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난리 통에도 왕실을 유지하는 여러 기능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한창이던 1598년 1월, 궁궐의 음식을 맡은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경상도에서 중전(中殿)에 별도로 진상하는 생청어(生靑魚)를 배지인(陪持人)을 시켜 가져오게 한다면 먼 도(道) 사람들에게 많은 폐해가 생길 것입니다. 조처하기가 매우 어렵기에 감히 여쭙니다.
<조선실록 31년 1월 16일>
아직 전란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백성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상황인데 조정에서는 엉뚱하게도 중전에게 진상하는 생청어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생청어를 바치게 되어 있는 경상도 지방은 왜적이 침입하는 1차 관문으로, 전란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비록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이 전국적으로 들끓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는 여전히 수많은 왜적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고 답답했던 건 당시의 사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경상도는 왜적이 처음으로 쳐들어온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도보다도 더 심하게 인가가 텅 비고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또다시 큰 전쟁이 일어나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식이 아비를 잃고 통곡하니 애통한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공물(貢物)로 올리는 청어 하나를 없애지 않고 원래대로 바치게 했으니, 이를 통해 나랏일이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31년 1월 16일>
‘영일현 토산’ 청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상도 영일현에서 나는 토산품 중 하나로 청어가 실려 있다. 매년 겨울이 오면 이곳에서 청어가 가장 먼저 잡혔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경상도가 황폐해졌을 때에도 선조는 생청어 공물을 견감해주지 않고 계속 바치게 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어는 예부터 동해, 남해, 서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잡힌 흔한 생선이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수군들이 청어를 잔뜩 잡아다가 군량미와 바꾸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워낙 흔하고 값이 싸다 보니 가난한 선비들도 살찌운다 하여 ‘비유어(肥儒魚)’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청어 산지는 포항 앞바다의 영일만(迎日灣)으로, 그곳에서 맨 처음 청어를 잡아 진상하면 비로소 다른 고을에서도 진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조정에서 요구한 것은 그냥 청어가 아닌 ‘생청어’였다. 등 푸른 생선이라서 쉽게 부패하는 청어를 생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이 필수적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흔히 파발(擺撥)이라 하던 배지(陪持)까지 동원해야 했다. 한창 전란 중에 급보를 알리기 위해 존재하던 파발을 진상품 수송에까지 동원하다 보니 현지에서 발생하는 폐해가 만만치 않아 사옹원에서 임금에게 여쭙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일은 사옹원에서 따로 사람을 파견해 생청어를 인계받는 방식으로 바꾸어 폐해를 줄이는 쪽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할 뿐, 궁극적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조처는 아니었다.
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선조는 황해도의 생청어 공납을 견감해준 적이 있었다.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란했다가 가까스로 환도(還都)하면서 해주에 머무르는 동안에 내린 조치였다. 하지만 전란이 전국으로 확산되지 않은 정유재란 때에는 왕실 안위에 큰 문제가 없다 보니 경상도 지역에서 받는 고통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다. 전란이 끝난 뒤에도 청어 진상은 계속해서 백성을 괴롭힌 것 같다. 선조 33년(1600)에 체찰사(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이 올린 보고를 살펴보자.
잘못된 정사를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개선할 방법을 모색하여보았습니다만, 예전부터 지켜오던 규정이라 어찌할 수 없어서 장부를 조사하며 한숨만 쉴 뿐 감히 변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중에 그나마 조정해볼 만한 것이 딱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청어의 진상과 각 관사에 긴요하지 않은 공물을 올리는 일과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했을 경우 연해의 백성에게 곡식을 징수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상황을 잘 고려하여 이것들을 모두 감면하도록 하소서.
<선조실록 33년 2월 25일>
공폐(貢弊). 1753년(영조 29)에 공물을 생산하는 공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 탄원한 상소와 이에 대해 정부 측에서 조처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조는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마저 포기한 채 의주로 몽진(蒙塵)했다가 왜적이 평양까지 진격하자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했었다. 위기를 당해 국토와 백성은 이토록 쉽게 포기하면서 왜 그 흔한 물고기 하나는 전란 중에도 포기하지 못했을까? 사옹원이 생청어를 진상하는 일에 대해 여쭈자 선조가 즉석에서 내린 대답은 “편한 대로 하라”였다. 임금 자신은 별반 관심 없는 사안이니 해당 부서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어감이다. 한창 전란 중인 상황에서 생청어가 중전의 상에 오르기까지 백성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지 돌아보지 못한 임금의 무심함이 그저 야속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