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보유국”이란 말 없었건만…
검찰 둘로 쪼갠 분할통치 전략
‘야당 복’ ‘여당 복’ 동시 누려
지지자도 지지 이유 모르는 역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0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2022년 첫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17년 5월 10일 취임한 문 대통령은 5월 9일 퇴임한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친문(親文) 정치컨설턴트 박시영이 2021년 8월 내놓은 주장이다. 이후 많은 언론도 비슷한 견해를 밝혀왔다. 임기 말 지지율이 수개월째 40%대로 전례 없이 높은 걸 가리켜 ‘미스터리’라는 말도 나왔다. 언론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많은 기사를 양산했지만 ‘사후 분석’일 뿐 아무도 이런 ‘이변’을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가 이렇게 말한 게 오히려 가슴에 와 닿는다.
“나도 모르겠다. 여러 칼럼에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썼는데, 지금도 잘 모르겠다. (…)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다른 교수들도 문 대통령 40%대 지지율을 설명 못 하더라.”
나 역시 이 견해에 동의한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짐작마저 포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문재인 미스터리와 관련해 그간 제시된 이유는 크게 보아 10가지인데, 이걸 소개하면서 내 생각을 말씀드려 보련다.
① ‘집토끼’ 확실하게 지킨 ‘편가르기 정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문 대통령만큼 정파적인 사람, ‘내 편, 네 편’ 따진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임기 내내 오직 40%만을 위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김재섭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극렬 지지층만 바라본 폐쇄적 국정 운영을 해왔다는 방증으로 볼 측면이 있다.”(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문재인의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세 진술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하겠지만, 지지자들은 ‘40%만을 위한 정치’를 적폐청산과 개혁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지자들은 비판적 의견을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간주한다. 문재인은 지지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유도하고 강화하는 담론을 집요하게 구사해 왔다.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사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한 편의 개그 원고를 방불케 한다. 지켜진 게 거의 없다. 그는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고 했지만, 그가 한 일은 일관되게 분열과 갈등을 키움으로써 ‘두 개로 쪼개진 나라’를 만든 것이다. 문재인은 지난 대선 직전 출간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저는 저하고 생각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정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100% 실천에 옮긴 셈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그 일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로 인해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거나 분노케 함으로써 지지율 하락 사태를 맞기도 했지만 문재인은 그런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집토끼’ 지지율만큼은 임기 말까지 지켜내는 ‘업적’을 이루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2004년 5월 17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시민사회수석비서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악수하고 있다. [동아DB]
“친문 지지층은 노 전 대통령을 통해 대통령 임기 말 지지율이 내려가면 끝장이라는 것을 이미 학습했다. 지지율이 내려가니 정권교체가 됐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수사를 시작하자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지층으로서는 정권을 유지해야 하는 학습효과 때문에 버티는 것이다.”(배종찬 인사이트K연구소장)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댓글 등의 형식으로 무수히 유포돼 왔다. 검찰개혁에서부터 언론개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혁은 오직 ‘노무현·문재인을 위하여’로 귀결됐다.
“이번에 확실히 검찰개혁을 완수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혼을 달래주세요” “지난 참여정부 때 입진보 언론이 노무현 대통령을 조중동과 함께 사지로 몰고 간 일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고 여전히 입만 살아서. 당신들 때문에 우리는 더 절박하게 문재인 대통령을 지켜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걸 모르죠?”
이런 댓글을 다는 지지자에게 과정과 절차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유린하는 ‘내로남불’은 전혀 중요치 않다. 문재인의 내로남불에 분노하는 비판자들과의 소통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지자들은 “노무현이 우파와 그 언론은 물론 ‘좌파’로부터도 협공당해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인식”(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문재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수용하거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에게도 팬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한민국은 김대중 보유국”이라거나 “대한민국은 노무현 보유국”이란 찬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문재인은 노무현의 원혼을 달래줄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통령에 차출됐기에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며 그렇게 돼야만 한다. 문재인의 대표적 과오인 ‘부동산 가격 폭등’은 그런 역사적 사명에 비추어 매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일부 강경파는 그걸 ‘글로벌 추세’라며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니 문재인 지지율이 폭락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③ 친인척 스캔들·측근 부패 게이트 부재
“역대 대통령을 어렵게 했던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의 부패 게이트 이런 게 전혀 없습니다. 권력 남용도 없고, 그러니까 과거 대통령들에게서 익숙하게 보였던 임기 말의 모습이 지금 대통령에겐 없다, 저는 그게 확연하게 다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이철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맞다. 문재인에겐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의 부패 게이트가 없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서울 홍은동 ‘금송힐스빌’에서 전세로 지냈을 정도로 인간 문재인은 청렴한 삶을 살았다”(이하경 중앙일보 주필)는 식의 이야기는 자주 거론돼 온 게 아닌가. 이건 긍정적으로, 아니 매우 높게 평가해도 좋을 일이다. 이게 문재인의 임기 말 높은 지지율을 떠받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는 데엔 흔쾌히 동의할 만하다.
사실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데엔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의 부패 게이트만 한 게 없다. 언론이 선정적으로 보도하기에도 좋은 소재가 아닌가. 지지자들이 문재인은 그게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다른 모든 과오를 눈감아 준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재인이 ‘정권 비리를 은폐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주장도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게 공정하다.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 부패 게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제대로 밝혀지기 힘든 은폐 시스템이 있으며, 이는 이전 정권에선 볼 수 없던 현상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문재인이 박근혜 정권에도 있었던 청와대 특별감찰관을 임기 내내 공석으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2019년 10월 14일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경기 정부과천청사에서 특수부 축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검찰개혁안을 발표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이제 거악(巨惡)을 감시할 국가 기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찰과 감사원은 정권의 충견이 됐고, 법원은 특정 집단 판사들에게 점령당했다. 국회는 180석 거여(巨與)가 장악해 입법 독재를 치닫고 있다.”(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실장)
“조국 사태 이후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불거진 권력형 비리와 대형 경제 비리 의혹들에 대해 ‘진짜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국민들이 분노한 라임, 옵티머스, 디스커버리, LH, 월성, 울산, 대장동, 성남FC 등 사건들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보라. ‘조국 사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드라마틱하게 다르다. 대한민국이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갑자기 ‘권력비리가 사라진 나라’가 된 것인가, 아니면 ‘권력비리 수사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인가.”(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
아닌 게 아니라 매우 이상하다. 문 정권이 목숨을 걸다시피 해서 이뤄낸 검찰개혁 이후의 검찰을 보자. 그간 나쁜 검사들은 쫓아냈거나 숨죽이게 만들었으니, 이젠 정의롭고 공정한 검사들의 활약상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가. 친정권·친여적 색깔만 두드러졌을 뿐 정의와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지 않을까. 검찰개혁을 한답시고 오히려 검찰을 더 망쳐놓은 건 아닌가.
이전 정권들에선 검찰이 정권의 충견 노릇을 하다가도 대통령의 임기 말이 되면 생존 차원에서라도 정권의 비리에 칼을 대곤 했다. 문 정권에선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문 정권 이전의 검찰은 비교적 ‘한 몸’이었던 반면, 문 정권에선 윤석열이라는 돌발 변수의 제거를 위해 검찰을 두 개로 쪼개는 분할통치 전략을 썼다. 실권을 쥔 주류 검찰의 생존 전략이나 성향이 이전과는 판이해졌다는 뜻이다. 이는 문재인의 임기 말 높은 지지율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⑤ 코로나19 초래 국민적 위기의식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말에 국정 수행 지지율이 40%를 넘는 것은 국민들이 코로나 위기 극복을 하라고 힘을 모아준 것이다.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조금 혼선이 있었지만 그걸 기민하게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 대통령에 대한 믿음을 준 측면이 있다.”(박수현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수석비서관)
글 첫머리에 인용했던 박시영도 ‘레임덕 없는 첫 번째 대통령’의 이유로 “단연 코로나19의 영향에 따른 국민적 위기의식과 여타 국가에 비해 비교 우위로 평가받고 있는 K-방역, K-접종의 효과”를 들었다. 이젠 ‘K-방역, K-접종의 비교우위 효과’를 거론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국민적 위기의식’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함께할 때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이다.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인용되곤 하는 명언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위기 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난다. 문재인은 ‘코로나 위기’의 최대 수혜자다. 2020년 4·15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주요 이유도 코로나 덕분 아니었던가. 문 정권의 코로나 대응 정책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는데도 코로나에 대한 국민적 위기의식은 늘 문재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난해 12월 당시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었던 김종인이 “코로나19 사태가 대선 자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도 바로 그럴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는 “일반 국민의 심리는 불안하게 되면 믿는 것이 결국 정부”라며 “변화에 대해 별로 관심을 안 갖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선거 자체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 출간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에서도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탄핵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재인 정부가 과연 정치적으로 무사했을까 싶다”고 했다. 방역에 성공하건 실패하건 코로나 대응의 칼자루는 문재인이 쥐고 있기에 문재인은 코로나 정국의 수혜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⑥ 대선후보에 대한 정서적 비교우위
“야당이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알아서 무너지는 ‘야당 복(福)’이 임기 내내 있었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여기에 최근에는 ‘여당 복’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재명 후보를 둘러싼 의혹들도 여전한 상황에서 (…).”(허주열 더팩트 기자)
한마디로 말해 문재인은 ‘야당 복’과 ‘여당 복’은 물론 역대급 비호감 대선후보인 이재명과 윤석열에 대한 정서적 비교우위를 동시에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야 정당의 수준은 상호 연동돼 있다. 어느 한쪽의 수준이 높아지면, 다른 쪽의 수준도 따라서 높아지지만, 낮아지면 똑같이 낮아진다. 여야 정당의 수준이 문 정권에서 최하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야당의 경우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라고 하는 치명타를 입은 상처와 후유증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적어도 유권자 인식에선 말이다. 여당의 경우엔 3권분립 체제를 위협한 ‘청와대 정부’를 최악의 형태로 구현한 문 정권에서 정당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 후보들의 탄생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언론은 문재인의 지지율을 들어 레임덕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레임덕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자발적 레임덕’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결정을 한사코 외면하는 그의 ‘책임 회피’ 성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책임회피 성향이 오히려 득이 되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이는 문재인이 늘 그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생긴 ‘면역효과’라는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
⑦ 욕먹을 일 하지 않는 책임회피
“생색나는 일엔 앞장서고, 고통이 수반되는 폼 안 나는 일은 뭉개거나 다음 정부에 떠넘기는 통치술이 비결일 것이다. 적폐청산이나 임대차 3법, 기업규제 3법 같은 편가르기는 밀어붙이면서 미래를 위해 필요한 노동 개혁과 연금·재정 개혁 같은 인기 없는 과제는 죄다 차기 정부로 넘겨버렸다. 그러니 절반 이상의 국민이 문재인 정부의 레거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이정민 중앙일보 논설실장)
“문 대통령은 방역 상황이 조금만 호전되면 ‘K방역의 성과’라며 직접 나서서 자랑했다. (…) 그러다 그 백신 공급이 펑크 나자 복지부 장관이 대신 사과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본인이 나서고, 위기가 닥치면 아랫사람을 대신 내세운다. 단 한 번 예외 없는 문(文)의 법칙이다.”(조선일보 2021년 12월 17일자 사설)
“대통령은 뭘 하든 욕먹는 게 운명인데 검찰개혁으로 욕먹은 사람은 추미애다. 부동산 실패는 문 대통령보다 김현미가 욕 더 먹었다. (…) 대통령은 똥물이 튈 자리에 아예 가질 않는다. 그림 좋고 하나마나 한 소리나 한다.”(서민 단국대 교수)
이 세 진술은 다 독하긴 하지만, 문재인 비판 담론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단골 소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문재인 지지자들도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항변은 할망정 사실 차원에서 반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례가 있다.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사건’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 ‘김학의 출금 공문 조작 의혹 사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등의 경우처럼 문재인의 한마디나 관심사라는 이유로 일어난 사건이 많다. 문재인에게 법적 책임은 없을망정, 대통령 권력의 속성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자신으로 인해 고위 공직자가 감옥에 갇히거나 수사·재판을 받는 상황이 벌어져도 내내 침묵만 굳게 지키는 모습은 보기에 딱하다. 딱하긴 하지만, 문재인은 자신의 ‘순결’은 지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유례없이 높은 임기 말 지지율을 누리게 됐지만, 이게 축하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⑧ 집요하고 공격적인 자화자찬 홍보
“누가 뭐래도 줄기차게 ‘국정 성과’를 주장한다.”
박제균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문재인의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 비결 중 하나로 지적한 것이다. 문 정권의 초대 경제부총리였던 김동연은 지난해 11월 문재인을 향해 “자화자찬보다는 진솔하게 사실대로 말하면서 이해를 구하는 소통이 아쉽다”며 현직에 있을 때 그런 말을 여러 차례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나 역시 멀리서나마 안타까워했던 사람 중 하나다. 문재인은 왜 그렇게 자화자찬을 해댄 걸까. 부동산·코로나 문제에 대해 성급한 자화자찬을 했다가 발목이 잡혀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의 자화자찬은 그칠 줄을 모른다.
문재인은 지난해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하면서 “이런 말을 하면 자화자찬이다, 국민 삶이 어려운데 무슨 소리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이건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세계의 객관적 평가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런 자부심이 우리가 미래에 발전할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문재인의 이런 자부심 강조에 주목한 이상언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대통령의 자부심, 국민의 자괴감’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그간 문재인이 사용한 주요 ‘자부심 사례’들을 열거했다. 지면의 한계상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으니, 이 칼럼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 역시 별도로 찾아보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자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이게 ‘자기암시’로 발전하면서 현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수용하는 데 큰 장애가 됐을 가능성이다. ‘긍정과 낙관’이 문재인 개인의 ‘인간 승리’엔 큰 도움이 됐을망정 국가 차원에선 비극을 초래했을 가능성 말이다. 그럼에도 문재인의 자화자찬은 임기 말 높은 지지율 유지엔 도움이 됐을 게다. 언론의 대통령 발언 우대로 인해 그의 자화자찬은 지지자들을 묶어두는 데엔 세뇌에 가까운 효과를 낳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탁현민 대통령의전비서관(오른쪽)이 2020년 7월 14일 ‘한국판 뉴딜 보고대회’가 열리는 청와대 영빈관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이 대통령이란 자리를 갖고서 권력을 누리겠다, 이런 생각 없이 또박또박 일에 매진하는 스타일입니다. 요즘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참모 회의를 합니다. 누리는 대통령이 아니라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 이것을 국민이 평가해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이철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이 일을 계속하고 계신 거예요. 그럼 뭐 전임 대통령들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 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만 사실 임기 말이라는 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추진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러나 우리 상황이 멈춰 있거나 혹은 관리만 해서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여러 엄중한 일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계시고 또 우리 정부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게 그냥 어떤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
이철희와 탁현민의 생각에 동의한다. 사실 문재인은 ‘일중독’에 가깝다. 지난해 청와대는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과 화상으로 만나는 행사를 열었다. 한 어린이가 “대통령님은 몇 시에 주무시나요?”라고 묻자, 문재인은 “대통령 할아버지는 잠을 좀 늦게 자요. 할 일도 많고 또 봐야 되는 서류도 많거든요. 그래서 밤 12시쯤 되어야 잠자리에 든답니다”라고 했다. 문재인은 지금도 밤늦게까지 서류를 보느라 바쁘다고 한다.
그걸 좋게만 보기는 어렵다. 부지런한 건 좋은데, 문제는 오히려 이런 성향이 서류로 대체할 수 없는 현실의 갈등 상황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 중심으로 보자면 ‘일중독’에 가까운 문재인의 헌신은 탁현민의 탁월한 이미지 관리술을 통해 국민에게 잘 전달됐기에 임기 말 높은 지지율에 기여했을 것이다.
⑩ 긍정적 이미지 위주 이벤트 정치
“유명 연예인과 만나고, 독립운동가 유골 송환이나 첨단 국방 무기 실험처럼 모양새 나는 곳에 얼굴을 보일 뿐, 정작 갈등을 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문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의 지지도가 전례 없이 높은 비율로 유지되는지 모르지만, 그 리더십으로 당대 국민은 피곤했고 역사는 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가 ‘문재인 5년, 업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흔히 거론되는 문재인의 불통과 책임회피 문제 등을 거론한 후에 한 말이다. 긍정적 이미지 위주의 이벤트 정치가 문재인의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보다 적극적인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이벤트 정치다.
‘이미지 정치’나 ‘이벤트 정치’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정치의 문법을 송두리째 바꾼 영상매체 시대의 현실로 이해하는 게 옳으리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전몰장병 추도식과 같은 엄숙한 의식에서 눈물을 가끔 흘림으로써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감격시키곤 했다. 역사학자 헨리 그라프는 그런 일련의 감동적인 장면이 은폐하는 문제에 주목하면서 “대통령은 목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지만, 대중은 지도자의 애국적 눈물에 약한 걸 어이하랴.
문재인도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2017년에도 유가족 200여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2시간 동안 위로하며 눈물을 훔치는 등 ‘눈물 메시지’를 잘 활용한 대통령이었다.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선별적 눈물’이라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긴 하지만, 지지자들에겐 눈물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인자한 대통령으로 각인됐다. 문재인의 이벤트 정치가 낳은 긍정적 효과 또한 탁현민의 공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순에 대한 무관심’ 결과
이상과 같이, 문재인의 임기 말 지지율이 높은 이유로 10가지를 제시했지만,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하라면 단연 ‘이미지’다. 높은 지지율을 받쳐주는 건 10~20%의 유권자다.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문재인을 지지할 콘크리트 지지층이 20~30%는 될 거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간의 모든 여론조사를 분석해 보면, 집권 초창기와 그 나름 업적으로 내세웠던 대북관계 개선 등이 있던 시기가 지난 뒤 지지 이유가 점점 추상화하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그게 바로 ‘이미지 파워’다. ‘데일리안’(2022년 2월 7일)의 분석 기사가 잘 지적하듯이, “‘문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면서 ‘이유는 모르겠다’는 응답이 13~17%에 달하는 것도 의아하거니와 △전반적으로 잘한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한다 △기본에 충실하다 △전 정권보다 낫다는 응답도 ‘이유는 모르겠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지 이유”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미지 정치’의 달인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온갖 실책을 저질러놓고도 그 책임에서 면제돼 ‘테플론(Teflon먼지가 붙지 않는 특수섬유의 상표이름)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레이건의 ‘살인 미소’와 친근감을 주고 매력을 풍기는 이미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재인에게 그런 ‘테플론’ 특성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물론 문재인 나름의 ‘이미지 파워’다.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 직후 ‘얼굴 패권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는데, “왜 문재인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지지자들의 답을 잘 뜯어보면 상당 부분 얼굴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은 ‘얼굴 패권주의’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정하는 게 내키진 않겠지만, 현대 정치는 ‘이미지 정치’다. ‘이미지 정치’에 내장된 ‘이미지 사고’의 특징은 ‘모순에 대한 무관심’이다. 문재인과 문 정권의 속성이 돼버린 내로남불, 그리고 지지자들의 내로남불에 대한 무한한 관용은 바로 그런 ‘이미지 사고’가 ‘편가르기 부족정치’와 결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의 임기 말 높은 지지율에 결코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이유다.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現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