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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웃고 있는 렘브란트 야간 순찰

렘브란트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웃고 있는 렘브란트 야간 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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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미국의 한 대학교에 방문학자로 머문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터라 미국 부모들과 이따금 교류했는데, 그때 미국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 국가라는 점을 확연히 느꼈습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개인의 판단과 선택을 중시하는 방식이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다가왔지만, 제겐 이런 개인주의적 인간관계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다소 불안정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공동체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커왔기에 그럴 것입니다.

전통 사회가 공동체를 중시했다면, 근대사회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동양보다, 미국이 포함된 서양에서 개인주의 성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서양이 근대화를 먼저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산업화와 민주화와 함께 점점 더 많은 의사결정과 행동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이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의 두 얼굴

물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가운데 한 가지 방법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두 사고방식 모두 빛과 그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윗세대는 아무래도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우선시하고, 아랫세대는 근대적인 개인주의를 선호합니다. 어른들은 가족이나 회사와 같은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며 기여하기를 바랄 때가 많지만,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최우선으로 하며 자신의 느낌과 취향을 중시합니다.

어른의 관점에서는 개인주의가 이기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주의의 발전은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공동체가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면 억압적 권위주의가 됩니다. 또한 지나친 개인주의 역시 가족 안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협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방식이 적절히 조화된 사회가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담사로서 제가 특별한 관심을 가진 단어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우물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죽고 말았다는 나르키소스의 신화에서 비롯된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자기애’라고도 하며 인간 심리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나르시시즘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됩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자기 삶을 중요시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몰입시키되 타인의 삶도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긍정적인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활력을 주지만, 부정적인 나르시시즘은 자기도 황폐화할 뿐 아니라 옆에 있는 이들도 지치게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런 자기애적 욕구가 그림으로 표현된 형태가 바로 자화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인이 SNS 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방식으로 나르시시즘을 표출한다면 예전 사람들은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남김으로써 자기애를 충족시킨 것이지요.



 ‘자화상의 영혼’

수많은 화가가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화가들을 꼽는다면 알브레히트 뒤러, 빈센트 반 고흐, 하르먼손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1606~1669)를 들 수 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장르를 서양 미술사에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화가는 뒤러입니다. 뒤러가 활동한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는 그저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그는 자의식이 풍부한 자화상을 그려 많은 이에게 자화상이라는 그림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는 예수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고흐는 강렬한 자화상들을 그렸습니다. 자신이 자른 귀에 붕대를 두르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림 속의 그는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광기로 귀를 잘랐지만, 눈빛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놀라운 자화상들에서는 ‘정신적으로 극단의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린다’는, 삶의 의미를 놓지 않는 천재 화가의 열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들과 비교할 때 렘브란트 자화상들은 상대적으로 부드럽습니다. 그가 남긴 자화상이 100점에 달한다고 하니 회화 역사에서 렘브란트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를 찾기 어렵습니다. 질적으로도 탁월해서 그는 ‘자화상의 영혼’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렘브란트는 거의 매년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젊은 시절부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노년기까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고 꾸준하게 화폭에 남겼습니다. 근사하고 화려한 자화상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웃고 있는 렘브란트’라고 불리는 노년의 ‘자화상’(Self-portrait·1665)입니다.

어둠 속에 한 노인이 웃고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기실 허탈해 보입니다. 그런데 허탈해 보이는 그 모습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순수해 보입니다. 삶의 모진 풍파를 겪은 고단한 노년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정과 애정을 쏟는 한 인간을 봤습니다.



‘집단 초상화’, 공동체적 개인주의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잠시 다니면서 교양을 쌓기도 한 그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화가입니다. 견습 화가 생활을 거친 뒤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렘브란트는 20대 때부터 명성을 떨쳤습니다. 일찍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을 뿐만 아니라 사스키아 판 윌렌브르흐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40대 이후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경제적으로 파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힘이 돼준 것은 아들 티투스와 두 번째 아내 헨드리케 스토펠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렘브란트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질병과 경제적 곤궁뿐이었습니다. 화가로서의 명성도 땅에 떨어지는 비극을 맛보게 됐습니다.

저는 렘브란트의 전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도 참기 어려운 비극이 그에게 연이어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쩌다가 젊은 나이에 이미 정점을 찍은 천재 화가에게 이런 삶의 비극이 주어졌을까요. 그러나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렘브란트가 이런 절망의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렘브란트’ 같은 자화상을 그려낸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끝까지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요. 이 놀라운 자화상을 보면 렘브란트는 그 어떤 순간에도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야간 순찰’(The Night Watch·1642)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렘 반 라위텐뷔르흐의 민병대’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민병대의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와 대원들이 작품의 제작 비용을 모금해 렘브란트에게 의뢰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소개하는 까닭은, 렘브란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큰 작품이기도 하지만, ‘집단 초상화’라는 특별한 구성으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그림에서 개인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집단도 강조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와 빌렘 반 라이텐뷔르흐 중위가 그림의 중앙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 역시 자신의 개성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포즈를 취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의미 없이 배치하던 관습을 깨고 역동적인 구성을 도입하는 혁신을 통해 개개인의 다양성을 살려냈습니다. ‘웃고 있는 렘브란트’가 개인주의의 심리적 차원을 생각하게 해준다면, ‘야간 순찰’은 개인주의의 공동체적 차원을 주목하게 합니다.



한 가지 정답은 없다

오늘은 사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중학교에 막 입학한 제 아들은 겉보기엔 외향적이나 실은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니 저는 매사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틈만 나면 모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고 학급에서 활발하게 잘 어울리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저를 불안케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던 중에 저희 아이가 혼자 있을 때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의 많은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왜 자주 혼자 있는데?” “너 혹시 왕따니?” “새 학교에 적응이 어렵니?” 등등의 질문들을 연이어 쏟아냈습니다.

참던 아이가 결국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난 친구들과 너무 못 지내고 싶지도 않고, 너무 잘 지내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나답게 살고 싶어요. 왜 내가 혼자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정말. 이런 식이면 행복하게 학교 못 다니니까 더 이상 질문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친구 한두 명과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니까 억지로 많은 친구와 다니라고도 하지 마세요. 저 왕따도 아니고, 외롭지도 않아요. 정말 어른들은 왜 이러는 걸까.”

사춘기 소년의 부모가 되면서 저는 개인주의냐 공동체주의냐, 나르시시즘이냐 네트워크냐의 질문에서 한 가지 정답이란 결국 없다는 것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제게 말해준 것처럼, 저 역시 아들에게 ‘힘든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집단 안에서 너만의 포즈를 취하면서 잘 어울리도록 노력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신동아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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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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