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호

이념의 재구성 없이 현실로 도피한 86세대 운동권

[최병천, 겹눈으로 보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①

  •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입력2023-03-3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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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L과 PD라는 이념의 자기장

    • 文 정부, 25년짜리 진보 정부

    • 박정희 경제학 vs 민족경제론

    • 20대 때 생각으로 주도권 행사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DB]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DB]

    한국 진보정치의 현대화 작업은 필요한가. 유럽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진보의 현대화 작업이 몇 차례 진행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 논쟁’이다. 영국노동당의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와 앤서니 기든스 등이 주도했다.

    유럽 진보정치 역사에서 ‘제3의 길’이란 표현은 여러 맥락으로 사용됐다. 제3의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1의 길과 제2의 길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스웨덴식 복지국가 역시 ‘제3의 길’로 표현됐다. 전통적인 자본주의 모델과 소련식 공산주의 모델과 차별되는 의미였다.

    더 거슬러 가면, 1890~1920년대까지 지속된 독일 사민당의 ‘수정주의 논쟁’이 있다. 당대 독일 사민당의 신진 이론가로 각광받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수정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수정주의 논쟁’이 시작됐다. 훗날의 시각에서 보면,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내용들은 이후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흐름이 워낙 강했다. 독일 사민당 내부의 ‘수정주의 논쟁’은 베른슈타인의 완패로 끝났다. 이후 독일 사민당은 현실과 이념의 괴리를 겪고, 결국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에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25년짜리 진보 정책 실천하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진보정치 현대화 작업은 왜 필요한가. 크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 문재인 정부에 대한 역사적 업적 및 평가와 연동돼 있다. 둘째,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했는데, 이는 ‘사회과학적 사건’이다. 한국의 사회과학은 진보가 주도했다. 그간 진보는 한국이 ‘뭔가 안 좋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셋째, 20세기적 맥락에서 진보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였다.

    한국의 경우 1980~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 출신 진보파의 압도적 다수는 NL과 PD였다. NL은 민족해방파(National Liberty People Democracy Revolution)의 영어 약자다. PD는 민중민주파(People Democracy Revolution)의 영어 약자다. 도식화하면 NL은 북한 모델을, PD는 소련 모델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20대 때 경험한 것이 평생 지속된다는 ‘세대효과’ 개념에 따르면 1980~90년대 학생운동을 한 한국 진보파는 여전히 NL·PD의 이념적 자기장(磁氣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진보정치의 현대화 작업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연동돼 있다. 문재인 정부에는 숨겨진 업적이 세 가지 있다. ① 25년짜리 진보 정책을 실천한 25년짜리 진보 정부였다. ② 성적표가 나왔다. ③ 성적표를 잘 분석하면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게 됐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25년짜리 진보 정책을 실천한 25년짜리 진보 정부였다는 점이다.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 52시간 근무제, 사회복지 대폭 확대, 탈원전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가 펼친 정책의 대부분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진보 세력이 요구하는 사회경제 정책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실천한 정책의 대부분은 대통령 개인이거나, 친문(親문재인) 계파 생각이거나, 민주당 의원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더 넓게 봐야 한다. 정의당,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주노총, 한국노총 그리고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진보언론의 오랜 주장을 실천한 것이었다. 물론 무조건 잘한 것도 아니고 무조건 못한 것도 아니다. 공과(功過)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韓 선진국 지정, ‘사회과학적 사건’

    둘째,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했다. 이는 ‘사회과학적 사건’이다. 한국 진보는 그간 한국 사회가 ‘뭔가 안 좋게 될 것으로’ 전망해 왔다.

    1965년 박정희가 한일청구권협정(이하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1964년 6·3사태는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한일협정을 반대한 감성적 이유는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비롯한다. 일본과의 수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다. 한일협정을 반대한 논리적 이유는 일본과 교역할 경우 ‘경제적 종속’을 우려한 데 있다. 이는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의 주류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핵심인즉, 선진국과 교역하면 다시 경제적으로 종속될 것이란 걱정이었다. 선진국과 교역을 반대했기 때문에 ‘민족경제론’을 주장했다.

    보수 일각에서는 박정희 세력은 근대화 세력, 재야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를 반대하던 재야 세력도 근대화를 지향했다. 다만,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노선이 달랐다. 박정희 세력은 외자 유치를 통해 투자의 종잣돈을 마련하고, 그렇게 만든 상품을 선진국에 다시 수출해야 한다고 봤다. 그렇게 달러를 벌어 와야 지속적인 투자 → 성장 → 일자리의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경제성장론을 주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출 중심 경제성장론’의 요체다.

    재야 세력의 입장은 달랐다. 외자 유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외자 유치는 경제적 종속으로 귀결되고, 수출 중심 산업화 역시도 경제적 종속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에 있는 민족자본을 중심으로 투자하고 내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경제론’의 요체다.

    박정희 경제학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6가지 특징으로 집약할 수 있다. ① 불균형 발전 ② 외국자본 동원(차관, 외자 유치) ③ 수출 중심 공업화 ④ 대기업 집중 육성(중화학공업화) ⑤ 국제적 가격경쟁력 유지를 위한 임금 상승 억제와 노동3권 탄압 ⑥ 낙수효과론이다.

    박정희 경제학을 비판했던 민주화 세력의 생각에도 6가지 특징이 있다. ① 균형발전 ② 내부자본 동원(민족자본) ③ 내수 중심 공업화 ④ 중소기업 중심 경제발전 ⑤ 임금인상 & 노동3권 적극 보장 ⑥ 분수효과론이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세계사의 시각에서 볼 때, 박정희 경제학은 ‘비주류 이론’이었다. 당시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의 압도적인 주류 이론은 ‘민족경제론’이었다. 민족경제론은 나라에 따라 표현이 약간씩 달랐다. 내포적 공업화 이론으로 불리기도 했고, 수입대체 공업화론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계사의 시각에서 볼 때 박정희 경제학은 ‘이단적(異端的) 이론’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경제학과 유사한 정책을 편 나라가 몇 곳 더 있었다.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다. 이들 나라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수출 중심 공업화 노선을 취했다.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보면 공히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모두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이를테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① 친미 ② 반공 ③ 수출 중심 공업화 노선 ④ 비약적인 경제성장 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훗날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이들 나라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렀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가장 먼저 자극받은 나라는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이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모델 성공에 자극받아 추진됐다. 제3세계의 ‘이단 이론’이던 박정희 경제학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양대 축이던 덩샤오핑에 의해 그 정당성이 입증된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사례는 훗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자유화 물결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동유럽·남미·중동·동남아 국가들이 한국 경제를 배우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승리와 사회주의 붕괴

    셋째, 20세기적 맥락에서 진보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였다. 한국 진보 세력에 사회주의론이 본격 유입된 계기는 ‘1980년 광주’였다. 박정희가 죽으면 군부독재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더 극악무도한 인물이 등장했다. 전두환이다. 저 인간의 정체는 뭘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인간을 몰아낼 수 있을까?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구조적 모순’과 대면하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미국이 갖고 있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미국 동의 없이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의 인식은 1980년 광주의 충격 → 전두환 타도를 위한 이념의 필요성 → 반미 이론의 발달 → 민족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 수용으로 연결된다.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이 붕괴한다. 국내에서는 승리의 기운이 솟구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만들어야 할 세상’이 무너져 버렸다. 그것도 민중의 저항에 의해.

    1990년대 초중반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의 시집과 공지영의 ‘고등어’와 같은 후일담 문학,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게 된 이유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 진보 세력은 사회주의 이론 중에서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맞았는지 이념적 정리를 하지 않았다. 만들어야 할 ‘대안적 사회경제체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갔다. 1980년대 학생운동 주역들은 국회의원이 됐다. 선거에서 ‘표’를 받는 것은 당장 필요한 일이었다. 반면 ‘이념의 재구성’은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관리와 선거로 바쁘듯, 학자가 된 진보파는 학술저널에 논문 쓰는 일로 바빴다. 시민운동을 하거나,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당장의 투쟁으로 바빴다. 모두 제 할 일로 분주했다. 이제는 50~60대가 된 민주화운동 주역들은 ‘이념의 재구성’ 없이 은근슬쩍 현실로 도피했다. 이들은 뉴턴 역학의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과 ‘세대효과’의 지배를 받으며, 20대 시절의 생각으로, 현재 21세기 한국 진보의 주도 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20세기 韓 현대사 3대 트라우마

    20세기 한국 현대사는 3대 트라우마를 동력으로 작동했다. ① 식민지 트라우마 ② 6·25전쟁 트라우마 ③ 광주 학살 트라우마다. 식민지 트라우마는 진보-보수 모두에게 강력한 민족주의를 유산으로 남겼다. 6·25전쟁 트라우마는 보수에게 빨갱이 공포를 유산으로 남겼다. 광주 학살 트라우마는 진보에 군부독재에 대한 분노를 유산으로 남겼다. 근현대사 150년의 아픔은 ‘한국스러운’ 아픔인 동시에 ‘세계사적인’ 아픔이다. 진보정치 현대화 작업은 한편으로는 진보 이념의 재구성 과정이며, 이것은 세계사 재해석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신동아 5월호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②’로 이어집니다.

    신동아 4월호 표지.

    신동아 4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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