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6억 지참금 포기하며 사랑 선택한 日 공주
日 국민 98%는 마코 공주 “결혼 반대”
’흙수저‘ 남편 집안 문제 불거지며 여론 악화
신분 상승 위해 공주를 넘본다는 시선
공동체 규범 어긴 사람 응징하려는 ‘이지메’
억눌린 통제 본능 공주 통해 해소하려는 심리
자신의 삶 선택한 용기는 박수 받을 만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인 마코(오른쪽) 공주와 남편 고무로 게이가 2021년 10월 26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결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마코 공주는 일왕 나루히토(徳仁)의 친조카다. 아버지 후미히토(文仁)가 일왕의 남동생이니, 마코 공주 결혼은 일본 왕실의 제법 큰 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결혼을 환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2021년 3월 ‘주간아사히’가 일본 국민 1만3057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97.6%(1만2749명)가 마코 공주 결혼에 대해 “좋지 않다”고 답했다. 현대사회에 이 정도로 민의(民意)가 모이는 일은 별로 없다. 일본인들은 왜, 어떤 이유로 마코 공주 결혼에 반대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 일본 국민은 마코 공주의 남편, 고무로 게이(小室圭)의 개인적 문제를 거론한다. 실제로 고무로 집안 내력은 다소 괴이하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가 분신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뒤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고 한다.
‘흙수저’가 신분 상승 위해 공주를 넘본다는 시선
남편과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마코 공주가 소소한 차림으로 쇼핑을 하고 있다. [데일리메일 캡처]
고무로 당사자 문제도 제기된다. 마코 공주와 고무로는 국제기독교대(ICU) 재학 당시 만났다. ICU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 다니는 소위 ‘금수저’ 대학으로 통한다. 일본인의 인식에 이 학교는 고무로 가족 같은 ‘흙수저’는 쳐다볼 수도 없는 하늘 위 세상이다. 이 학교에 입학한 고무로의 목적은 오로지 ‘신분 상승’이었던 듯하다. 마코 공주와 사귀기 전 집안과 배경이 좋은 다른 여학생들에게 접근했다는 동기들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부정적인 보도가 계속되자 왕실은 한 차례 결혼을 연기했다. 반면 마코 공주는 파혼을 요구하는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을 고집했다. 결국 고무로는 비난을 피해 2018년 8월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2021년 10월 26일 일본 왕실은 두 사람이 혼인했다고 발표했다. 마코 공주는 미국으로 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공주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고무로의 유학 비용 조달과 취업 과정 등에 의혹이 제기됐고, 왕실 지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비난의 화살은 마코 공주의 부모에게로 향하는 양상이다. 마코 공주는 예식을 생략하고, 왕실 여성에게 배정된 최다 1억5250만 엔(약 16억 원)에 이르는 지참금도 포기했다. 마코 공주가 대중의 질타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판정을 받았다는 보도까지 나왔지만 일본인들 분노는 식을 줄 모른다.
우리나라에 왕실이 있고, 마코 공주 같은 사례가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인들 같은 반응을 보일까.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일단 한국인이 어떤 사안에 90% 이상 동의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인은 친일 청산이나 남북통일 같은 문제에도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곤 한다. 어떤 사안에든 찬반양론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것이 좀 더 한국적인 모습이다.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으면 고무로 가족과 고무로 본인의 의혹에 대해서는 부정적 여론이 우세했을 것이다.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이 문제 많은 사람을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결혼은 공주 본인이 결정할 일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공주는 이미 자기 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다. 왕실 구성원이라고 해서 본인 행복을 추구할 권리까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상당수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마코 공주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을 선택한 마코 공주와 공주 편을 드는 왕실에도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불만의 토로 수준을 넘어 이 문제에 집착에 가까운 집요함을 보인다. 이른바 황색언론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일본인이 이에 동참하는 모습이다.
일본 국민들이 마코 공주의 결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공동체 규범 어긴 사람을 응징하려는 심리
필자가 보기에 이 현상의 본질은 ‘이지메(いじめ)’로 읽힌다. 일왕 조카이자 공주에게 어떻게 이지메가 가능할까 싶지만 이지메가 꼭 약자에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지메를 주로 학교폭력과 관계된 맥락에서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공동체 규범을 어긴 이를 응징한다’는 의미의 이지메가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지금 일본인들은 마코 공주가 ‘공동체의 규범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일본 사회학자 나이토 아사오의 ‘이지메의 구조’에 따르면, 이지메의 기능은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전능(全能)감을 느끼는 것이다.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need for control)’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 중 하나다. 삶에 대한 통제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제 뜻대로 삶을 살 수 있느냐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자존감과 행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아주 어린아이도 제 몸을 가눌 정도만 되면 통제하는 느낌, 통제감을 확보하려 한다.
정신역동이론가 에릭 에릭슨은 아이가 2~3세 정도 되는 시기를 ‘자율성 대(對) 수치심 단계’라 명명했다. 그에 따르면, 아이의 성격은 이 시기에 통제감을 충분히 경험해 자율성을 획득하는지, 또는 자신의 행동이 외부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수치심을 경험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시기 아이들의 통제감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강조한 배변 훈련을 통해 주로 충족된다. 배변 과정을 통제하는 부모의 양육 태도에 따라 아이가 경험하는 통제감 수준에 차이가 발생한다. 부모의 개입은 자율과 통제라는 두 축으로 이뤄지는데, 아이의 욕구를 우선하는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할 것이다. 반면 통제를 우선하는 부모는 규범과 원칙을 강조하며 아이의 욕구를 등한시할 것이다. 이때 적절한 통제감을 경험한 아이는 스스로의 행위를 잘 조절해 나간다.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통제감을 갖는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통제감을 충족할 다른 수단에 집착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 문화는 아이들에 대한 엄격한 훈육을 강조한다. 특히 ‘자율성 대 수치심’ 단계의 배변 훈련 시기에 대단히 엄격한 훈련이 이뤄진다. 일부 학자들은 그 배경에 일본의 전통적 가옥 구조(다다미)가 있다고 분석한다. 다다미방에서 용변이 스며들면 습기가 차 쉽게 부패하고 벌레가 생긴다. 이 때문에 배변훈련을 더욱 철저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이 시기가 지난 뒤에도 아이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런 아이를 보면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한국처럼 관대한 양육 방식을 가진 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아이들이 통제감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게 할 소지가 있다.
‘삶에 대한 통제감’ 경험하기 어려운 문화
또 일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메이와쿠(迷惑)’나 응당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을 뜻하는 ‘기리(義理)’ 같은 사회적 규범이 일상에 폭넓게 작용하고 있다. 일본인은 ‘모든 것에는 정해진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무언가가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면 커다란 혼란과 불쾌감을 경험하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인들의 삶은 보육원, 유치원부터 모든 것이 규격화돼 있다. 모두 동일한 종류의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고 손수건, 기저귀에 이름 쓰는 곳이 정해져 있을 정도다. 명문화된 규칙 외에 지역사회, 학교, 직장마다 암묵적인 규칙도 많다. 한마디로 개인이 자기 삶에 대한 통제감을 경험하기 어려운 문화다.앞서 설명했듯 통제감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구 가운데 하나다. 기본적 욕구 결핍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지 않거나 졸린데 잠을 자지 않으면 그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동안, 사람은 온통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해당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일지라도 말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마코 공주의 남편 고무로 게이. 부부는 대학에서 만나 혼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이지메에서는 이런 심리 메커니즘에 따라 규칙을 위반한 이를 응징하는 게 정당화된다. 그들을 처벌하고 응징함으로써 자신의 통제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집단에 순응하면서 통제감과 더불어 안정감을 느낀다. 이지메가 집단으로 확장하는 이유다.
이지메에 찬성하지 않는 구성원도 이지메에 동참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데, 이들은 억지로 동참할지언정 겉으로는 즐거운 듯 보여야 한다. 집단에 기쁘게 동조하지 않는 것은 곧 그들이 피해자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자신도 이지메 대상이 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지메에 가담하게 된다. 마코 공주 결혼에 반대하는 여론이 90%가 넘는 상황에는 이러한 심리 기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왕실 통해 안정감과 통제감 욕구 충족
필자 생각에 최근의 ‘마코 공주 현상’을 부추긴 요인은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일본에서 왕실이 가진 의미다. 2700년 동안 이어진 일본 왕실은 일본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왕실은 단순히 왕을 배출하는 하나의 가문이 아니라 2700년 동안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온 일본적 가치의 상징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는 왕실을 보면서 안정감과 통제감의 욕구를 충족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왕실은 더욱 완벽해야 한다. 이 완벽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 마코 공주의 결혼이다. 일본인들로서는 마코 공주에게 분노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또 하나는 일본인의 여성에 대한 태도다. 일본은 전통적 성역할 구분이 대단히 강한 사회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드(Geert Hofstede)가 1983년에 전 세계 50여 개 국가의 IBM 직원 11만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일본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구분이 가장 뚜렷한 나라라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은 41위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남녀 역할을 음양(陰陽)의 이치로 이해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말처럼 서로의 위치에 맞는 역할을 강조해 왔다. 반면 전통적인 일본 사회에서 여성은 약자로 분류된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일본에서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며 약자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약자는 강자의 지배에 복종해야 한다. 약자가 강자의 지위에 도전하거나 강자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약자가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왕실에서 결혼하는 사람이 마코 공주가 아니라 아무개 왕자였어도 이렇게 국민적인 이지메가 가해졌을까. 모르긴 해도 일왕 직계 자손도 아니고, 남자가 이런저런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흐지부지됐을 가능성이 크다. 결혼 당사자도 아닌 고무로의 어머니나 마코 공주의 어머니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 또한 그들이 여성이라는 점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마코 공주의 행동은 전통적인 일본 왕실 여성의 행위 양식과 거리가 있다. 그 때문에 더 비난받는 측면도 있지만 왕실의 무게와 여론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 그녀의 용기는 박수 받을 만하다. 참, ‘미움 받을 용기’가 일본 베스트셀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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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 1975년생
● 고려대 심리학과 박사
● 고려대 세종캠퍼스 교양교육원 교수
● 前 우송대 교수,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연구원
● 저서 : ‘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 ‘국가정체성과 한중일 관계’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