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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불안한 미래를 살다가 그림 덕분에 현재를 오롯이 산다”

꽃 그리는 화가로 돌아온 가수 박혜경의 고백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늘 불안한 미래를 살다가 그림 덕분에 현재를 오롯이 산다”

  • ● 중2 때 무작정 상경해 안 해본 알바 없다
    ● 엄마의 ‘남편’이자 자부심이기에 바르게 컸다
    ● 비주류 음악으로 주류 시장에서 큰 사랑받아
    ● 사기당한 후 성대 수술 받고 가수 생명 끊어질 뻔
    ● 꽃 덕에 가수로 재기, 숨은 재능도 발견


“각양각색의 꽃들과 한 여인, 새, 나비가 어우러져 따사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여러 색깔을 썼는데도 전체적인 색감이 조금도 촌스럽거나 유치하지 않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9월 2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 전시된 가수 박혜경의 그림을 보고 관객들이 보인 반응이다. 사실 기자도 놀랐다. 노래 잘하는 박혜경이 음악이 아닌 그림으로 이토록 대중의 이목을 끌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혜경은 이날 ‘행복한 돼지’ 그림으로 유명한 한상윤 작가와 컬래버 전시를 펼쳤다. 박혜경에겐 화가 데뷔전이었다.

“제가 직접 그린 앨범 재킷 사진을 보고 한상윤 작가가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었어요. 컬래버 전시도 한 작가가 제안했고요. 전시한 작품들을 3주 동안 완성하느라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아직은 화가라는 말이 쑥스럽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살던 내가 지금은 오롯이 현재를 사는 느낌이에요.”



전시장에서 만난 박혜경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꽃을 피우며 환하게 웃는 그의 그림 속 여인처럼. 이날의 기분 좋은 여운을 안고 10월 4일 그를 다시 만났다. 많은 히트곡을 내며 무대에서 큰 사랑을 받다가 성대결절로 가수 활동을 그만뒀던 그가 전혀 접점이 없는 ‘꽃을 그리는 화가’로 새롭게 출발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화사한 원피스에 모자를 쓰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는 전시회가 끝나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전시한 작품 중 가장 큰 사이즈인 100호짜리 그림만 빼고 모두 팔렸어요.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도 많이 받았고요. 한상윤 작가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시할 그림을 완성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니 꿈만 같아요.”

박혜경은 9월 2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열고 화가로 데뷔했다. [지호영 기자]

박혜경은 9월 2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열고 화가로 데뷔했다. [지호영 기자]

먼 친척 사돈집 다락방에서 키운 꿈

그는 “노래가 내 삶 자체라면, 그림은 나를 살게 하는 자양분”이라고 표현하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가수를 꿈꾸던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다.

“6~7세 때부터 노래하는 사람을 꿈꿨어요. 할머니가 서울에서 라디오를 보내주셨는데 거기서 나오는 노고지리의 노래를 들으며 묘한 매력을 느꼈죠. 제 고향은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봉황리의 작은 부락이에요. 연탄도 없어서 나무를 때는 깡촌이었죠. 시골 우리 마을에 교회가 있었는데 엄마는 불교 신자인데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연할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저를 교회에 보내셨어요. 그 덕에 크리스마스 공연 때마다 무대를 독차지하고, 초등학교 때는 합창단 선생님의 권유로 독창 대회에 나갔어요. 그때부터 혜은이, 조용필 선배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 삼촌들이 ‘TV가이드’라는 잡지를 즐겨 봤는데 거기에 가수나 연예인 지망생을 모집하는 광고가 많았어요. 서울에 가야 가수가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중2 때 무작정 상경했죠.”

서울에 연고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먼 친척의 사돈집 다락방에서 살았어요. 엄마가 보내주는 하숙비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워 분식집 서빙에 스티커 붙이기, 전단지 돌리기 등 별의별 알바를 다했어요.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도 돈을 벌기 전까지 알바를 계속했어요.”

삶이 고달팠을 법한데요.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줄곧 고생의 연속이었어요. 상상할 수 없는 고생이었지만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았어요. 나한텐 꿈이 있으니까요. 가수가 돼서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제 꿈이었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안 해본 알바가 없어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요. 난 엄마의 남편이자 자부심이자 자긍심인데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꿈에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해 중3 때 뮤지컬을 시작했다. 오디션을 봐 첫 뮤지컬인 MBC 창사특집극 ‘치롱이와 또롱이’의 주인공을 따냈다.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 상도 여러 번 받았다. 1995년 MBC 강변가요제에 ‘Easy’라는 명칭의 듀엣으로 참가한 적도 있다.

“가수가 되려면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나가야겠더라고요. 대학생 신분이 필요해 명지전문대에 들어갔다가 강변가요제에서 떨어진 후 그만뒀어요. 가수가 되고 나서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과에 진학했지만 휴학했어요. 공부에 취미가 없어요.”

극심한 스트레스로 성대 수술까지

그는 1997년 ‘더더’라는 그룹으로 비로소 가요계에 데뷔한다. 이후 독보적이고 독특한 음색으로 큰 사랑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3옥타브 미나 파까지 올라갈 정도의 고음을 비브라토 없이 진성으로 내는 가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그의 음색은 허스키한 듯하면서도 맑고 여려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 덕분에 비주류인 인디음악을 하는 가수임에도 그의 노래는 주류 시장에서 인기를 끈다. 더더 1집에 수록된 ‘내게 다시’를 비롯해 ‘고백’ ‘안녕’ ‘빨간 운동화’ ‘하루’ ‘너에게 주고 싶은 세 가지’ ‘약속’ ‘주문을 걸어’ ‘레몬트리(Lemon Tree)’ ‘사랑과 우정 사이’가 대표적이다.

한창 잘나가다 성대결절로 무대를 떠났어요. 건강이 악화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백지영 같은 주류 대세 가수는 아니었어요. 인디음악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해 분에 넘치게 사랑을 받았어요. 제 노래가 38편의 광고에 CM송으로 쓰였죠. 데뷔 앨범부터 레몬트리까지 안 된 앨범이 없어요. 레몬트리 하나로 소속사가 빚을 다 갚았을 정도로요.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도 노래를 녹음했을 만큼 성대가 건강한 편이었는데 레몬트리 앨범을 내고 나서 사건사고에 휘말려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 때문에 성대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요.”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한상윤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난 오롯이 현재를 살고 있다’고. 너무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어요. 그 때문에 동생들이 다 시집, 장가가고 나니 그제야 제 미래가 걱정되더라고요. ‘내가 노래를 못 하게 되거나,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거나, 고정 수입이 없거나 하면 나는 누가 책임지지?’ 하고요. 책임질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누군가의 말에 속아 덜컥 사업을 벌였어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부었죠. 처음에 가게가 너무 잘됐어요. 그래서 권리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그 일로 건물주와 법정다툼까지 벌였어요. 결국 제가 이겼지만 이것저것 다 떼고 나니 남는 게 없었어요.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걸 견디다 보니 성대에 폴립이 생겼죠. 두 번에 걸쳐 성대에서 혹을 떼고 나니 그 자리가 붙지 않아 노래할 수 없었어요.”

한상윤이라는 인연

박혜경이 자신을 화가의 길로 이끈 한상윤 작가(왼쪽)와 컬래버 전시를 선보였다. [지호영 기자]

박혜경이 자신을 화가의 길로 이끈 한상윤 작가(왼쪽)와 컬래버 전시를 선보였다. [지호영 기자]

시련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나는 살아야 하니, 하늘 아래 나를 책임져 주는 사람이 없으니 가수 그만두고 찾은 직업이 플로리스트예요. 어릴 적부터 꽃을 좋아했어요. 등굣길에 꽃에 정신이 팔려 지각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그렇게 좋아하는 꽃과 늘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차 두 대를 팔아 유학을 갔어요.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에서 공부하며 2015년 플로리스트 전문가 과정 디플로마를 취득했죠. 현지에서 인정받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배웠고 그때 딴 플로리스트 디플로마가 3개예요. 한국에서 가수를 못 하니 중국에 가서 플로리스트로 활동했고요. 말이 안 통해 힘들기도 했지만 대신 예쁜 꽃을 매일 접하며 다른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목 상태가 좋아져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됐어요.”

목 상태가 완전히 회복됐나요.

“지금은 노래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지만 더 탄력이 생겼어요. 예전 목소리가 왜 안 나오나 신경 썼더니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더군요. 지금 목소리를 받아들이라고요. 그렇게 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지금은 꽃을 그리는 화가 겸 가수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한상윤 작가가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죠.

“사실 처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한 건 상윤이가 아닌 다른 지인이에요. 오래전 알고 지내던 화가 동생이 내가 많이 힘들어하니까 ‘종이를 사가지고 그림을 그려봐’ 하더라고요. 그래서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더니 ‘그림이 와 이리 특이하노!’ 하면서 아크릴물감으로 그려보라고 했어요. 아크릴물감을 사다가 앨범 재킷을 그렸더니 ‘언니야, 정말 그림을 안 배운 사람이 맞나?’ 하면서 그림을 계속 그리라고 하더군요. 매니저가 홍대 인근에 복사하러 갔다가 만난 한 미대 교수님이 그림 그린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대요. 색감을 어떻게 이렇게 잘 썼냐면서요. 굉장히 유명한 갤러리의 관장님도 그 그림을 절대 버리지 말고 딱 10작품만 그려서 갖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사를 다니다 잃어버렸어요. 그러고 십수 년이 흐른 뒤 한 작가를 우연히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죠.”

한 작가와 박혜경은 평소 서로를 ‘누나’ ‘상윤아’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다. 박혜경은 한 작가를 “내가 믿고 의지하는 동생이자 매니저 같은 존재”라고 했다.

노래처럼 그림도 “박혜경답기를”

박혜경이 직접 그린 앨범 재킷 앞면과 뒷면(오른쪽). 박혜경 제공

박혜경이 직접 그린 앨범 재킷 앞면과 뒷면(오른쪽). 박혜경 제공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내가 나오는 ‘슈가맨’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작가가 우연히 보고 펑펑 울었대요. 성대결절로 가수를 포기하다시피 했던 내가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모습을 본 거죠. 그때 ‘박혜경이라는 가수를 찾아야겠다. 찾아서 행복을 전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대요. 그런 마음으로 저를 찾아 ‘다시 노래해 줘서 고맙다’며 행복한 돼지 그림을 선물했어요. 그러다 제가 그린 앨범 재킷을 보고 그림을 그리라고 권유했어요. 이번 컬래버 전시도 한 작가가 먼저 제안했어요. 국내외에 여러 전시 일정도 잡았고요. 전시할 작품을 짧은 기간에 완성한 것도 상윤이 덕분이에요. 상윤이에게 누가 될까 미친 듯이 열중해 그렸거든요. 상윤이가 처음에 저한테 화가를 권하며 제 앨범 재킷 뒷면에 있던 노래하는 새 그림이 자꾸 생각난다고 했어요. ‘누나가 좋아하는 노래하는 새와 꽃을 그려보라’는 말도요. 걔는 내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저한테 ‘누난 해낼 거야, 누나의 감을 믿어봐, 누나는 플로리스트잖아’ 하면서 용기를 북돋워줬어요. 상윤이의 믿음과 기대를 저 역시 저버리고 싶지 않았고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으로 그는 ‘행복이 배달되었어요’라는 제목의 작품을 꼽았다. 예쁘게 미소 짓는 여자의 온몸에 꽃이 있는 그림이다.
“엄마가 서른두 살에 혼자 돼 인생을 치열하게 사셨어요. 나중에 커서 여자가 됐을 때 같은 여자로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어요. ‘다른 데 시집가지 않고, 남자친구도 만들지 않고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요. 그랬더니 엄마가 ‘너희들이 내 양분을 빨아먹고 조랑조랑 예쁘게 피면 되는 거야’ 하시더군요. ‘여자는 행복을 키우고 피우고 가꾼다’면서요. 그걸 예쁘게 표현한 게 ‘행복이 배달되었어요’라는 작품이에요.”

가장 큰 100호 그림은 뭘 그린 건가요.

“레몬트리에 제 생각과 작품을 담았어요. 성대 수술을 하고 다시 목 상태가 완벽해져서 앨범을 냈을 때의 재킷 그림 하나, 꽃을 그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해피버스데이를 상징하는 플라워 케이크, 그동안 배우고 해왔던 플라워 장식들, 상상 속 나비를 타원에 담아 나무에 걸었어요. 왜 나비냐고 사람들이 물어봐요. 나비도 꽃이었다는 주제로 그린 그림이죠. 밤이 되면 나비가 꽃을 피우는 것 같다고 상상하면서요. 타원에 그림을 넣은 건 제가 타원을 미치도록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남자 친구가 예전에 그 타원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잇즈 마이 월드(It’s my world)’라고 답했어요. 내 세상이라는 의미죠.”

화가로서 앞으로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요.

“제 생각이 깨알같이 담긴 일기에 이런 기도가 적혀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특별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되게 해주세요.’ 그 기도가 이뤄져 제 얼굴을 몰라도 목소리는 많이 아세요. 나다운 목소리로 비주류 가수임에도 큰 사랑을 받았어요. 가수가 됐을 때 발라드를 불러보라고 누군가가 권유했어요. 그때 엄마에게 말했어요. ‘난 100만 장 파는 가수보다 3만 장을 팔아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할래’라고요. 제 목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이 ‘저건 박혜경 노래다’ 하고 알아주는 것처럼 제 그림도 ‘저건 박혜경 그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텐 최고의 찬사예요. 저는 앞으로도 남들이 쓰지 않는 다양한 예쁜 색을 다 써서 꽃을 그릴 거예요. 신이 인간을 만들면서 보물을 숨겨놓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보물을 찾아보라고요. 가수라는 보물 하나를 찾았으니 두 번째 보물도 신나게 찾아보려 해요.”

어머니에게 배운 지혜, 타고난 열정

이미 찾은 거 아닌가요.

“화가의 길이 험난하니 그 보물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볼 거예요. 한 작가의 손을 잡고 가고 있어요. 혹시 내가 모를까 봐 한 작가에게 ‘누나 그림 괜찮은 거지?’ 하고 계속 물어요. 그러면 한 작가가 ‘누나, 지금 잘하고 있어. 그런데 어느 정도 가면 딜레마에 빠지니까 지켜볼 거야. 누구 얘기 듣지도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누나만 행복하면 돼’ 하고 인도해 주죠.”

이번 전시회 브로슈어에 그는 자신을 ‘노래하는 플로리스트’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14살에 상경해 가수가 되고 성대 수술로 방황하다 꽃을 만났다. 예쁘다, 예쁘다 하니 그 꽃의 에너지로 신기하게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됐고 이제는 그 꽃을 그린다”고 소개했다. 꽃을 장식할 때도, 노래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그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강한지 ‘곧 무너질 것 같아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원동력이 뭔가요.

“엄마의 말씀이 나를 지치지 않게 해요. 엄마는 ‘이렇게 집요하니 넌 뭘 해도 되겠다’고 말씀했어요. 제가 한때 소속사에 묶여 있었던 적이 있어요. 하늘을 찌르는 기세를 지닌 분이 그 회사 대표였는데 그분이 계신 호텔로 찾아가 무릎 꿇고 얘기했어요. 계약 해지해 달라고, 여기선 안 될 것 같다고요. 그 대표님도 저한테 ‘넌 뭘 해도 되겠구나’ 하셨어요. 지금 그림을 집요하게 그리는 것도 그런 기질 덕분인 것 같아요. 열정으로 치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요.”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병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우리 네 남매의 옷을 다 만들어 입혔어요. 그런 와중에 동호회 활동을 하며 시집도 내셨고요.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죠. ‘서울에서 위험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말을 걸어 위험하다는 생각을 제거하라’는 엄마의 조언 덕에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어요. 가수로 한창 활동할 때 택시기사가 나를 성폭행하려고 산으로 끌고 갔어요. ‘아저씨 제가 가수인데 제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저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이렇게 고생했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찬찬히 얘기해 줬죠. 그랬더니 그 기사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네요.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끌고 왔는데 꼭 훌륭한 가수가 되라’며 무사히 보내줬어요. 그런 엄마가 계셔서 저한테 행복이 배달된 것 같아요.”

살면서 길을 잃었을 때 마음에 새기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나요.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이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져요.”

지금은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완벽히 그림에 몰두하고 있어요. 한 작가의 도움으로 연말까지 잡혀 있는 전시가 10개가 넘어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시해요. 전시 준비를 하며 간간이 무대에서 노래도 해요. 단독 공연은 아니지만 대중 앞에서 노래할 기회가 계속 주어져 기쁘고 감사할 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묻자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박혜경은 마지막까지 박혜경다웠다.

“파리 근교에 지베르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요. 인상파 거장 모네가 43년간 거주한 곳이에요. 모네는 거기서 여러 작품을 완성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꿨어요. 모네 정원이 있는 그 마을에서 ‘3개월살이’를 하고 싶어요.”



신동아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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