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생명과학II’ 오류, 2014학년도 ‘세계지리’ 판박이
당시 오류 인정 판결까지 1년…수험생만 피해
제자들 도움 요청 뿌리칠 수 없어 시작한 소송전
‘돈 벌려고 저런다’ 따가운 시선 가장 힘들어
수능도 사람이 하는 일…빨리 정정하는 게 최선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문제 출제 오류를 행정소송을 통해 바로잡는 데 앞장선 박대훈 전 EBS 강사.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12월 15일 법원이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II 20번’ 문제 출제 오류를 인정한 데 대한 박대훈(51) 전 EBS 강사의 촌평이다.
박씨는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과목에서 출제 오류가 발생했을 때 논란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당시 세계지리 8번 문항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유럽연합(EU)에 대한 보기를 제시하고, ‘옳은’ 설명을 고르라는 내용이었다.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EU는 NAFTA보다 총생산액 규모가 크다’라는 지문을 옳다고 봤다. 하지만 세계은행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점으로 NAFTA가 EU의 총생산액을 추월한 상태였다. 정답 발표 뒤 수험생들이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항의하자 평가원은 “상위권 수험생은 대부분 정답을 맞혔다”며 이들의 항의를 묵살했다. 평가원은 당시 “분석 결과 세계지리를 응시한 수험생의 50% 가량이 정답을 선택했고, 특히 1등급 수험생은 거의 전부, 2등급 수험생은 91%, 3등급은 80.4% 등 상위권 수험생은 대부분 정답을 골랐다”는 ‘의아한’ 이유를 댔다.
결국 당시 국내 유명 인터넷 강의업체 ‘간판 강사’로 EBS에도 출강한 박씨가 직접 소송에 나섰다. “수능생을 대상으로 세계지리를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틀린 내용을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출제 오류가 인정된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당시 수험생들의 문제제기에 평가원은 “상위권 학생들은 정답을 맞혔다”고 반박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제자들 요청 뿌리칠 수 없어 시작한 소송戰
“처음엔 수능 문제가 잘못 출제된 걸 몰랐어요. 수능 직후는 사교육 강사에겐 휴식기라 쉬고 있었죠. 그런데 한 학생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더군요.”박씨는 학생들과 더불어 평가원에 “문제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 잡으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피해 학생들과 함께 행정소송을 내며 적극 대응했다.
“제게 도움을 청한 제자 중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터넷 강의 수강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덕에 분에 넘치는 부(富)를 누렸다고 생각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이렇게 시작한 싸움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2013년 말 1심 선고에서 패소한 것. 학생들과 항소한 그는 결국 2014년 10월, 2013학년도 수능이 끝나고 거의 1년이 흐른 뒤에야 “문제가 잘못됐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평가원은 뒤늦게 잘못을 인정했고, 국회는 ‘2014학년도 수능 출제 오류로 인한 피해자의 대학입학 지원에 관한 특별법’(수능구제법)을 제정했다. 평가원은 수능성적을 재산정해 추가합격 등 조치를 취했고, 일부 학생은 수백만 원 수준의 위자료를 받았다. 박씨는 “그런다고 이미 흘러간 학생들의 1년이 보상되겠느냐”며 “평가원이 제때 오류를 인정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피해가 고스란히 아이들 몫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일을 겪은 평가원이 이번에 또 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출제 오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던데,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저럴 수 있을까’ 싶더군요.”
수능 출제 오류를 둘러싼 소송은 그에게도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소송을 치르는 동안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주변 동료들이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전면에 나서주는 사람은 없었다. 박씨는 “해당 문제가 틀렸다는 내용의 강의를 온라인에 올리자 당시 평가원 관계자가 일하던 학원으로 전화를 해 부담이 컸다”고 했다. 사교육 업계에서 ‘감히’ 평가원에 맞서기 힘들었을 거라는 설명이다. 지리교사와 대학교수들이 참여하는 각종 모임에도 도움을 청했지만 법원에 의견서를 낸 곳은 ‘전국지리교사모임’이 유일했다.
“평가원은 학생 위해 오류 인정해야”
박씨는 소송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주위의 눈총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돈 벌려고 저런다’ ‘왜 굳이 분란을 일으키느냐’ ‘안 그래도 세계지리는 비인기 과목인데 이러다 수강생만 더 떨어지는 거 아니냐’하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는 “지리 전공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아니나 다를까. 박씨의 ‘커리어’는 해당 소송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수능에서 사회탐구 선택과목 수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그는 송사를 치르는 사이 수능 강의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탓이 더 컸다. 그는 2019년부터는 수능 강의를 그만두고 임용고시 강사가 됐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수능 강의를 듣던 제자들에게서 연락을 받는다는 박씨는 “당시 일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소감에서도 수험생 걱정을 했다.
“수능 출제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앞으로 또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능 문제 오류가 발견하면 학생들이 소송 같은 어려운 결정을 하도록 할 게 아니라 평가원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정정하는 게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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