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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人 먹여 살린 원도심, IT 싹을 키우다

[현장 취재] 혁신창업거점 ‘W360’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제주人 먹여 살린 원도심, IT 싹을 키우다

  • ● 1990년대 이후 건입동 등 원도심 쇠락
    ● 공동화 현상 타개 위해 창업 생태계 조성
    ● 사진 촬영만으로 감귤 병해충 진단하는 AI(인공지능)
    ● 빅데이터, 블록체인 기반 7개 기업 입주
    ● 입주 기업인 “제주는 최적의 테스트베드”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제주인의 삶에는 바다 냄새가 짙게 스며 있다. ‘섬’ 제주의 하루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멀리 출항했던 배는 바다가 내준 선물을 한가득 싣고 돌아왔다. 인근 수산물 공판장은 흥정과 흥정이 뒤섞여 매일같이 부산했다. 한 푼 한 푼에 한 가정의 삼시세끼 메뉴가 판가름 났다. 밥벌이의 애환이 수십 년 세월동안 제주항에 켜켜이 쌓였다. 

제주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다. 건입동의 복판에는 제주시민의 젖줄로 불리는 산지천이 자리 잡았다.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산지천에서 빨래를 하고 목욕을 했다. 산지천은 제주항을 거쳐 바다로 흘러 나간다. 건입동의 또 다른 한편에는 사라봉이 우뚝 솟았다. 사라봉은 뒤로 한라산에 기댄 채 앞으로 제주항을 품었다. 사람들은 살기 좋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 근처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제주항 언저리로 원도심이 잉태했다. 건입동과 일도1·2동, 삼도1·2동, 이도1·2동이 원도심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옛 제주도청과 교육청, 기상청, 각급 학교, 상업 및 금융 관련 시설이 모두 원도심 인근에 똬리를 틀었다.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제주에는 칠성로가 있었다. 스타일 좋은 제주의 청춘들은 칠성로 거리를 활보했다. 인근 중앙로에는 카페와 음식점, 술집 등이 자리를 잡고 청춘을 유혹했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원도심 바깥에서 도시개발 사업이 활발해지자 신도심이 웅비했다. 1990년대 이후 제주시는 구제주(원도심)와 신제주(신도심) 2개의 도심부로 나뉘었다. 원도심을 두고 ‘공동화’나 ‘쇠락’ 따위의 단어들이 껌처럼 달라붙기 시작했다. 상권이 죽자 활기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옛 제주지방기상청 청사의 탈바꿈

W360 2층에 있는 공용 공간. [홍중식 기자]

W360 2층에 있는 공용 공간. [홍중식 기자]

제주도는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2017년 9월 7일 원희룡 제주지사는 건입동에서 열린 도시재생·전략포럼 토론회에 참석해 “새로운 콘텐츠와 가치 창출이 가능한 공간적 토대를 만드는 방향으로 도시 재생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민들은 새로운 가치 창출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제주 경제는 관광업과 농수축산업에 크게 의존해 왔다. 이따금 건설업이 제주 경제를 떠받쳤지만 경기변동에 취약했다. 청년은 틈만 나면 섬을 빠져나갔다. 과연 제주에서, 그것도 1차 산업 의존도가 유독 높은 원도심에서 신산업이 웅비할 수 있을까. 도민들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원도심 재생 전략을 지켜봤다. 


W360은 옛 제주지방기상청 청사를 리모델링해 완성됐다.

W360은 옛 제주지방기상청 청사를 리모델링해 완성됐다.

그로부터 딱 2년이 지난 2019년 9월 23일. 제주도는 건입동에 ‘혁신창업거점 W360’을 조성했다. 도는 지상 2층·연면적 959㎡ 규모 옛 제주지방기상청 청사에 9억1200만 원을 투입,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했다. 2015년 신청사 신축 후 유휴 공간으로 남아 있던 건물을 창업 생태계의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W360에는 입주 기업들이 고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입주실, 콘텐츠 창작자를 위한 영상 스튜디오, 단기 프로젝트를 운영할 창업자를 위한 프로젝트룸 등이 조성됐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운영과 지원을 맡았다. 

원 지사는 11월 13일 W360 준공 기념식에 참석해 “제주는 원도심 공동화 현상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해왔고 활력 제고를 위해서는 혁신기업들의 성장 기반 조성이 가장 필요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W360 1층에 있는 다목적 대회의실. [홍중식 기자]

W360 1층에 있는 다목적 대회의실. [홍중식 기자]

특히 도는 W360의 입주 기업 대상을 ‘블록체인 및 빅데이터 분야’로 정했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애당초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모집 공고에 내건 입주 기업은 5개였다. 하지만 기대보다 수준 높은 기업이 몰렸다. 이에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는 총 22개 기업 가운데 7개사를 최종 입주기업으로 선정했다.
 
고민효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매니저는 “아무래도 IT(정보기술) 기업 본사는 지방에 소재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유망 기업을 유치하고자 따로 제주 소재 기업 등 지역 제한은 두지 않았다. 대신 본점이나 주된 사무소 주소지를 제주로 이전하는 것이 입주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입주 기간은 2020년 10월까지 총 12개월이다. 입주기업에는 24시간 이용이 가능한 상주 업무 공간, 공용 공간이 제공된다. 주소지 등기이전 비용 지원과 함께 센터 시드머니 투자사업에 지원도 가능하다.

인공지능으로 감귤 병해충 진단하다

박기언
에이브레인 대표. [홍중식 기자]

박기언 에이브레인 대표. [홍중식 기자]

W360에 입주한 7개 기업의 면면은 흥미롭다. 블록체인과 IoT(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한 시설 운영 시스템 크립토 스페이스를 서비스하는 크립토제주(CRYPTOJEJU), 행동 보상 마케팅 서비스 줍줍(JUBJUB)을 운영 중인 위블락아시아(WEBLOCASIA),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 구축 및 솔루션 제공 서비스를 소개한 코퍼레이트엘(COPERATEL), 머신러닝 기술을 적용한 감귤 병해충 방제 시스템을 선보인 에이브레인, 중화권 자유여행객 대상 한국 여행 정보 제공 서비스 한국원워를 발표한 라이크어로컬, 관광 약자를 위한 여행 일정 관리 서비스를 제공 중인 휴플, 데이터 기반의 AI(인공지능) 자동차 탁송 중개 서비스 운영사 아바라(AVARA) 등이다. 

이 중 에이브레인은 제주 특산물인 감귤에 주목했다. 에이브레인은 머신러닝 기술을 통해 사진 촬영만으로 감귤 병해충을 진단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머신러닝은 AI의 한 분야로, 인간의 학습 능력과 같은 기능을 컴퓨터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기술이다. 사용자가 에이브레인을 설치한 스마트폰으로 감귤 사진을 촬영하면 간편하게 감귤 병해충 여부를 검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 뒤 특정 병해충이 의심되면 농업기술원에 문의해 정밀진단을 신청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총아인 AI와 제주 1차 산업의 중심축인 감귤을 결합한 셈이다. 2월 20일 W360에서 만난 박기언 에이브레인 대표의 말이다. 

“감귤도 병이 든다. 사람이야 아프면 말을 하지만, 식물은 그럴 수 없지 않나. 제주에서는 3만3000여 가구가 감귤 농사를 짓는다. 그중 오랫동안 감귤 농사를 지어온 분들은 전문가들이다. 그분들은 우리 기술의 필요성을 덜 느낀다. 하지만 새로 귀농한 분들의 사정은 다르다. 그런 분들께 어떤 도움을 드릴까 고민하다 이런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감귤에 적용이 가능하면 이후 한라봉, 황금향에도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

‘IT 제주’의 싹

혁신경제 전문가인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디어를 사업화 단계로 키워가는 과정을 ‘스케일업(scale up)’이라 칭했다. 혁신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에서 축적된 고도의 경험지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정의하는 ‘개념설계(Concept Design)’ 역량을 갖출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제주는 시행착오의 무대로 어느 지역보다 적합한 곳이다. 박기언 대표는 “제주는 사업모델을 점검하는 테스트베드(Testbed)를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말했다. ‘IT 제주’의 싹이 제주인을 먹여 살린 원도심에서 커가고 있다.



신동아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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