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부터 북한인 상대 도강증 발급 중단
‘5년간 입국 불가’ 지장(指章) 찍게 해
‘힘 있는’ 사업주 비밀리에 北인력 고용 계속
9월 20일 북한 주민들이 단둥세관 카트에 짐을 가득 싣고 출국 절차를 밟고 있다. [단둥=윤완준 동아일보 특파원]
北노동력 고용한 공장주의 비명
현지 소식통은 단둥시가 5월 초순부터 북한인을 상대로 내주던 도강증 발급을 중단했다고 알려왔다. 도강증은 북·중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북한인이 중국으로 나올 때 발급하는 통행증이다. 왕래가 잦은 접경 지역 북한인의 편의를 봐준 것으로 단둥의 경우 신의주에 거주하는 북한인을 상대로 1개월, 6개월, 1년 등 체류 기간이 명시된 도강증을 발급했다. 도강증은 북한 노동자가 단둥에서 불법 취업하는 도구로 활용돼왔다. 짧게는 1개월부터 길게는 1년까지 일하면서 도강증 기한이 만료되는 시점에 북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단둥시는 도강증 기한이 만료된 북한 노동자가 출국 후 24시간이 지나 재입국하면 도강증을 사실상 갱신해줬다. 원래는 다시 서류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북·중 당국 모두 업자들이 주는 뇌물을 받고 편법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이마저 귀찮고 번거롭다고 여겨 생략하기도 했다. 능력 있는 사업가들은 노동자들을 실제로 출국 조치하지 않고 서류만으로 북한에 다녀온 것처럼 처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행태를 파악한 베이징이 ‘도강증 발급 중단’ 카드를 활용해 단둥의 불법 취업 북한 인력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는 미국을 의식해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인사들이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를 위반하고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이는 미·중 무역 분쟁 와중에도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도구가 됐다. 중국으로선 커다란 부담이었다.
“단둥 포기할 수도…” 커지는 불안감
도강증 발급 중단뿐이 아니다. “단둥 당국이 불법 취업 북한 노동자가 출국할 때 ‘앞으로 5년간 입국할 수 없다’고 쓰인 서류에 지장(指章)을 찍게 하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단둥 일대 북한 노동력을 고용한 공장주들이 비명을 지른다. 단둥에 넘쳐나던 북한 노동자의 귀국 행렬도 쉼 없이 이어진다. 소식통은 “10월 24일 아침에만 최소 1500명이 나갔다”고 전했다. 소규모 공장에서는 10∼20명씩, 중대형 규모 공장에서는 100∼200명씩 북한으로 돌아갔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니 공장 폐업도 속출한다. 벌이가 좋다는 수산업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국인 수산업자들의 수완이 좋긴 하지만 이들 역시 단속의 여파를 막아낼 재간이 없어 북한 출신 인력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소식이다. 단둥의 불법 취업 북한 노동자 숫자는 10만 명 정도이던 것이 11월 중순 기준으로 2만 명 정도로 뚝 떨어진 것으로 추산된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냐. 이제 단둥에서 북한 노동자 데리고 하는 사업 포기하고 떠나야 하나? 정말 그런 거냐?”
대북 사업가들의 쏟아지는 질문과 항의에 단둥 공안당국 관계자는 “일단 11월과 12월 두 달은 싹쓸이할 거다. 이 두 달간 강제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 북한 노동자는 최대한 쫓아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 노동력을 추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인데, 이 같은 발언은 올 연말 집중적으로 단속한 후 내년쯤 숨통을 터줄 것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단둥에서 일련의 대북 압박 지시를 내리면서 중국 당국은 ‘미국의 제재’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이뤄지는 조치라고 언급한다. 이번 조치가 미국 압박에 따른 게 아니라 국제사회의 주요한 책임을 지닌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란 점을 강조하는 것인데, 단둥 현지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다.
단둥 당국이 보인 일련의 움직임은 현지 사업가들이 가졌던 ‘희망적 관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북 사업가들의 미래 전망은 낙관적이었다. 단둥 경제의 핵심인 북한과의 교역을 극단적으로 막으면 이는 단둥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중국 정부가 적절한 수준에서 ‘힘 조절’을 할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단둥에서의 불법행위가 미국이 중국을 비난하는 데 중요한 이슈가 되고, 이로 인해 베이징의 위기의식이 최고조로 치닫는다면 “베이징이 단둥을 버릴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단둥 현지에서는 “단둥은 중국의 일부일 뿐이다. 베이징은 정말 다급해지면 이 작은 도시를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 섞인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굳이 북한 인력 고용할 필요 있나”
9월 20일 북한 노동자들이 출국을 앞두고 단둥세관 앞에 서 있다. [단둥=윤완준 동아일보 특파원]
이들이 불법 노동력이란 사실을 단둥 당국도 잘 안다. 100명 넘는 인력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그 목적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뒷돈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들이 1개월 체류 비자를 가졌기에 한 달에 한 번씩 들락날락해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 한 번은 약간의 뇌물로 용인해줬으나 두 번째부터는 달라졌다고 한다. “안 되겠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100명, 200명이 왔다 갔다 하는 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공장주는 뒷돈을 더 크게 올려줬다.
뒷돈의 규모는 업주마다, 단속요원마다 다르다. 노동자 숫자가 많은 곳은 당국에 건네주는 뒷돈 액수가 많은 만큼 1인당 금액을 적게 해서 받고, 노동자 숫자가 적은 곳은 1인당 금액을 많이 받는다.
공장주는 북한 노동자가 출국했다 재입국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보통 1인당 월 1000위안(16만여 원) 정도를 지불한다. 이 중 뒷돈이 850위안가량이다. 나머지는 식비와 이동경비, 북한 세관 주변 숙소 비용 등이다. 적게 주는 공장은 이 비용이 300위안(5만 원)인 곳도 있다. 1인당 1000위안의 추가 비용은 공장주로선 적잖은 부담이다.
북한 노동자를 고용한 봉제공장 사례를 보자. 월급과 숙식비를 더해 매월 북한 노동자 1인당 보통 2100위안(34만여 원)이 지출되는데 여기에 1000위안이 추가되니 1인당 3100위안(50만여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런데 단둥 현지에서 동일 업종의 중국 노동자에게는 월 3500위안(57만여 원)이 들어간다. 추가비용과 뒷돈을 포함하면 북한 인력과 중국 인력 간 인건비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다. 즉 매월 북한 노동력을 한 차례 출입국시켜주는 비용 부담이 커질수록 공장주 처지에선 ‘굳이 북한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북한 노동자는 장점이 많긴 하지만 단점도 있다. 성실하고 손재주가 좋지만 정해진 일만 할 줄 알아 응용 능력이 부족하다. 봉제 공정을 보면 중국 노동자들은 생산 도중 스타일 변화를 요구해도 금방 적응해 따라오는데 북한 노동자들은 처음에 지시한 스타일에서 바뀌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변화를 수용하는 데 서투른 것이다. 중국 노동자들은 작업 도중 5가지 의류 스타일을 제시하면 이를 다 만들어내지만, 북한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해 답답하다고 현지 공장주는 말한다.
북·미 ‘대북제재’ 놓고 기 싸움
이런 현실이다 보니 단둥에서는 공장마다 “이제 포기한다” “이미 발급된 도강증이 만료되는 시점인 내년 4월까지만 하고 안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업주들이 북한 노동자를 포기하면 이는 업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장들이 노동력을 찾아 단둥을 탈출할 수 있다. 뒷돈을 상시적으로 챙겨오던 공안 당국과 국경경비대 인사들에게도 비상이 걸린다. 어떻게 해서든 단둥 당국이 해법을 찾아내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까닭이다. 베이징은 단둥에서 단속을 통해 대북제재 결의를 준수한다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표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대북제재 완화’ 목소리를 높인다. 1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을 맡자마자 ‘제재 완화’를 강조했다. 러시아도 중국과 보조를 맞춘다. 10월 북·중·러 3국은 처음으로 3자 차관급 협의를 하고 “유엔 안보리가 제때에 대북제재 조절 과정을 가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11월 6일 미국 중간선거, 11월 8일 뉴욕에서의 북·미 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북한과 미국은 ‘제재’를 놓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였다. 11월 1일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원도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적대세력들이 우리 인민의 복리 증진과 발전을 가로막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굴복시켜 보려고 ‘악랄한 제재 책동’에만 어리석게 광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검증을 통해 ‘북한 핵 프로그램 제거’를 확인할 능력을 얻을 때까지 대북제재는 해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先) 비핵화, 후(後)제재 완화’ 원칙을 거듭 밝힌 것이다.
이튿날(11월 2일) 조선중앙통신은 ‘언제면 어리석은 과욕과 망상에서 깨어나겠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관계 개선과 제재는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또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는데 ‘선 비핵화, 후 제재완화’라는 외마디 말만 되풀이하면서 바위 짬(틈)에라도 끼운 듯 대조선 압박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미 고위급 회담을 이틀 앞둔 11월 6일 북한은 돌연 취소를 통보했다.
‘동병상련’ 쿠바와 친밀 과시
11월 4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직접 영접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단상 오른쪽). 양복과 넥타이 차림의 김 위원장 대형 초상화가 공항에 걸린 모습도 포착됐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북한은 디아스카넬 의장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는 직접 공항으로 나가 디아스카넬 의장 부부를 영접하고 의장대 사열과 무개차 퍼레이드를 했다. 이튿날에는 디아스카넬 의장 부부를 노동당 본부청사로 초대했다. 이는 9월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공한 의전과 거의 같다.
방북 일정을 마친 디아스카넬 의장은 곧바로 중국으로 향해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북한과 중국, 쿠바 세 나라가 워싱턴 보란 듯 연합하는 모습이다.
고위급 회담을 취소해 뒤로 미루고 쿠바를 껴안는 모습을 보인 북한은 이후 ‘자력갱생’을 강조하고 나섰다. 11월 9일 북한 노동신문은 1면에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이 구호를 더 높이 추켜들고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힘 있게 다그치자’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에서 노동신문은 “유례없고 가혹한 제재 봉쇄 속에서도 발전하는 북한의 모습에 세계가 경탄하고 있다. 우리의 위력과 국가 경제력은 적대 세력들의 제재 압박보다 더 강하다”며 자력갱생을 촉구했다.
필자는 ‘신동아’ 11월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경제 관료들에게 “내년이면 제재 다 풀릴 것이니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2019년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반대 상황, 즉 제재 유지에 따른 자력갱생을 준비해야 하는 국면이 돼가고 있다. 11월 평양에서 발신된 다양한 신호에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김 위원장의 초조함과 분노가 담긴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