가 네일아트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좀 도와드리겠다’며 말을 걸자 양씨는 머뭇거리다 가방을 가리켰다. 그 가방엔 네일아트 전단지가 아니라 헬스클럽 전단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양씨는 “여기서 ‘네일아트’ 끝내고 의정부에 가서 ‘헬스클럽’ 돌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양 씨가 ‘두 탕’을 뛰는 날이다. 보통 하루에 수도권 두세 곳에서 전단지를 돌린다고 했다. 

    양 씨는 “의정부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려 30분 일찍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먼 의정부에 알바를 구한 이유에 대해 “업체에서 그냥 가라고 한 것”이라며 “가라는 대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취재를 통해 거리의 전단지 배포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들이 확인됐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은 수도권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나눠준다는 점, 이들은 전단지 광고를 하는 업소로부터 직접 일감을 받는 게 아니라는 점,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과 전단지 광고를 하는 업소를 매개하는 소수의 알선업체가 있다는 점이다. 

    이 알선업체들이 주도하는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 과정에서 근로계약서 작성은 종종 무시된다고 한다. 전단지를 배포하는 몇몇 사람은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업무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다. 사업주의 무리한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18년 한 민간 조사에 따르면,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의 근로계약서 작성 비중은 48.7%로, 모든 아르바이트 중 가장 낮다. 

    전단지 배포 인력을 고용해 전단지 광고주와 연결해주는 A광고업체의 박모(53) 실장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알바생들도 돈 필요할 때 몇 번 하고 빠지는 식이라 이들이 오히려 근로계약서 쓰자고 하면 번거로워한다”고 말했다.

    “30분 하니 가라고 해”

    그러나 현장 알바생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혜화역 대학로의 한 레스토랑 앞에서 전단지를 돌린 김모 씨는 “지난주 2시간 일하러 왔는데, 30분 하니 가라고 하더라. 계약서가 없으니 사업주의 말이 곧 법”이라고 말했다. 

    전단지 배포의 일감 독점 구조 때문에 근로계약서는 애초에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시청역 9번 출구에서 전단지를 나눠준 이모 씨는 “일감을 꽉 쥐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서 연락이 와야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 말고도 일할 사람이 많아 근로계약서를 운운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했다.

    ※ 이 기사는 필자가 고려대언론인교우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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