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상속포기·한정승인 친권 가진 친부모만 가능
부모 일방 사망 후 남은 부모 연락 두절 빚더미 떠안아
파산 면책돼도 5년간 신용카드 등 금융거래 제한
복잡한 상속 절차… 한정승인 필요한 기본 서류만 ‘15개’
“찾아가는 빚 상속 안내 서비스로 불상사 막아야”
법률 지식 부족으로 미성년자가 부모 사망 후 빚을 떠안는 일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부모 사망 후 다른 부모 연락 안 닿으면 빚더미 내몰려
박양을 빚더미에서 구제할 남은 방법은 이제 파산면책 신청뿐이다. 하지만 개인파산이 받아들여져 면책까지 된다 해도 향후 5년 동안은 일부 금융거래가 제한된다. 대출 신청은커녕 신용카드 발급, 휴대전화 개통마저 어려워지는 등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고등학생처럼 몇 년 후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미성년자에게 이 제약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될 수 있다.박양의 어머니에게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법률 상담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준 정수임 대한한빛지역아동센터장은 “박양의 사례를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박양의 어머니가 아버지 기일에 그간의 상황을 박양에게 전하면서 ‘네 이름으로 파산면책을 신청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제야 자기 처지를 알게 된 박양이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느냐’며 망연자실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박양의 물음에 우리 사회가 해답을 내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부모 사망 이후 미성년자가 빚을 떠안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1년 3월까지 부모에게 물려받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 개인파산을 신청한 미성년자가 80명에 달한다. 미성년자 파산 신청 건이 한 달에 1명꼴로 발생한 셈이다. 사안의 특성을 고려하면, 파산으로 처리되지 않은 미성년의 빚 상속 문제는 한층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행 민법 제5편(상속) 4절(상속의 승인 및 포기)은 상속 제도를 세 가지로 명시하고 있다. △재산과 빚을 나누지 않고 상속하는 단순승인 △재산과 빚을 모두 포기하는 상속포기 △상속 재산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감당하는 한정승인이 그것이다. 상속할 재산보다 부모 또는 배우자의 빚이 더 많거나 비슷할 경우,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제도를 통해 빚을 면할 수 있다.
문제는 미성년자가 상속인이 되는 경우다. 미성년자는 법률상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 절차를 혼자서 밟을 수 없다. 오직 법정대리인, 통상적으로 친권을 가진 친부·친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혼이나 별거 등의 이유로 한 부모와 살다 그 부모가 사망했을 때 친권을 가진 다른 부모와 연락이 닿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복잡한 상속 절차… 한정승인 필요한 기본 서류만 ‘15개’
민법 1020조와 1026조에는 “미성년자가 상속을 받을 경우 부모나 후견인이 상속 사실을 안 때부터 날짜를 계산한다” “3개월 내 상속받거나 이를 포기한다고 결정하지 못할 때에는 고인의 재산, 빚을 그대로 승계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미성년자가 빚을 대물림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있다. 미성년자는 민법상 소송 등 법률행위는 물론 상속받을 재산이 얼마인지 알아보는 상속인 재산 조회도 법률대리인의 동의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법정대리인이 없거나 협조하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미성년자의 몫이 된다.임지운 임지운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상속인이 성인이면 주민센터에서 망인의 상속 재산, 부채 현황 등을 파악할 수 있지만 미성년자는 그 절차를 밟을 수 없다. 미성년자의 친권자가 도움을 거부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그런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5학년 한경호(가명) 군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큰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호 군은 생후 1년 만에 부모님이 갈라서며 줄곧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길러준 적도 없는 아버지의 빚이 어린 경호 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었다. 아버지 이외 경호 군에게 친권 대응을 할 수 있는 어머니가 유일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경호 군의 한정승인 절차를 준비해 줘야 하지만, 경호 군은 어머니의 연락처는커녕 행방조차 알지 못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어머니의 친권을 박탈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친권상실신청서를 작성해 후견인을 지정하는 절차를 밟아 한정승인 기일을 연장하는 것뿐이다. 빚 상속을 막기 위해 부모를 먼저 버려야 하는 셈이다.
복잡한 상속 절차는 미성년자에게 버거운 짐이다. 기한 내 필요한 서류를 신속히 제출하는 일이 가장 큰 부담이다. 주민등록초본, 가족관계증명서(상세), 사망자의 채무 증빙 자료, 사망사실확인서, 안심상속원스톱서비스 조회 내역, 폐쇄기본증명서, 자동차등록원부 이륜자동차 사용신고필증, 장례비 영수증 등 한정승인에 필요한 기본 서류만 15개 정도. 상세 금융 서류나 보험 서류까지 포함하면 구비할 서류가 몇 배로 늘어날 수도 있다.
“찾아가는 빚 상속 안내 서비스로 불상사 막아야”
현재 국회에는 상속 등과 관련해 민법 일부 개정 법률안 5건이 발의됐으나 모두 계류돼 있다. [대한민국국회 제공]
정경원 대한법률구조공단 대구지부 구조부장(변호사)는 “미성년자의 빚 상속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사안인 만큼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가 사망했을 경우 주민센터 등 기초자치단체가 가족관계와 채무를 확인해 해당 가정이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센터는 취약계층과 소외계층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 주민 서비스 기관입니다. 주민센터 전담 공무원, 사회복지사가 이들 가정에 방문해 빚 상속 여부와 법률 상담 방법을 정확하게 인지시켜 준다면 미성년자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부모의 빚을 떠안는 불상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미성년자 #채무 #상속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