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호

[에세이] 내 마음의 보청기

  • 김범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임상교수

    입력2022-01-0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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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CT 검사한 것이 많이 안 좋네요.”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생님,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요. 좀 크게 이야기해 줘요.”

    할아버지는 내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붉은색 해병대 모자를 나에게 들이밀었다. 월남전 참전 배지가 낡은 베이지색 체크무늬 양복 속에서 반짝 빛났다. 나는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크게 말했다.

    “이번에 검사한 것이 많이 안 좋다고요! 암이 많이 커졌어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에게는 귀가 어두운 어르신 환자가 몇 분계시지만, 그분은 난청이 유난히 심했다. 진료할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곤 했다. 할아버지는 오후에 늘 혼자 오시곤 하셨는데, 대여섯 시간 연속으로 진료하느라 목이 칼칼하게 잠기려는 찰나에 한바탕 크게 말하고 나면 목 안이 갈라지곤 했다.

    내 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할아버지께서 이해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제 말 이해하세요?”

    “아유… 난 몰라. 어떻게 좀 해봐요.”

    “항암약을 바꾸어볼게요. 조금 힘든 치료인데 해봅시다. 그나저나 귀 때문에 많이 불편하실 것 같은데… 웬만하면 보청기 하나 사지 그러세요?”

    “보청기가 200만 원이래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들리지 않는 만큼 멀어지는 세계

    아… 맞다. 지난번에도 200만 원이라고 몇 번 말씀하셨지. 지난번에도 대답하셨는데, 한 귀로 흘려듣고 똑같은 것을 또 물어보는 나나, 그런 질문 처음 듣는다는 듯이 200만 원이라고 또 대답하는 할아버지나 도긴개긴이었다. ‘정말 보청기가 그렇게 비싼가?’ 싶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가성비가 괜찮은 10만 원대 보청기도 많았다. 저렴해도 쓸만한 보청기도 많으니 인터넷을 잘 찾아보시라고 말하려다가 할아버지의 커다란 검은색 폴더폰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도 보청기를 좀처럼 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있다. 보청기를 사용하시면 좋을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이야기해 달라고 하신다. 병원에서도 의사소통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의사소통이 안 될수록 이를 도와줄 사람과 함께 오시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병원에 혼자 오신다. 도움을 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웅얼웅얼 말끝을 흐리신다. 반면 다른 목소리는 무척 크다. 조용히 얘기하셔도 다 들린다고 말해도, 귀청이 떨어져라 말하신다. 언성이 높아지니 화난 것처럼 보인다.

    그날도 그랬다. 외래 진료 끝나고 3층으로 올라가셔서 주사 맞으시라고 종이에 써서 안내해 드렸는데, 혼자서 엉뚱한 곳에 가셔서 헤매셨다. 한참을 헤매고 오셔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며 우리 간호사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셨다. 어디로 가셔야 할지 설명한 종이는 그새 어디에 잃어버리셨는지,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데 간호사 얼굴만 벌게졌다. 씩씩거리며 돌아서는 할아버지의 성난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보았다. 보청기와 난청만이 문제인 것일까?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청각을 통한 소통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만큼 외부 세계와 점점 더 멀어지고 단절되는 셈이다. 타인이 나와 소통하려고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골목길에서 뒤에 오는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문 밖을 나서는 일이 얼마나 무서울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한 세상은 답답함을 넘어 무서움으로 다가올 것이고, 그 답답함과 무서움의 크기만큼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됨으로 남는 것 같다. 안 들리는 만큼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간 그의 고립됨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 역시 뭐라 할 처지는 아니라고 느꼈다. 얼마 전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소리의 크기만큼 멀어진 경청

    [GettyImage]

    [GettyImage]

    “여보, 내 말 듣고 있어?”

    “응. 말해. 듣고 있다니까. 듣고 있어.”

    건성으로 듣고 있던 나에게 아내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냐”고 연신 되물었다. 아내의 말이 막바지에 달해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맥락에서 벗어나다 못해 엉뚱하고 생뚱맞은 대답을 늘어놓자 집사람은 결국 폭발했다.

    “듣긴 뭘 들어! 내 얘기 하나도 안 들었구먼.”

    “아니야! 다 들었다고!”

    나도 큰 소리로 화를 냈다. “들었다고! 들었다니까!” 열심히 들었노라 항변했지만, 그 소리의 크기만큼 내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아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며 한 타박 듣고 나서야, 나는 나의 귀가 막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돌아보면 나 하나 바꾸는 게 더 편한 문제를 두고, 귀를 막은 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작게 말한다며 세상을 원망하곤 했다. 내가 못 알아듣고서 남 탓을 했다. 귀가 막힌 것인지 마음이 막힌 것인지 모호했으나, 여하튼 둘 다 좀처럼 뚫리진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존중과 배려, 소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귀에서 마음으로 오는 30cm 길이가 그리도 멀었다.

    마음의 보청기는 어디에서 사야 하나

    내가 모든 소리를 다 못 듣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귀 막힘은 매우 신묘해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쏙쏙 듣고 듣기 싫은 이야기는 듣지 않는 선택적 차단기능도 있었다. 고언(苦言)은 안 들리고, 감언(甘言)은 잘 들렸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보청기 없는 할아버지나 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만 못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나는 멀쩡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내 마음의 보청기는 어디서 사야 하나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200만 원 주고서라도 아니 더 비싸더라도 살 수만 있다면 당장 사고 싶어졌다.

    #보청기 #소통 #존중 #에세이 #신동아

    김범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임상교수
    ● 1977년 서울 출생
    ● 2008년 에세이집 ‘진료실에서 못다한 항암치료 이야기’ 발표
    ● 2015~2020년 ‘암 알아야 이긴다’라는 항암치료 관련 시리즈 발표
    ● 2021년 에세이집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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