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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탈북 청년은 왜 부끄러운가

  • 조의성 북한이탈주민·연세대 4학년

탈북 청년은 왜 부끄러운가

“엄마가 부끄러워요!” 

담임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엄마에게 초등학생 딸아이가 외쳤다. 사투리가 남아 있는 엄마가 부끄러운 아이는 자신과 엄마, 두 영혼에 영원한 상처로 남을 말을 뱉어버렸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뭉크의 그림을 떠올렸다. 엄마가 부끄러워요, 이것은 아이의 작은 가슴에서 응어리로 돌고 돌다가 마침내 터져 나온 절규다. 탈북대학생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긴다(2018년 5월, 연세대 ‘통일이와 친구들’ 탈북대학생 인권실태조사). 일터에서 오히려 중국동포라고 소개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아주머니도 있다. 여자 친구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알리기 저어하는 친구도 있었다. 탈북민이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도 15년이 흘렀다. 한국이 고향인 탈북 2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만큼 시간이 지났으나 탈북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됐다.

“전혀 탈북자 같지 않으시네요!”

탈북자는 왜 부끄러운 존재가 됐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독재와 기아, 핵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암울한 이미지라든지, 탈북 과정에서 겪은 불행,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이런저런 실수로 인해 대중에게 각인된 탈북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탈북자는 덜떨어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다. 사람들은 이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탈북자를 보면 당황한다. “전혀 탈북자 같지 않으시네요!” 나는 아직도 이 말이 칭찬인지, 야유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사회의 ‘상식’이 그려놓은 탈북민의 초상에는 이 사회의 온갖 기대와 욕망의 물감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다. 그 초상화 속에는 가난한 동족에 대한 측은지심과 ‘먼저 온 통일’ ‘통일의 징검다리’ 같은 공허한 수식어들, 그리고 간첩과 ‘빨갱이’에 대한 경계심까지 모두 중첩돼 있고, 그 왼편 아래에 주홍글씨로 큼직한 사인까지 박혀 있다. 



사회적 인식의 탑 위에 높이 걸린 이 그림은 사회를 향해 ‘탈북민은 이래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뿜어낸다. 이 ‘상식적’인 그림을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북한이 고향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모두 똑같은 특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 추론인가. 같은 라인에서 생산된 스마트폰의 성능이 같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탈북자는 스마트폰이 아니다. 

가장 슬픈 것은 탈북민 스스로가 이 일그러진 이미지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려고 애쓴다. 엄마가 부끄러워요! 이 절규는 어쩌면 그 그림의 주홍글씨를 마주보고 싶지 않은 어린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탈북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상처받은 영혼까지도 치유해 줘야 할 책임을 가진 세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탈북민이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 데는 더욱 근원적인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책임을 다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스토리가 없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배급]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배급]

이 사회에는 탈북민의 스토리가 없다. 혹자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탈북민 관련 뉴스가 날마다 생산되고, 간고(艱苦)한 탈북기가 세계어로 번역되며, TV의 장수 프로그램들이 탈북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세상에는 탈북민에 관한 오직 두 종류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하나는 북한 당국에서 말하는 반역자 혹은 배신자의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널리 수용되는 ‘지옥 탈출기’다. 두 경우 다 탈북민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니며 그 속에는 탈북민의 진짜 모습이 없다. 

북한 정권은 탈북민을 부모형제와 고향을 등진 비인간적 ‘민족반역자’ ‘사회주의 배신자’로 묘사한다. 다른 요란한 수사를 제외하더라도 부모형제, 고향과 같은 단어는 탈북민에게 죄책감을 전가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북한 당국의 전략은 한국의 일부 계층에도 먹히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는 데 목숨을 걸겠는가. 탈북민 모두는 조난자들이다. 그 조난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탈북민의 스토리는 북한 당국이 퍼뜨리는 ‘패륜아의 탈출기’가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파도에 던져진 민초들의 승리한 자기 투쟁기, 생존기다. 이 이야기가 과연 부끄러운 이야기인가.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북한 당국이 놓은 세뇌의 올가미를 못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좀 더 심각한 다른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미디어는 탈북민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신문과 뉴스, 예능 프로그램,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가. 뉴스의 댓글은 또 어떤가. 거기에는 암살자, 살인자, 공작원, 간첩, 인신매매의 희생자, 기초수급자, 불법 시위와 삐라 투척도 불사하는 무법자가 있다. 그리고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온 탈출기의 주인공들과 자유대한민국에 감사하는 탈북미녀들도 비친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의 기대, 실망, 분노는 출연자들이 거대한 미디어가 연출한 드라마의 역할극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제어장치다. 

결과는 어떤가. 미디어를 통해 분절된 이미지를 접하는 탈북민들은 미디어가 그리는 이미지를 체화하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우리의 스토리를 갖지 못한 채, 미디어에서 단순한 호기심이나 농담거리로 소비된다.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에 먹물을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스토리를 만들고 전하는 것을 통해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바꿔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 스토리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슬픔,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즐거움이 담겨 있는 우리의 진짜 초상을 보여줘야 한다. 단지 우리의 좋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나쁜 것까지도, 우리의 자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끄러움까지도, 그리고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희망까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70년 전, 탈북 1세들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 자신의 스토리를 전했던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자.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그러려면 우리 모두는 스토리텔러가 돼야 한다.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그것이 설사 투박해도 괜찮다. 다만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면 충분하다. 우선 그 이야기의 첫 청취자는 자기 자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어야 할 것이다.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설을 쓰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자, 곡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곡을 쓰자,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비록 민둥산이었지만 우리의 추억이 깃든 고향 뒷산에 대해 얘기하자,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물소리 정겨웠던 고향의 작은 시냇가 얘기도 하자, 삶의 험로를 꿋꿋이 걸어온 우리의 희로애락을 들려주자.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끄러운 스토리’가 아니라, 부모가 들려준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 “엄마가 자랑스러워요!”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게 될 날을 우리가 만들어보자. 그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의 부모들이 들려준 투박하지만 삶의 가혹함과 처절함, 때로는 감동이 있는 스토리에 이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신동아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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