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일푼 시작해 과일 장사로 평생 모은 전 재산 400억 쾌척

• 전차요금 아까워 걸어 다니고, 장사 후 식당일 하며 끼니 해결

• 산지까지 찾아가 좋은 과일 선점…“맛있는 과일 판다” 입소문

• 유방암 투병, 뇌경색 진단…정신 있을 때 기부하자 결심

• 내가 죽더라도 고생한 보람 남으니 기부가 상속보다 더 기뻐

• 자식에게 상속? 자기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의미 없어

주가는 폭락하고, 실업자는 늘고, 취업자 수는 갈수록 주는 팍팍한 현실이다. 쥐꼬리만 한 권력과 돈을 내세워 상식에서 벗어난 ‘갑질’을 일삼고, 부동산투기와 부정부패로 자기들 배를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된 사회지도층의 행태는 안 그래도 힘겨운 국민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고역인 시대에 ‘따뜻한 사연’ 하나가 우리 사회를 훈훈하게 적셨다. 평생 과일 장사를 해서 모은 400억 원대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한 노 부부 이야기다. 

김영석(91)·양영애(83) 부부는 평생 안 쓰고 아껴 모은 전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10월 25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고려대학교를 경영하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기부했다. 부부는 1차로 시가 200 억 원대인 땅 5필지와 건물 4동을 기증했고, 추가로 시가 200억 원대인 나머지 부동산도 기증할 것을 약속했다. 이 사연은 한동안 회자되며 사람들에게 ‘유산 상속’과 ‘기부’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노부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무학(無學)으로, 평생 시장거리에서 과일을 팔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별 관계없는 삶을 산 셈. 그럼에도 ‘사회지도층도 하기 힘든 기부를 한 이유가 뭘까’ ‘대체 어떤 분들일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11월 2일 오후 서울 청량리에 있는 노부부의 집을 찾았다. 양영애 어르신이 기자를 맞았다.

고려대병원 환자보호자 출입증

400억 원대 자산가의 집이라기엔 너무 검소했다. 골동품처럼 보이는 장식장과 운치 있는 목조 장식품이 눈에 띄긴 했지만, “가구 공장에서 10만 원도 안 주고 산 것”이라고 한다. 거실에 놓인 가죽 소파도 40년 전 친언니에게 얻은 것이고, 작은방엔 40년 전 장만했다는 ‘생애 첫’ 장롱이 놓여 있었다. “좋은 걸로 바꾸시지…”라고 하자 “아직 멀쩡한 걸 왜 바꿔요”라며 기자를 나무란다. 

거실 벽면에 한국화 두 점이 걸려 있다. “그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하고 묻자 “20년도 훨씬 전에 샀어요. 보기에 좋아서. 그림 좋지요?” 하며 빙그레 웃는다. 그림 가격을 물어보았지만 “살 만했으니까 샀죠. 마음에 들어서” 하며 얼버무린다. 그림을 바라보는 양 어르신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양 어르신은 고령인 데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인터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목소리에 힘이 있고 발음도 또렷했다. 



- 김영석 어르신은요? 

“많이 아파요. 원래 아파요. 연세가 많아서. 다리를 못 쓴 지는 한 4년 됐어요.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이젠 말도 잘 못 하고…. 그날(고려대에서 기부식을 한 날) 이튿날 새벽에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집에 누워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학교 사람들이 구급차를 보내서 고대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거실 탁자에 고려대병원 환자보호자 출입증이 놓여 있었다. 

- 남편 보러 병원엔 매일 가세요? 

“잘 못 가요. 나도 다리를 잘 못 쓰고, 많이 아파요.” 

- 기부를 한 후 어떻게 지내세요. 

“괜히 바빠요. 전화도 많이 받고. 오늘 아침에도 여러 통 받았어요. 기자들도 자꾸 찾아오고. 쓸 것도 없는데 미안하게(웃음).” 

- 기부한 것에 대해 주위에서는 뭐라고들 하던가요. 

“좋은 일 했다고들 하죠.” 

-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아직 그런 일은 없었어요. 집 밖에 잘 안 나가니까요.” 

- 마음이 허전하진 않으셨어요? 

“뭐가요. 오히려 기부라는 게 이래서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뭐가 그렇게 좋은가요. 

“사람들이 다들 칭찬하잖아요. 전화하는 사람마다,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잘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칭찬받고 사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공부 안 시켜도 형제들 중 가장 잘살 거다”

김영석 어르신은 광복 후 북한 지역이 된 강원도 평강군 남면 출생이다. 15세에 부모를 잃은 후 돈을 벌기 위해 형제들을 남겨놓고 맨손으로 월남했다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다. 양 어르신은 “영감은 평생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가여워요”하며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줬다. 

“고생을 많이 했어요. 6·25전쟁이 나자 먹고살려고 군대에 자원했을 정도니까요. 제대 후 경기도 양평에 가서 머슴살이를 했어요. 주인집 아들이 동대문에서 과일 도매상을 했는데, 영감 보고 ‘여기 있으면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한다’며 서울로 데리고 와 자기 가게에서 일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요. 

“작은어머니가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내 신랑감 찾던 중 영감을 소개받고는 ‘평생 밥은 안 굶기겠다’며 결혼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 누군지 만나보지도 않고요? 

“아버지가 무서워서 시키면 무조건 해야 했어요.” 

- 어르신은 결혼 전까지 뭘 했나요. 

“동생들 공부하는 거 뒷바라지했죠. 언니하고 저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여동생은 서울여상, 남동생들은 중앙고와 연세대를 졸업했어요. 다들 좋은 학교 나왔어요.” 

- 어르신은 왜 공부시켜달라고 하지 않았죠? 

“아버지가요 좀 별나요. 사람을 잘 봐요. 하루는 친구분들이 제가 딱해 보였는지 ‘왜 쟤는 집에서 밥만 시키냐’고 하니까 아버지 말씀이 ‘쟤는 공부 하나도 안 시켜도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살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안 시켰어요. 전쟁 때문에 공부할 기회를 잃은 것도 있고요.” 

- 신혼생활은 어땠나요. 

“스물넷에 결혼했는데, 영감이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고생 많이 했어요. 창신동 산꼭대기 판잣집 문간방에서 월세를 살았어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먹고, 공중화장실을 사용하는 곳이었죠. 비가 내리면 머리맡으로 빗물이 떨어지고, 겨울엔 코가 얼 정도였죠. 영감이 과일가게에서 받는 월급이 500원이었는데, 집에는 100원밖에 안 가져와요. 나머지는 술 사 먹는데 다 쓰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첫째를 등에 업고 종로5가 제일은행 앞에서 과일을 팔기 시작했어요.”

아이 업고 리어카 노점

양 어르신은 과일 장사를 한 게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전쟁 때 내가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렸어요.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 대구를 지나 경산 자인면으로 피난을 갔어요. 정부에서 피난민에게 쌀은 넉넉하게 배급했지만 반찬이 될 만한 게 없었어요. 파란색 사과가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다들 그걸 채 썰어 소금에 절여 밥하고 먹곤 했죠. 그걸 보고 20리를 걸어 과수원에 가서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떨어진 사과를 한 소쿠리 주워 시장에서 팔았는데, 금세 다 팔렸어요. 그렇게 번 돈을 가져가 과수원 주인에게 주니까 절반을 다시 주며 ‘먹을 거 사 먹으라’고 해요. 그 돈으로 사과 한 소쿠리를 달라고 해서 시장에서 팔고 우리 식구 반찬도 해 먹고 그랬죠.” 

- 처음부터 남편과 함께 과일 노점을 한 건가요. 

“같이는 무슨…. 영감에겐 말도 안하고 시작했어요. 며칠 후 알고는 찾아와 ‘살림이나 하지 왜 장사를 하느냐’며 화를 내긴 했지.” 

- 과일은 남편이 일하는 가게에서 가져다 판 건가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여러 도매상을 돌아보고 맛있는 걸 골라서 가져다 팔아야지.” 

-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요령이 있나요? 

“처음엔 주는 대로 팔았는데, 안 팔리는 날이 많았어요. 과일은 재고가 남으면 손해예요. 이래선 안 되겠다, 맛있는 걸 팔아야 잘 팔리겠다 싶어 새벽부터 시장에 나갔어요. 전국에서 과일을 실은 트럭이 종로5가 시장에 도착하는 게 새벽 1시경이거든요. 맛있는 과일을 먼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지만 매일 통금을 뚫고 청량리부터 종로5가까지 1시간을 걸어갔어요. 처음엔 경찰이 붙잡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나오니까 그냥 보내줬어요.” 

이런 노력은 이내 “이곳 과일은 맛있다. 믿고 살 만하다”는 입소문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하루 10짝 남짓 팔았지만 이내 70∼80짝을 가져다 놔도 금세 동이 났다.

해장국집 아르바이트

양 어르신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돈 버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점점 장사 수완이 늘었고, 규모도 커졌다. 물론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었다. 처음엔 시장에 온 트럭에서 좋은 과일을 선점해 팔다, 나중엔 아예 산지까지 내려가 좋은 과일을 선점해 가져다 팔았다. 

“포도는 경산 포도가 가장 유명하고 맛있어요. 경산에서 올라오는 트럭 기사에게 기름값을 줄 테니 경산까지 태워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경산을 오가며 화주, 산지 매입상들과 친해지고, 달러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현금으로 사니까 최상품을 내게 공급해줬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 내려갈 때 돼지 한 마리 잡고 막걸리 받아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들 먹이게 했어요. 그렇게 해주면 일꾼들이 신이 나 내가 가져갈 상자는 더 정성을 다해 담아줘요. 당시만 해도 상자 아래에 중·하품을 깔고 위에만 최상품을 얹고는 최상품이라고 붙여 파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일꾼들이 제 것은 온전히 최상품으로만 채워놓았죠. 그러니까 손님들이 제 물건은 무조건 믿고 사가요. 새벽 4시에 와서 열 짝, 스무 짝씩 싣고 가곤 했어요.” 

- 다른 과일도 그렇게 한 건가요? 

“11월이면 제주도에 내려가 귤을 사느라고 2월까지 있었어요. 거기서도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현금 거래하고, 일꾼들 잘 먹이고 하니까 좋은 귤을 많이 선점할 수 있었죠. 내가 제주도에 있으니까 서울에선 남편이 장사를 했어요. 우리 귤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해요.” 

- 집을 많이 비웠겠네요. 

“그래서 저는 평생 밥을 안 했어요. 지금도 밥할 줄 몰라요. 평생 엄마가 살림을 다 해줬거든요. 대신 남이 하루 5시간 잘 때 난 3시간밖에 안 자고 일했어요.” 

- 초등학교도 안 나왔으면 글자도 몰랐을 테고, 셈도 느려 장사하면서 고생했을 텐데. 

“처음엔 그랬어요. 안 되겠다 싶어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을 사서 혼자 한글을 깨쳤어요. 돈 계산을 하다 보니 셈은 저절로 늘더군요. 내가 장사머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웬만한 셈은 암산으로 착착 했으니까요. 그래서 영감이 물건 팔고 날 속여서 비상금을 만들려 해도 속이질 못했어요(웃음).” 

새벽 장사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양 어르신은 장사 후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 한다. 일을 해주면 부부가 공짜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밥값만 아껴도 그게 얼마인데요. 부지런해야 돈을 모으죠. 처음엔 종로5가에서 청량리 집으로 돌아올 때 전차를 탔어요. 요금이 20전인가 30전인가 했는데, 그 돈도 아까워서 나중엔 뛰어서 갔어요.”

건물 구입 후 가슴 치고 후회도

그렇게 모은 돈으로 건물을 사기 시작했다. 1976년 첫 건물을 산 후 옆 건물, 앞 건물이 매물로 나올 때마다 은행돈을 빌리고 전세 보증금을 합해 매입했다. 어느새 총 11필지 8개 건물의 주인이 됐다. 다 합하면 500평쯤 된다고 한다. 양 어르신은 “남들은 전쟁 직후가 사는 게 힘들었다고 하지만, 난 건물을 산 다음이 더 힘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첫 건물을 5400만 원 주고 샀는데, 당시 내 손엔 400만 원밖에 없었어요. 아는 사람에게 1000만 원을 빌리고, 은행에서 4000만 원을 빌렸어요. 보통 무리한 게 아니었죠. 당시 건물 공시지가가 3000만 원이 안 됐는데, 제일은행 회장님이 직접 보증을 서서 빌릴 수 있었어요. 종종 내게 과일을 사가는 노신사분이 있었어요. 농담처럼 ‘자네가 결혼 안 했으면 며느리 삼았을 텐데’ 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분이 제일은행 회장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건물을 사겠다며 돈을 빌리려니까 회장님이 직접 나를 차에 태우고 지점장과 함께 건물을 보러 갔어요. 포장도 안 된 곳에 위치한 건물을 보더니 지점장은 ‘왜 저런 걸 사느냐’고 했지만, 회장님은 ‘이 분이 하자는 대로 해라. 은행돈 한 푼도 안 떼어먹을 사람이니 내가 보증을 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 빌린 돈은 금방 갚았나요. 

“금방 갚기는요. 과일 장사해서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15년 걸렸어요. 이자 갚는다고 죽을 둥 살 둥 살았어요. 처음엔 대출 갚는 게 버거워 밤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다시 팔까도 했어요. 그런 모습이 불쌍했는지 건물을 중개해준 부동산 할아버지가 자기가 책임지고 팔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할 정도였어요. 실제 몇 달 후에 ‘사람이 나타났다’며 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팔았냐”고 묻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 줄 거냐고 물으니 평당 85만 원을 준대요. 평당 43만 원에 샀는데 몇 달 만에 두 배 가까이 오른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점심 값을 쥐여주며 ‘1년만 있다가 오세요’ 그랬죠. 그러니까 9개월 만에 다시 와서는 평당 130만 원을 주겠대요. 이번에도 용돈을 쥐여주며 ‘팔 생각이 있으면 내가 연락하겠다’고 했죠. 몇 달 있다 또 왔는데 이번엔 200만 원 주겠대요. 그렇게 오르니 팔겠어요?” 

양 어르신은 얼마 전 처음으로 이 건물 권리증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표지가 누렇게 변하고 글씨가 다 사라져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 건물은 평당 6000만 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다른 데 투자하지 않고 건물에 투자한 이유가 있나요. 

“그때는 투자니 뭐니 하는 말도 몰랐어요. 그저 건물을 조금씩 사두면 나중에 돈이 되겠다는 생각만 했죠. 시간이 지나면 돈 가치는 떨어지지만 부동산 가치는 올라가잖아요. 한옥도 몇 채 샀어요. 이후락이 살던 집도 사서 살다가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후 부부 둘이 살기엔 너무 커서 팔았죠.”

미역 살 돈으로 이자 낸다 생각

부부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었다. 옷과 양말 등은 돈 주고 사는 일 없이 얻어다 입었다. 여행 한 번 간 적 없고, 심지어 외식은 고사하고 첫째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자장면 한 번 사준 적이 없다고 한다. 

-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생길 법한데…. 

“그런 거 없었어요. 평생 이자 갚느라 아등바등 살았으니까요. 이때까지 내 생일도 몰라요. 미역 살 돈으로 이자 낸다고 생각했어요. 옷도 생기면 20~30년씩 입었어요. 깨끗이 빨아 입으면 되는데 뭐 하러 사요. 어느 기자가 우리 집에 왔다가 밥 먹는 거 보고는 깜짝 놀라요. 반찬이 김치, 콩나물무침, 고추장아찌 이렇게 딱 세 가지거든요. ‘이렇게 잡숴요? 저는 그렇게 먹으면 일을 못 해요’ 하더군요(웃음).” 

10년 넘게 집안일을 돕고 있다는 아주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두 분 모두 소식을 하세요. 그리고 쓰고 난 비닐봉지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검소하세요. 텔레비전도 수십 년 된 낡은 걸로 보시다 5년 전쯤 바꾸셨죠.” 

- 자제분들이 어릴 때 투덜거리지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큰애는 오히려 새벽같이 나와 배달도 하는 등 장사를 도와주고 그랬어요.” 

아끼며 살았다고 하지만 자식에 대한 투자까지 아낀 것은 아니다. 

“큰애가 공부를 좀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당시는 과외를 할 때였으니까 큰애 고등학교 수학선생에게 수학 과외를, 영어선생에게 영어 과외를 시켰죠. 두 아이를 미국에 보낸 것도 제가 권유했어요. 둘 다 아비를 닮아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미국으로 보냈죠. 큰애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나와 취직하고, 둘째는 유통업을 하게 하고요.” 

- 과일 장사는 언제까지 하셨어요? 

“50대 중반까지 하다 그만뒀어요. 몸이 아파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산 집들이 낡아서 보수하는 것도 일이었어요. 건물 관리하고, 병원 다니고, 집들 보수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빴어요.”

고려대에 기부한 이유

- 기부하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처음엔 노후대책을 위해 돈을 모았어요. 그러다 ‘자식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고 남는 것은 기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중엔 ‘나 죽으면 전부 기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거죠. 기부하고 나니까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보다 훨씬 기뻐요. 돈 없어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는 게 자식에게 주는 것보다 더 값지잖아요. 우리 부부가 죽더라도 고생하며 살아온 보람이 남게 되니까요.” 

- 사후에 안 하고 생전에 하신 건…. 

“영감이 아픈 데다 말까지 못 하게 되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애 낳고 다음 날 장사를 나가고 해선지 나이가 들며 몸이 많이 아파요. 작년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어요. 뇌경색 진단도 받고…. 정신이 있을 때 해야 할 것 같아서 영감과 의논해 서두른 거죠.” 

거실엔 부부가 두 아들 내외, 손자, 손녀와 함께 찍은 대형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 자제분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안 하셨어요? 

“애들에게 줄 수도 있지만, 내가 이곳에서 힘들게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모은 돈인데 자식들이 잘 지킨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자기들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사 먹으면서 흐지부지 사라지면 슬프잖아요.” 

-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자제분들에게 이야기는 하셨나요? 

“안 했어요. 이젠 언론에 나왔으니까 자기들도 알겠죠.” 

- 서운해하지 않던가요? 

“전화도 없어요(웃음). 서운해도 할 수 없어요. 둘 다 미국에 남부럽지 않은 집으로 한 채씩 사줬고, 차도 사줬고…, 그만큼 먹고살게 해줬으면 부모로서할 일은 했다 싶어요. 돈이라는 게 자기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의미 없어요. 재산 많이 물려준다고 해서 자식들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자식이나 망치지.” 

- 많은 기부처 중에서 고려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주위 사람들이 고려대가 잘돼야 가까이 있는 이곳 청량리도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큰애가 고려대(토목공학과 79학번)를 나오기도 했고요.” 

- 기부금은 어떻게 쓰이기를 원하세요. 

“우리 부부 소망이 저 땅에 빌딩을 세우는 거였어요. 근데 중간에 끼어 있는 땅 하나를 못 사기도 했고 돈도 없어 빌딩 짓는 걸 포기했어요. 학교에서 그걸 해주기로 했어요. 저 땅에 건물을 짓고, ‘김영석, 양영애’ 이름도 새겨준대요. 영감하고 내 이름이 있는 빌딩이 생기는 거죠.”

후회 없는 인생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면서 양 어르신은 피곤했는지 대답을 마칠 때마다 “이제 그만 됐어요. 얼른 가보세요”를 반복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먹을 거 못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보지 못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보석이나 예쁜 옷은 쳐다볼 여유도 없었고, 생각도 안 해봤어요. 얼굴에 뭘 발라본 적도 없어요. 고기는 원래 안 좋아하고…. 후회는 없어요. 오히려 기부해서 기뻐요. 내 이름으로 된 빌딩이 생기니까.” 

- 여행을 평생 한 번 안 가보셨어요? 

“여행은 무슨…. 미국에 있는 애들 보러 간 적은 있지만, 놀러가보기는커녕 6·3빌딩 한번 가본 적 없어요. 장사 때문에, 수금하러 지방에 간 적은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양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다. 

“50년 전엔 이곳 청량리에서 내가 가장 밑바닥 인생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가장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정도면 후회 없는 인생 아닌가요.”

고려대학교 기부금 현황
1994년 이후 기부자 4만9000여 명지난해 연간 기부액 1100억 원 넘어

고려대는 1905년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될 때부터 민족을 살리기 위한 뜻 있는 분들의 십시일반 동참으로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거액의 자산을 쾌척한 독지가들의 기부부터 쌈짓돈과 마지기 논과 밭, 고이 간직해온 패물을 팔아 내놓은 소중한 성금이 이어져왔다. 

2000년대 들어 기부금은 해마다 수백억 원대로 늘어 지난해엔 연간 약정액 1100억 원을 넘어섰다. 기부자 숫자도 전산화가 시작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약 4만9000여 명에 달하고, 1억 원 이상 기부자도 총 570명에 달한다. 

고려대는 2015년 기금기획본부를 만들어 ‘KU PRIDE CLUB’ 등 체계적인 모금과 기부자 예우 등을 하고 있다. 특히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들의 예우 프로그램인 ‘크림슨 아너스 클럽’을 만들어 예우 프로그램과 초청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10억 원 이상 기부자에게는 고려대병원 의료비 전액 면제 등 최선의 예우를 하고 있다. 

고려대는 “기부금은 교육, 장학, 건축, 연구, 일반, 기타 특정목적기금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며 “기부금은 기부자의 기부 목적대로 정확히 집행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기부금 집행 후 결과에 대해 기부자에게 상세하게 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