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메타버스에 개방성 더하는 필수요건
개방성 없는 리니지로는 메타버스 만들 수 없어
게임 내 아이템, 게임 밖에서도 가치 있어야
개발사 아니라, 유저가 주도하는 가상세계 ‘웹3’
2021년에만 25조3000억 원 투자금 몰려
2021년 12월 1일 블록체인 게임업체 더 샌드박스(이하 샌드박스)가 공개한 미국 유명 래퍼 ‘스눕독’(왼쪽)의 샌드박스 내 가상 공간 ‘스눕독 랜드’.
막연한 공상처럼 들리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메타버스(metaverse, 초월 세계)’ 플랫폼을 활용하면 된다. 미국 유명 래퍼 스눕독(Snoop Dogg)은 2021년 12월 1일 블록체인 게임업체 ‘더 샌드박스’(The Sandbox, 이하 샌드박스)와 손잡고 게임 내 가상 환경인 ‘스눕독 랜드(Snoop Dogg Land)’를 판매한다고 밝혔다. 가상세계의 저택인 ‘스눕독 맨션’과 자신을 본뜬 거대한 동상, 공연장, 멋진 클래식 카까지 갖춘 가상공간(Snoopverse)을 만들었으니 놀러 오라는 메시지다.
샌드박스 게임 사용자는 스눕독 맨션에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 NFT(대체불가토큰-Non Fungible Token)로 만들어진 티켓을 구매해 특별한 파티에 참여할 수 있다. 스눕독 맨션 근처에 있는 가상 토지(Land)를 사는 것도 가능하다. 인기 스타 옆집에 살면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스눕독은 2022년 초 이곳에서 가상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얼핏 가벼운 놀이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코인포스트에 따르면 경매에 부친 스눕독 맨션 인근 가상 토지 3곳이 무려 123만 달러(약 14억 6000만 원)에 낙찰됐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공간의 소유권임에도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메타버스가 블록체인과 결합, 큰돈이 오가는 거대한 가상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세계 최대 NFT 거래 플랫폼 오픈시에서 거래되는 ‘랜드(LAND·샌드박스 가상 토지)’ 판매 추이.
기존 게임과 다르다...‘블록체인 메타버스’
게임 안에서 파티나 콘서트를 개최하는 건 새롭지 않은 일이다.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은 2020년 4월 게임 ‘포트나이트’에서 콘서트를 개최, 123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2021년 8월에는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도 포트나이트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 등 다른 유명 게임 플랫폼에서도 비슷한 이벤트가 자주 열린다.유일한 차이는 샌드박스는 블록체인 기반 게임이고, 포트나이트·마인크래프트·로블록스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들은 이 차이가 매우 큰 의미를 지난다고 주장한다. 메타버스를 표방하는 플랫폼은 많지만 개방성,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 등을 고려하면 결국 퍼블릭 블록체인(불특정 다수가 네트워크에 참여) 기반 플랫폼만이 ‘진정한 메타버스(real metaverse)’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주장은 ‘초월(meta)’을 추구하는 메타버스의 핵심 개념, 방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제약이 많거나 폐쇄적인 플랫폼은 메타버스의 개념과 부합하지 않고, 지속가능성도 떨어진다는 것. 미국 IT 분석 매체 ‘스트래트처리(Stratechery)’의 설립자 벤 톰슨은 로블록스를 ‘마이크로버스(Microverse)’로 규정하며 “로블록스는 (메타버스가 아니라) 로블록스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개방성과 상호운용성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상호운용성이란 하나의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과 아무런 제약 없이 서로 호환되는 성질을 의미한다. 예컨대 국내 유명 MMORPG인 NC소프트의 게임 ‘리니지’에서 가장 비싼 아이템 ‘진명황의 집행검’은 리니지 내부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다른 게임에서 사용할 수 없다. 마인크래프트, 포트나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샌드박스 게임 내 가상 토지는 NFT 기반 IP이기 때문에 오픈시(OpenSea) 같은 외부 NFT 거래 플랫폼에서 거래할 수 있다. 네이버 제페토, 크립토키티 등 다른 플랫폼과 공동으로 NFT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개방 전략을 취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요컨대 블록체인은 메타버스 플랫폼에 상호운용성, 개방성을 더해 주는 필수요건이다. 샌드박스에 투자한 벤처투자회사 해시드의 김서준 대표는 “(유저들은) 자신이 열심히 만든 자산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는 답답한 플랫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진정한 메타버스는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컨스티튜션DAO’, 조직 운영 방식의 미래 보여줘
샌드박스가 메타버스의 미래를 보여줬다면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탈중앙화자율조직)’는 조직 운영 방식의 미래를 보여준다. DAO는 암호화폐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이 2016년 고안한 시스템이다.DAO를 이해하려면 ‘공통 목적을 가진 개인이 자율적으로 모여 투표를 하거나 제안을 하는 집단’을 떠올리면 된다. 회사처럼 여러 사람이 모인 조직이 굴러가려면 중간자·관리자가 필요한데, DAO에서는 이 역할을 블록체인이 담당한다.
소수에게 지배력이 집중되는 게 아니라 분산 네트워크, 즉 컴퓨터 프로그램이 조직을 관리한다. 조직 지분(토큰) 보유자들의 투표에 관한 규칙을 정해 두면 블록체인이 알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율(autonomous)’이란 단어가 붙었다.
소더비 경매에 올라온 미 헌법 초판 인쇄본. ‘컨스티튜션DAO’에는 1만7000여 명의 기부자가 모여 약 4000만 달러(한화 473억 원)를 모금해 이 초판 인쇄본 경매에 참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1월 11일에 조성된 컨스티튜션DAO는 총 1만7000명의 기부자를 모집, 약 4000만 달러(한화 473억 원)를 모금했다. 단 7일 만에 이뤄진 일이다. 입찰가로 4320만 달러를 써낸 ‘헤지펀드 업계 거물’ 켄 그리핀 시타델 창업자에게 근소하게 밀려 낙찰에는 실패했지만, DAO라는 조직 형태가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확실히 보여줬다.
공동구매, 크라우드펀딩과 비슷해 보이지만, DAO는 탈중앙화(무신뢰성), 개방성 등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이들이 모금한 자금의 사용처, 사용 방법 등에 대한 모든 결정은 투표 기반 합의를 거쳐 이뤄지고, DAO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블록체인에 기록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DAO 토큰 보유자들은 주식회사 주주와 달리 제삼자의 신뢰나 관리가 필요 없다.
대부분의 Defi(Decentralize Finance·탈중앙화금융) 프로젝트가 DAO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의 친동생이자 테슬라·스페이스X의 이사인 킴벌 머스크가 ‘빅그린DAO(Big Green DAO)’ 출범을 주도하기도 했다. 빅그린DAO는 식량 문제 해결을 앞세운 자선 목적의 DAO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DAO가 계속 만들어지는 추세다.
샌드박스, 컨스티튜션DAO 같은 새로운 트렌드를 설명하기 위해 최근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바로 ‘웹3(Web3)’다. 웹3는 탈중앙화된, 블록체인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는 미래의 인터넷이다.
미래 인터넷 ‘웹3’ 시대 본격화…시장규모 두 배로
1989년 스위스 제네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일하던 팀 버너스 리가 만든 초창기 인터넷인 ‘웹 1.0(Web1)’, 2000년대 중반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 중심의 ‘웹2.0(Web2)’에 이어 약 15년 만에 찾아온 급격한 변화다. 기술업계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트렌드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예컨대 과거에 소더비 경매 입찰에 공동 참여하려면 누군가 앞장서서 투자 펀드를 조성한 후 복잡한 법률 검토 및 투자자 모집 작업 등을 해야 했다. 반면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 기능을 제공하는 이더리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DAO를 조직하면 이런 절차가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콘텐츠와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했던 웹1, 구글·페이스북 등 빅테크가 장악한 웹2와 달리 웹3는 상대적으로 더 평등하며 사용자들이 더 많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는 장점도 있다. 사용자들에게 더 큰 보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참여 유인도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경제·사회적 자유를 제공하는 인터넷 기반 가상 경제 생태계, 프로토콜 경제가 부흥하는 것이다.
미국 디지털 자산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Grascale) 2021년 1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웹2 메타버스에서 웹3 메타버스, 즉 블록체인 기반 메타버스로 전환이 일어나며 글로벌 가상세계 분야 매출이 2020년 1800억 달러에서 2025년 4000억 달러까지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벤처투자금도 몰려…일론 머스크 “헛소리” 비판
벤처투자금 역시 블록체인·웹3 분야에 몰리고 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2021년 3분기까지 이 분야에 214억 달러(약 25조3000억 원)가 투자됐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 이 분야에 투자된 금액과 비교할 때 5배나 큰 규모다.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 공동창업자인 알렉시스 오하니언(Alexis Ohanian)은 자신의 투자회사 ‘세븐세븐식스(Seven Seven Six)’를 통해 웹3 소셜미디어에 투자하는 펀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세븐세븐식스와 솔라나 벤처스(Solana Ventures)가 함께 만든 이 펀드의 규모는 1억 달러(약 1200억 원)다. 2017년 개발된 솔라나는 처리 속도 면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하니언은 성명에서 “솔라나 같은 고성능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웹2 소셜미디어’와 비슷하면서도 사용자에게 실질적인 소유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소셜미디어를 만들 수 있다”며 “소셜미디어와 암호화폐를 결합할 전례 없는 기회”라고 했다.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해시드도 최근 2400억 원 규모의 VC 펀드를 결성, 웹3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웹3의 급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웹3는 마케팅 용어일 뿐이며 이 분야 주요 투자회사 중 하나인 앤드리슨 호로위츠, 관련 서비스 개발에 앞장선 레딧 등이 지나치게 웹3를 띄우고 있다는 비판이다.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2021년 10월 웹3 제도 편입을 위해 미 행정부 인사들과 접촉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웹3가 2010년대 수준의 (높은) 벤처 투자 수익(VC)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샘 알트만 오픈AI CEO의 주장에 대해 “웹3는 헛소리(BS·bull shit)처럼 들린다”고 답하기도 했다. 웹3가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유행에 그칠 수 있다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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