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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북방의 베니스’ 벨기에 브루게

경제적 번영이 불러온 예술의 향연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북방의 베니스’ 벨기에 브루게

  • ●중세시대 부유한 상업도시로 명성 자자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한자동맹 등 유럽 전역 교역로로 활약
    ●15세기, 유럽 전역 유명 화가들 이주
브루게 대표 명소인 마르크트 광장.

브루게 대표 명소인 마르크트 광장.

벨기에 서(西)플랑드르주(州)에 위치한 브루게(Brügge)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곳이다. 하지만 유럽인들 사이에선 인구 11만 명의 이 작은 도시는 ‘살면서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힌다. 한해 브루게를 찾는 관광객 수가 800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세시대 브루게는 부유한 상업도시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는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브루게 복원사업 덕분이다. 이를 계기로 브루게 거주지와 상업지역이 정비됐고, 교회 및 역사적 기념물들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름다운 브루게 운하 ‘라인(Reien)’에서 나는 몇 번이고 탄성을 질렀다. 

‘Reien’은 켈트족의 낱말에서 유래했다. ‘신성한 물(Rogia)’이란 뜻이다. 도시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운하와 수백 개의 아치교 덕분에 브루게는 오래전부터 ‘북방의 베니스’로 불렸다. 실제 이 도시는 운하를 통해 북해와 연결된다. 중세 브루게가 상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항구 제브루게(Zeebrugge, 브루게 바다) 덕분이다. 나는 보트를 타거나 도보로 브루게 구석구석을 누비며 벨기에의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다정한 내 친구 사이먼이 끝까지 동행해주었다.


중세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

브루게 운하. 관광객들은 보트를 타고 도시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다.

브루게 운하. 관광객들은 보트를 타고 도시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다.

과거 브루게 성벽에는 모두 20개의 풍차가 설치돼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풍차가 만들어낸 풍력으로 밀도 빻고, 수공업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받았다. 현재는 4개의 풍차가 돌아가며 고풍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2000년 브루게는 430헥타르(약 130만 평)에 이르는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브루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단연 ‘성모마리아교회’다. 1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말까지 건립됐고, 현재는 교회보다 교회 박물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세적 특징과 수준 높은 예술품들을 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건축 면에서 보면 후기 르네상스와 프랑스 고딕 스타일 등 여러 가지 양식이 섞여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이 122m에 달하는 첨탑. 이는 안트베르펜의 벨기에 최고(最高) 교회 건축물인 노트르담대성당의 첨탑보다 1m 낮다. 



교회 안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상 ‘성모자상(Madonna and Child)’이 있다. 성모자상은 원래 이탈리아 시에나성당에 보존될 예정이었지만 브루게의 부유한 상인 두 명이 1506년 이탈리아에서 구입해 이곳으로 가져왔다. 브루게 상인들의 문화적 열망과 경제적 능력을 동시에 대변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성모자상 외에도 중세기 종교화와 조각상들이 가득 차 있다. 또한 중세시대 플랑드르 지방을 번영으로 이끈 부르고뉴공(公) 샤를대제와 그의 딸인 마리공주의 묘지도 있다. 

브루게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높이 83m의 웅장한 ‘종탑(Brügger Belfry)’이다. 종탑이란 말 그대로 종이 달린 탑이다. 대부분 종탑 하면 교회를 떠올리지만 원래 종탑은 도시에 부속된 건물로, 근본적인 목적은 경보를 울리는 데에 있다. 평상시에는 시민들의 안전을 살피는 소방 감시대이자, 도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 쓰인다. 종탑 안에서 연주자가 주먹으로 건반을 두드리면 50여 개의 거대한 종이 동시에 울리며 화려하고 웅장한 멜로디를 선사한다. 이 역시 브루게의 부와 위력을 뽐내는 상징물 중 하나다. 

시청사 근처에 위치한 성 바실리크 성당(The Basilica of the Holy Blood) 역시 브루게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명소다. 그곳에는 특별한 성물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이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1149) 때 참전한 디트리히(Dietrich) 백작이 예루살렘에서 성혈이 든 병을 가져와 이 성당에 봉헌했다. 따라서 예수 승천일만 되면 많은 시민이 이 성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인다. 요즘도 시민 2000여 명이 행사에 참가하는데, 이날 이들 모두는 중세시대 봉건 영주, 기사 또는 평민으로 변장한다. 이 행사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중세 상업도시 브루게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그로테 마르크트(Grote Markt·마르크트 광장)로 가야 한다. 그로테 마르크트란 ‘큰 시장’이란 뜻이다. 중세에는 각국의 상선들이 운하를 타고 이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의 동쪽에는 거대한 화물창고가 즐비했다. 각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은 바터르 할러(Waterhalle) 곧 수관(水館)이란 건물에서 교역을 했다. 1878년 수관 터에는 플랑드르 지방정부청사가 들어섰다.


유럽 교역 중심지 된 배경

나는 사이먼과 배를 타고 운하를 일주하며 브루게의 역사를 되짚었다. 브루게는 원래 ‘바다’라는 뜻이다. 브루게의 운명은 바닷길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역사는 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128년 7월 27일, 시민들은 영주로부터 ‘도시를 만들어도 좋다’는 특허장을 손에 넣었다. 이들은 곧 성벽과 운하를 건설하며 이곳을 벨기에의 대표 상업기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앞서 1050년경 브루게는 북해와 단절됐다. 해마다 토사가 쌓여 바다로 나아가는 수로가 꽉 막힌 탓이다. 그런데 1134년에 갑자기 행운이 찾아왔다. 강력한 폭풍이 몰아쳐 막혔던 물길이 트인 것이다. 즈윈(Zwin·현재의 자연보호구역)과 브루게를 연결하는 해로가 시원하게 뚫리자 다시금 교역의 장이 열렸다. 

13~15세기 브루게는 원거리 교역의 중심지가 됐다. 영국 상인들은 노르망디의 곡물과 가스코뉴 지방의 와인을 실어 날랐다. 영국산 모직물도 다량으로 입하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질 좋은 옷감과 향신료, 브로케이드가 들어왔다. 브로케이드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을 뜻한다. 그 밖에도 러시아산 모피와 목재, 스페인산 양가죽과 플랑드르에서 만든 블렝(깃발 또는 테두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수술)도 브루게로 들어왔다. 그러자 북쪽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중세 중기 북해·발트해 연안의 독일 여러 도시가 뤼베크를 중심으로 상업적 목적으로 결성한 동맹)에 속한 상선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브루게는 유럽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교차로였다. 무엇보다도 입지 조건이 훌륭했다. 당시 한자동맹 상인들은 남쪽의 이탈리아 상인들과 브루게에서 만나 막대한 수량의 물품을 거래했다. 특히 라인강 주변의 여러 도시와 뤼베크 및 함부르크 등지에서 온 상인이 많았다. 당시 여건상 이들이 지중해까지 내려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브루게는 남쪽과 북쪽 지방의 상인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1253년 플랑드르의 백작 마르가레테 2세(Margarete II)는 한자동맹의 상인들에게 교역상의 특권을 허락했다. 당시 한자상인들이 브루게에 체류하며 이용했던 회관이 지금은 어엿한 호텔로 변모했다. 그 무렵 브루게에는 ‘오스터링에(Osterlinge)’라고 불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는 곧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독일 상인들을 의미했다. 

한자동맹의 중심지였던 뤼베크 출신 상인 힐데브란트 베킨후센(Hildebrand Veckinchusen)도 브루게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는 무려 500여 통의 편지와 10권이 넘는 거래 장부를 후세에 남겼다. 이것은 중세 상인의 삶과 교역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귀한 보물이다.


약속어음·증권거래소 등장

한자동맹에 뒤질세라 이탈리아 상인들도 브루게를 찾기 시작했다. 1277년 이탈리아 대표 상업도시인 제노아의 상선들이 무리를 이뤄 브루게에 왔다. 지중해 무역의 강자인 베네치아도 1314년부터 브루게에 상선을 파견했다. 

1359년에는 영국 상인들이 브루게 교역의 특권을 얻었다. 네덜란드에 독점으로 원단을 수출하던 영국의 ‘모험가 상인회사’는 1407년 브루게에 진출해 이곳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1446년 공작 필립 3세의 허가를 받아 해당 지점을 앤트워프(벨기에)로 옮길 때까지 브루게가 그들의 주 무대였다. 

스페인 카스티야 지역의 양모 상인들을 비롯해 바스크 상인들도 양모와 철물을 들고 브루게를 찾아왔다. 포르투갈의 상선에는 후추가 가득 실려 있었다.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각국은 브루게에 영사관을 설치해 자국 상인들을 보호했다. 또한 유럽 상인들은 얀 반 에이크 광장 근처에 교역사무소를 열어 자신들이 타고 온 상선을 그곳에 정박시켰다. 브루게 역시 외국 상인들을 적극 환영하며 그들에게 치외법권까지 인정해줬다. 

브루게가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면서 도시의 정치적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다. 1369년 브루게는 부르군트 공작령에 편입됐다. 이후 브루군트 공작은 브루게를 수도로 삼아 여기에 머물며 자신의 영지를 관리했다. 

독일 상인들이 거주한 덕분인지 브루게는 맥주 산지로도 유명하다. 나와 사이먼도 6월의 햇살을 받으며 시청 앞 광장에서 맥주를 마셨다. 유난히 향긋하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누구보다 부자가 되길 원했던 브루게 시민들의 노력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과거 브루게는 섬유산업 및 섬유가공업에 힘을 쏟았다. 이미 12세기부터 이곳에서는 양모 거래가 왕성히 일어났고, 모직물 제조 및 옷감 거래 시장도 발달했다. 그 영향으로 브루게의 섬유산업은 날로 발전해나갔고 13세기 초에는 플랑드르와 프랑스의 의류박람회에 브루게산 섬유를 출품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람회가 붕괴됐다. 이에 브루게 사람들은 이탈리아로부터 상업에 대한 신지식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상인들은 위험과 이익을 공유하며 시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고, 1246년 브루게의 상인 반 데르 부르즈(Van der Beurze)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증권거래를 도입했다. 국내외 상인이 많이 모여들어 교역과 환전업이 진행된 덕분이다. 

당시 이곳 상인들은 성씨에 네덜란드어인 ‘뷔르시(beurs)’를 붙였다. ‘돈 지갑’이란 뜻이다. 14세기가 되면서 브루게에는 약속어음과 신용장이 등장했다.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교환이 가능해진 셈이다. 1309년 증권거래소(Bourse)가 정식으로 개설됐고 증시가 열리는 광장 주변에 이탈리아 제노아, 플로렌스, 베니스 상인들이 집단 거주했다. 

브루게의 번영은 다음 세기에도 이어졌다. 수많은 예술가와 은행가들이 유럽 전역에서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게다가 브루게의 섬유산업은 유럽 최고 수준에 도달해 해당 산업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1400년경 브루게의 인구는 최대 2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유럽 대도시도 인구가 5만~6만 명을 넘기 힘들 때였다. 

브루게가 이끌던 플랑드르는 경제적으로 융성했다. 하지만 고난도 뒤따랐다. 영국령이던 플랑드르의 섬유산업을 프랑스가 뺏으려 100년 전쟁(1337~1453)을 일으킨 탓이다. 전쟁의 승자는 프랑스였고, 영국은 유럽대륙에서 사실상 철수했다.


100년 전쟁 이후 브루게 위상 추락

그런데 15세기 말, 브루게의 운명을 뒤바꾼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자연환경의 변화였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운하에 토사가 쌓여 북해로 통하는 항로가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브루게에 활황을 선사한 즈윈(Zwin) 운하, 곧 ‘황금의 입구(Golden Inlet)’가 막혀버렸다. 이로써 브루게의 황금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후 앤트워프가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교역도시로 바뀌면서 브루게의 위상은 점점 더 추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1524년에서 1713년까지 스페인이 지배했고, 이어서 합스부르크 왕가(1713~1795), 프랑스(1795~1815), 네덜란드(1815~1830) 등이 차례로 브루게를 통치했다. 그 사이 인구는 대폭 줄어들어 1900년대에 들어서는 5만여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전성기와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브루게 시민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17세기에는 레이스 산업을 부활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도시는 중세 때부터 장식이 화려한 명품 레이스의 산지로 유명했다. 지금도 수작업으로 전통 문양을 새긴 레이스를 직조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러나 옛 영광은 쉽게 되살아나지 않았다. 유럽이 산업혁명의 열기에 휩싸인 19세기에도 브루게 경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오랜 경기 침체 덕분에 브루게가 중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부터 브루게는 중세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려는 많은 유럽인으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특히 벨기에 작가 제오지 로덴바시(Georges Rodenbach)의 소설 ‘죽음의 도시 브루게(Bruges la Morte)’가 히트하면서 브루게에 대한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했다. 때마침 1907년 자연환경도 이 도시에 큰 선물을 안겨줬다. 북해와 브루게가 다시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자 브루게 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 찬란한 미술의 고향

한스멤링, 빌럼 모레일의 세 폭 제단화, 1484년, 목판에 유채. [그뢰닝 미술관 소장]

한스멤링, 빌럼 모레일의 세 폭 제단화, 1484년, 목판에 유채. [그뢰닝 미술관 소장]

벨기에에 왔다면 그뢰닝게 미술관을 꼭 가봐야 한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얀 반 에이크, 한스 멤링 등 15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그림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브루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15세기 무렵 브루게는 유럽 각국의 유명 화가들을 자국으로 이주시켰다. 

그뢰닝게 미술관은 시립이다. 중세의 에카우트 수도원 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작품 ‘마르가레타 반 아이크의 초상’(1439)과 ‘그리스도의 초상’(1440) 등이 대표적이다. 극 세밀 묘사가 돋보이는 네덜란드풍의 작품들이 순식간에 관람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플랑드르 미술은 브루게의 위상과 잘 어울린다. 이곳 상인들의 아낌없는 후원이 플랑드르에 독특한 문화적 색채를 부여했다. 이는 17세기 스페인과 암스테르담(네덜란드)에도 계승돼 서양 미술사의 번영을 불러왔다. 특히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는 플랑드르의 전통과 이탈리아 예술을 융합해 색채미의 신기원을 마련했다. 경제와 예술의 조화로운 발전이 참으로 위대하다. 

13세기부터 약 200년 동안 브루게는 유럽 각지의 물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번영을 구가한 중세 최고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아 2019년 6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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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베니스’ 벨기에 브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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