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송년기획

‘기부 선의’ 꽃피우려면…

불리, 불편, 불신 ‘기부 3不’ 버려라

  • 송화선

    spring@donga.com

    입력2018-12-1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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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기부지수 OECD 하위권

    • 기부자 ‘불리’하게 만드는 법과 제도

    • ‘불편’함 자극하는 ‘빈곤 포르노’

    • 편법 기부, 기부금 유용이 낳은 뿌리 깊은 ‘불신’

    1998년 국내 최초 법정모금기관으로 설립된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11월 12일 열린 기념식에서 한 참석자가 기념 야광봉을 흔들고 있다. [뉴스1]

    1998년 국내 최초 법정모금기관으로 설립된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11월 12일 열린 기념식에서 한 참석자가 기념 야광봉을 흔들고 있다. [뉴스1]

    10월 25일 김영석(91)·양영애(83) 부부는 과일행상을 하며 평생 모은 400억 원대 재산을 고려대학교를 경영하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이사장 김재호)에 기부해 잔잔한 감동을 줬다(282쪽 기사 참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하는 1억 원 이상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수가 1900명을 돌파하는 등 일상에서 기부를 실천하는 사람도 적잖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 규모와 비교하면 기부 문화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게 현실. 영국에 본부를 둔 자선구호재단(CAF) 발표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기부참여지수’는 세계 139개 국가 중 62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비교 범위를 좁히면 35개국 중 21위로 하위권에 속한다. 2013년 전체 순위 45위였던 것과 비교할 때 기부문화가 오히려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우리 국민 기부참여율은 2009년 32.2%, 2011년 36%로 상승하다 2013년 하락세(34.5%)로 바뀌었다. 2017년엔 26.7%까지 떨어졌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역시 국세청 자료를 분석해 2013년 이후 우리나라 연도별 기부금액이 답보 상태에 있음을 밝혔다. 1997년 2조5519억 원이던 연간 기부금액은 이듬해 IMF 외환위기 등의 영향으로 일시 감소(2조3019억)한 후 꾸준히 늘었다. 2000년 4조 원을 돌파했고, 2010년 10조 원도 넘어섰다. 그러나 2013년 12조4858억 원에 도달한 뒤 2016년 12조8684억 원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제자리걸음 중이다. 법인 기부금이 2014년 4조9062억 원에서 2015년 4조7782억 원, 2016년 4조6471억 원 등 지속적으로 감소한 게 영향을 미쳤다.


    기부자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

    2017년 11월 3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아너 소사이어티 창립 10주년 기념 행사. [뉴시스]

    2017년 11월 3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아너 소사이어티 창립 10주년 기념 행사. [뉴시스]

    전문가들은 2013년 기부 혜택 축소가 이런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당시 정부는 고소득자 세금 혜택을 줄인다며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을 소득공제(과세소득에서 일정금액 차감)에서 세액공제(납부 세액에서 차감)로 바꿨다. 공제율은 3000만 원 초과 기부금 25%, 이하 기부금은 15%로 정했다. 이 변화로 고액 기부자의 세금 부담이 커졌다. 연간 종합소득 5억원인 A씨가 3600만 원을 기부할 경우 공제액이 기존 1368만 원에서 600만 원으로 줄어드는 식이었다.



    기부금 관련 단체들은 이 변화 이후 고액기부가 급감했다고 토로한다. 비판이 쏟아지자 정부는 2016년 고액 기준금액을 2000만 원으로 낮추고 공제율은 30%로 올렸다. 내년부터는 1000만 원 이상 기부금부터 공제율 30%를 적용한다. 이에 대해 한 기부금품 모집단체 관계자는 “2013년 당시 정부는 복지예산 확대로 세원이 부족해지자 ‘조세 정의’를 세운다며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을 축소했다. 기부문화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세금 혜택을 이렇게 많이 받으면 사실상 세금으로 기부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정치인도 있었다. 그렇게 기부하고 모욕당하는 환경에서 누가 기부를 자랑스럽게 여기겠나”라고 회고했다.

    기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활성화하지 않는 것은 부유층이 기부를 주저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단체 관계자는 “그렇게 찬물을 확 끼얹었으니, 이후 조금씩 세제 혜택을 늘려도 기부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것”이라며 “고액기부자를 존중하고 사회적으로 혜택을 베풀어야 더 많은 사람이 기부에 나선다”고 강조했다.

    전 재산을 모교에 기부했다가 세금폭탄을 맞을 뻔한 황필상 씨. 황씨 사건을 계기로 ‘선의에는 세금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만들어졌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전 재산을 모교에 기부했다가 세금폭탄을 맞을 뻔한 황필상 씨. 황씨 사건을 계기로 ‘선의에는 세금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만들어졌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고액기부자가 혜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증여세 폭탄’을 맞을 뻔한 일도 있었다. 사실상 전 재산을 모교에 기부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가 국세청으로부터 225억 원 ‘세금 폭탄’을 맞을 뻔한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 사례다. 황씨는 당시 수원교차로 지분 주식 90%(당시 평가액 180억 원)를 아주대에 기부했다. 2015년 국세청은 공익재단에 주식을 기부할 때 발행주식의 5% 미만까지만 증여세 면제 혜택을 주는 세법 조항에 따라, 초과 부분에 증여세 140억원을 부과했다. 황씨가 이에 불복해 법적 다툼을 벌이는 사이 가산세가 붙어 세액이 기부액을 초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까지 간 끝에 2017년 황씨 승리로 끝났다. 상속·증여세를 피하려는 편법 기부가 아닌 순수한 기부에 대해서는 면세(免稅)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후 국회는 공익법인 중 대기업과 특수관계가 아닌 성실공익법인의 증여세 비과세 한도를 20%로 올리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고액 기부해봤자 피곤한 일만 생긴다’는 인식이 사라지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우리나라 기부문화를 바꾸려면 최근 급증하는 TV 모금 광고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굶주린 아동, 난민, 희귀질환자 등 고통받는 사람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부금모집 단체의 TV 광고는 우리나라에 소액 정기 기부 문화를 확산하는 데 일조한 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 모금 광고의 자극성과 선정성이 과도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부 유도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도 적잖다.

    착한 마음 ‘불편’하게 하는 모금 광고

    보는 이의 죄책감을 자극하고자 자극적으로 연출하는 모금 광고에 불편을 호소하는 이가 늘고 있다. [월드프레스포토 공식 인스타그램]

    보는 이의 죄책감을 자극하고자 자극적으로 연출하는 모금 광고에 불편을 호소하는 이가 늘고 있다. [월드프레스포토 공식 인스타그램]

    사생활이나 초상권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전면에 등장시키고 자극적인 연출로 고통을 극대화하는 건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고 한다. 국제적으로 자선 캠페인이 급증한 1980년대 서구에서 생겨난 말이다. 고통의 현장을 생생히 전달한 뒤 “OOO원이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기부를 유도하는 데 분명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유럽 등 기부문화 선진국에서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한다.

    한 어린이 보호단체 정기 후원자인 직장인 김모 씨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고사리손으로 밥을 지어 병든 할머니, 동생을 돌보며 ‘제 꿈은 우리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오래오래 같이 사는 거예요’ 하는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때부터 정기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에 대한 연민이 커질수록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싶더라. 아무리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라도 인권이 있는데, 한창 감수성 예민할 나이에 그렇게 얼굴을 공개하도록 해야 했을까 생각하니 화도 났다”고 털어놓았다.

    희귀질환을 가진 소녀의 얼굴과 일상생활, 병으로 인한 고통 등을 상세하게 전달한 한 국제구호단체 TV 광고와 관련해서는 “시청하기 불편하다”는 민원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여러 건 접수되기도 했다. 이후 방심위는 여타 단체의 후원인 모집 광고도 모니터링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기부금품 모집단체 관계자는 “흑백 화면, 긴장감을 유발하는 배경음악,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 등을 통해 시청자를 집중하게 한 뒤 침착한 내레이션으로 후원을 유도하는 스타일의 광고가 요즘 너무 많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듣는다”며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성숙되면 관련 단체들도 보는 이의 죄책감을 자극해 기부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벗어나 좀 더 즐겁고 자연스럽게 타인을 돕도록 하는 캠페인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선단체 ‘불신’하게 만드는 편법·불법 끝내야

    2017년 12월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사랑의 온도탑’ 앞을 지나고 있다. [뉴스1]

    2017년 12월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사랑의 온도탑’ 앞을 지나고 있다. [뉴스1]

    매월 생활비를 쪼개 국제구호단체 등 3곳에 후원금을 보내온 김모 씨는 지난해 봄, 종교시설을 제외한 2곳 기부를 중단했다. 결손 아동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모금활동을 벌인 뒤 사적으로 유용한 ‘새희망씨앗’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난 뒤였다. 김씨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나누며 살자는 생각에 후원금을 냈는데, 그 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 번씩 터지는 ‘기부 사기’가 우리나라 기부문화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입을 모은다.

    ‘새희망씨앗’ 설립자 윤모 씨는 전국에 텔레마케팅 형태의 지점망을 구축하고 상담사를 동원해 불특정 일반인에게 후원 권유 전화를 걸었다. 지역 내 불우 아동을 1대 1로 후원할 수 있으며 소득공제도 받을 수 있다는 등의 설명에 많은 이가 지갑을 열었다. 2014년부터 약 3년간 이어진 ‘사기 행각’ 피해 규모는 127억여 원. 5만여 명의 피해자가 최소 1만 원부터 최다 1600만 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기꺼이 냈다. 그러나 이 돈 대부분은 인건비와 지점 운영비로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법원은 윤씨에게 사기, 횡령, 기부금품법 위반 등의 죄를 물어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에 대한 충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 지난해 가을에는 딸 치료비조로 거액을 모금한 뒤 생활비 등으로 탕진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부’를 내세운 ‘편법’도 횡행한다. 최근 언론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선친 구본무 회장의 ㈜LG 주식 8.8%를 상속해 7200억 원대 상속세를 내게 된 점을 보도하며 “구 회장이 일부 지분 공익재단 출연 등을 통해 상속세 규모를 줄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으나 ‘정공법’을 택했다”고 전했다. 과거 재벌가에서 ‘공익재단 출연’이 편법상속 수단으로 빈번히 쓰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 세법이 이른바 ‘황필상 사건’ 이전까지 주식을 공익재단에 출연하면 막대한 증여세를 물게 한 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대기업 계열 공익재단이 주식이나 현금 등 출연 재산을 장학·의료 등 공익사업에 쓰는 조건으로 각종 세제 혜택을 받으면서 ‘본업’에 소홀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4월 한국경제연구원은 공정거래법상 공시 대상 기업집단 소속 공익 및 사회공헌재단 126곳의 최근 3년간 수입 및 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체 지출에서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에 쓰인 돈이 25%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2016년 기준 이들 재단의 총 지출액은 6조3875억 원에 달했지만 고유목적사업 분야 지출은 1조6467억 원에 그쳤다. 나머지는 재단 운영이나 건물 임차료 등에 쓰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9년 만든 청계재단의 장학금 지급액도 지난해 2억8020만 원으로 총 자산의 0.56% 수준으로 알려졌다. 대학교육연구소의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 분석 결과를 보면 청계재단은 2010년 6억1915만 원을 시작으로 장학금 지급 규모를 계속 줄여왔다. 이에 따라 장학재단으로서의 본래 취지가 탈각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상당수 공익재단이 ‘딴짓’도 한다. 국세청은 최근 대기업 계열 공익법인 약 200곳에 대해 전수 검증을 실시해 △총수 일가 지배력 확대를 위해 계열사 주식을 5% 초과 보유하거나 △특수관계인을 임직원으로 채용해 고액 급여를 지급한 사례 등을 다수 적발했다고 밝혔다. △창업주 생가 주변 토지를 대거 사들였다 세금을 추징당한 법인도 있다.

    이와 관련해 아동보호 시민단체 관계자는 “기부금품 모집이나 자선활동 관련 비리가 적발되면 곧장 후원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영학 사건’ 이후에도 회복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부, 사회공헌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편법 불법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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