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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의 거짓말? 선화공주가 미륵사 세우지 않았다

[명작의 비밀] 두 탑 중 하나만 살아남아, 상처도 운치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학대학교수 kpleedonga@hanmail.net

서동요의 거짓말? 선화공주가 미륵사 세우지 않았다

  • ● 세월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석탑
    ● 2009년 해체 조사 중 사리봉안기 발견
    ● 사택적덕 딸이 미륵사 건립
복원을 거친 미륵사지 석탑의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원래 탑의 모양을 예상해 그린 겨낭도. [문화재청]

복원을 거친 미륵사지 석탑의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원래 탑의 모양을 예상해 그린 겨낭도. [문화재청]

1910년 일제가 촬영한 미륵사지석탑의 서쪽 부분. [문화재청]

1910년 일제가 촬영한 미륵사지석탑의 서쪽 부분. [문화재청]

1910년 조선총독부는 전북 익산 미륵사 터를 조사했다. 백제 사찰 미륵사는 사라져 그곳은 빈터였고 석탑 하나와 당간지주(幢竿支柱)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있다. 위태로움과 처연함이 가득한 석탑 사진. 석탑의 서쪽 면을 찍은 것이다. 이 탑은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진 속 석탑은 꼭대기 세 개 층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다. 남아 있는 부분도 4개 면 가운데 3개 면의 상당 부분이 무너지고 한쪽 모서리 부분만 남았다.

6층의 경우는 4개 면 가운데 1개 면에만 돌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남은 돌은 잘 버틸 수 있을지 위태롭기만 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 같다. 무너진 석재들은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 조선총독부 조사단은 당시 보고서에 “조선의 석탑 가운데 가장 장대하며 형태 역시 지극히 아름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존재하는 6층의 탑신이 위태로워 실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적은 후 ‘보존이 가장 시급한 문화재’로 분류했다.

5년 후인 1915년 일제는 ‘미륵사탑 보존 공사’를 진행했다. 무너지고 흘러내린 석재를 정리하고 취약 부위를 보강했으며 무너진 경사면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미륵사지 석탑이 더는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응급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 후 2001년까지 국보 미륵사지 석탑은 콘크리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온 국보 미륵사지 서(西)석탑이다. 6층까지의 높이는 14.2m. 그렇다면 이 탑은 언제 어떻게 무너져 내린 것일까.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목탑 양식 석탑의 비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됐고, 가장 크다. 백제 무왕 때인 7세기 초에 세운 거대한 탑이다.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고, 2001~2019년까지 18년간 콘트리트를 제거하고 탑을 해체한 뒤 다양한 수리를 거쳐 해체 직전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건축물 모양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어가는 한국 석탑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준다. 탑신(몸체)을 보면 문과 기둥이 있고, 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돌이 놓여 있다. 탑이 아니라 건축물 같은 모양이다. 돌을 이용해 나무집을 짓는 것처럼 탑을 만든 것이다.



목조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탑을 세우려면 기둥도 여럿 세우고 그 사이에 돌문까지 설치하고 게다가 대들보와 같은 돌도 올려놓아야 한다. 탑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흔히 보아온 석탑보다 훨씬 많은 부재가 들어가야 한다.

탑을 구성하는 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탑은 위험하다. 자칫 돌 하나만 뒤틀리더라도 연쇄반응으로 탑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다. 이와 달리 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탑은 훨씬 더 안전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처럼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 건축물 모양의 목탑 형식을 계승하다 보니 엄청난 양의 부재를 써야 했고, 늘 붕괴 위험에 노출돼야 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륵사에는 원래 가운데에 목탑 하나가 있고 그 좌우로 석탑 두 개가 있었다. 목탑은 조선시대 이전에 무너졌거나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東)석탑도 조선시대에 붕괴돼 사라졌다. 미륵사 자체도 이때 없어졌을 것이다. 18세기 이전의 어느 순간, 이 거대한 석탑의 어느 부위에선가 돌이 어긋나고 빠지고 깨지면서 석탑은 중심을 잃었을 것이다. 탑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무거운 석재들은 주변 땅바닥으로 밀려나 흩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 사람들은 그 석재 가운에 일부를 여기저기로 옮겨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 사진을 보면 주변은 모두 논밭이다. 미륵사가 오래전 폐사(廢寺)가 됐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콘크리트 보수의 빛과 그림자

1915년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콘크리트로 땜질해 붕괴를 막았다. [문화재청]

1915년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콘크리트로 땜질해 붕괴를 막았다. [문화재청]

1915년 일제는 미륵사탑 보수공사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콘크리트는 당시로서는 최신 토목건축 재료였다. 특히 무언가를 단단하게 하고 고정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의 무너진 면에 콘크리트를 덧댄 것이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는 석굴암 보수에도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1913~1915년 조선총독부는 일부가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는 석굴암을 보수했다. 그러면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主室)의 천장 외부를 콘크리트로 덮어씌웠다. 석굴암을 콘크리트 돔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도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일본인이 불법 유출했다 반환한 경천사 10층 석탑(국보)을 1959년 보수 복원할 때 콘크리트를 일부 사용했다. 1964년 석굴암을 보수할 때에도 콘크리트를 썼다.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외부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 층을 만들어 씌운 것이다. 석굴암은 이렇게 해서 현대식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봉되었다. 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커지고 내부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결로(結露)현상을 막기 위해 에어콘을 설치하기도 했고 급기야는 일반 관람객이 석굴암 내부(전실(前室)과 주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유리문을 설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현대의 토목공학 방법을 이용해 석조 문화재를 보수하고자 했던 20세기 초중반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문화재계는 보수공사에 사용한 콘크리트의 부작용을 하나둘 목도했다. 성찰도 이어졌다. 이제는 석조 문화재에 사용한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친환경 문화재 보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미륵사지 석탑은 1915년 이후 무너진 상태에서 안정을 유지했다. 콘크리트로 여러 석재를 고정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로 덕지덕지 뒤덮인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지만, 그래도 완전 붕괴를 막았다는 점에서 위안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70여 년. 그것이 우리가 보아온 국보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탑에 발라놓은 시멘트에도 금이 가고 군데군데 부서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균열 부위에 빗물이 새어들고 탑 자체의 내구성도 약해졌다. 시멘트 석회가 화강암 부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확인됐다. 물리적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다. 콘크리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태로 우리의 국보 미륵사지 석탑을 계속 내버려 둘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었다.

미륵사지석탑 해체 논란

1990년대 들어 미륵사지 석탑, 그러니까 콘크리트 석탑을 해체·보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렇지만 선뜻 해체를 결정하지 못했다. 위험한 상태에서 해체에 들어갈 경우 석탑이 더 파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석재를 훼손하지 않고 콘크리트를 제거한다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단단한 콘크리트를 떼어내려면 충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1300여 년 세월 속에서 매우 약해진 석재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결정은 쉽지 않았다.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수년 동안의 논의와 구조안전 진단을 실시했고, 결국 1998년 해체·보수하기로 결론을 냈다.

드디어 2001년 10월 말 해체를 시작했다. 저렇게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붙어 있는 석탑을 해체한다는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예상대로 해체 작업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해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는 콘크리트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자칫 탑의 부재를 훼손할 수 있기에 기계를 사용할 수 없었다. 노련한 석공과 기술자들의 수작업에 의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콘크리트의 두께와 양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당초 콘크리트 두께를 30∼40㎝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최대 4m에 달했으며 그 양도 185t이었다. 부재 또한 예상을 뛰어넘어 3000여 개가 나왔다. 그렇다 보니 석탑을 해체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조립과 복원의 난제

2019년 복원이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 [문화재청]

2019년 복원이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 [문화재청]

해체도 어려웠지만 해체 이후에 석재를 조립해 복원하는 것도 보통 고난도의 일이 아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해체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5년부터 복원을 놓고 논의를 시작했다. 우선 석재의 강도를 확인해 해체한 부재를 어느 정도까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했다. 또 9층까지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해체 직전의 모습대로 6층까지 복원할 것인지도 논의 대상이었다.

9층 복원안은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 일찌감치 제외됐고, 6층 복원안으로 논의가 좁혀졌다. 6층 전체 복원안은 해체 직전 남아 있던 부분뿐만 아니라 무너져 사라진 부분까지 새로운 부재로 모두 쌓아 올려 6층을 만드는 방안. 6층까지 4개 면을 모두 복원하는 것이어서 해체 직전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진다.

6층 부분 복원안은 사라진 부분은 그냥 두고 남아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쌓아 올리는 방안. 원래 있던 부분과 콘크리트가 있던 부분까지만 복원하는 것이다. 콘크리트를 제거한 그 자리에 새로운 부재로 돌을 쌓아올려 해체 직전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방안이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6층 부분 복원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해체 직전의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되살리는 방안이었다. 문화재 보수복원은 원형보존(해체 직전의 상태)의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6층 부분 복원안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난제가 등장했다. 1, 2층이 문제였다. 6층까지 겨우 남은 미륵사지 석탑은 남서면이 거의 모두 붕괴됐다. 1, 2층도 남서면의 옥새석(지붕돌)과 탑신이 사라진 상태였다. 해체 직전의 상태로 복원하다면 1, 2층은 남서면에 옥개석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탑은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층까지는 4개면 옥개석까지 모두 복원하기로 했다. 1, 2층의 경우는 탑의 아랫부분이라 모두 복원해야만 탑 전체의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3~6층은 해체 전의 모습으로 복원하되 탑의 안전을 위해 일부를 보완 복원하기로 했다.

선화공주와 미륵사는 무관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공사 중 석탑 1층 기단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공사 중 석탑 1층 기단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문화재청]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조사 과정에서 흥미롭고 놀라운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석탑 1층 기단부 아래쪽 내부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일체가 발굴된 것이다. 금제 사리호(舍利壺),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은제 사리기(舍利器), 사리와 각종 장식물 등. 화려하고 정교한 사리호도 대단했지만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단연 사리봉안기였다. 금판으로 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지 석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겨놓았다.

사리봉안기 내용을 요악하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내놓아 미륵사 가람을 창건하고 639년(기해년)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이야기다. 그동안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에 따라 서동왕자였던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사랑을 성취한 뒤 함께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믿어왔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이 금제 사리봉안기의 발견으로 그동안의 믿음이 흔들리게 됐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좌평 사택 씨(氏)는 백제의 8개 부족 세력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 사리봉안기의 등장으로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는 후대에 지어낸 가공의 스토리일 가능성까지 대두됐다.

사실 백제 말기 시대 상황으로 보아 적국(敵國)인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리봉안기 내용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자체를 허구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문화로 보면 무왕의 부인이 여러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리봉안기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석탑의 건립 연대를 정확히 밝혀주었다. 미륵사를 창건한 주인공은 무왕과 선화공주가 아니라 무왕과 사택 씨의 딸이라는 사실은 이제 새로운 역사가 됐다. 선화공주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겠지만, 미륵사지 석탑 해체 작업의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오판의 결과물,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 터에 가면 언제부턴가 서탑 맞은편에 뽀얀 9층 석탑이 들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1993년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이다. 미륵사에는 원래 목탑과 석탑 2기(동탑과 서탑)가 있었다. 목탑과 동탑은 사찰 건물과 함께 모두 사라졌는데 그 가운데 동탑을 복원한 것이다. 복원공사에는 석재 2700t, 연인원 4만5000명, 공사비 29억 원이 들어갔다. 높이는 27.8m.

그런데 이 탑을 두고 말이 많다. 정확한 고증도 없이 서둘러 복원했기 때문이다. 전체를 모두 뽀얀 화강암, 그것도 새로 가공한 20세기 화강암으로 복원해 놓으니(동탑터 발굴 결과 출토된 옛 부재가 몇 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을 리 만무했다. 1300여 년 전 백제의 고풍스러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아직까지도 “실패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사실 자료도 부족하고 고증과 연구도 부족한 상황에서 9층으로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다. 당시 미륵사지 동탑 복원 자문위원회는 “상당 부분이 무너져 버린 서탑만으로는 미륵사지 석탑의 웅장한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 동탑을 복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불가피한 복원이었다고 강변하지만, 잘못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미륵사터 현장에 가서 보면 동탑의 분위기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저 20세기 현대 석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것도 별 멋없는 석조물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상처 딛고 우리 앞에 선 미륵사지 석탑

백제 무왕이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던 거대 사찰 미륵사. 세월이 흘러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그 광활한 터에 우뚝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 1910년 사진 속에서 그 탑은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1915년 이후 콘크리트에 휩싸인 석탑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1993년엔 동탑을 무모하게 복원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위태로웠던 미륵사지 서탑을 되살리기 위한 해체·보수·복원 공사가 2001년 시작돼 2019년 마무리됐다. 19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해체·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그 외관이 참 특이하다. 뽀얀 돌과 빛바랜 누런 돌이 섞여 있고 탑의 모양이 엉거주춤하다. 탑을 구성하는 4개 면의 경사가 불규칙하다. 어딘가는 빠져 있고 어딘가는 끊겨 있다. 그렇지만 온전한 동탑보다는 훨씬 더 운치가 있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상처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외관의 상처가 이렇게 많은 문화재도 드물 것이다. 비록 상당 부분이 부서지고 훼손됐지만, 그래서 모양새가 참 기이하지만, 우리 전통 석탑 가운데 이렇게 우직하고 장쾌한 탑이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상처를 이겨낸 탑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제 그 상처는 미륵사지 석탑의 진정한 매력이 됐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신동아 2022년 11월호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학대학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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