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그는 왜 국회 대신 화장실로 갔을까

‘강남역 10번 출구’가 보내는 시그널

  •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nylee@cau.ac.kr

    입력2016-06-23 11: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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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력 필리버스터’…그들의 아픔이 ‘소환’됐다
    • ‘혐오’는 구조적 차별에 대한 성찰 요구하는 말
    • 시간 걸리더라도 공존하는 사회구조로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에서 한 젊은 여자가 죽었다. 어쩌면 내가 갔었을, 앞으로도 가게 될 공간에서 한 남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그 남자의 살해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해서”였다고 한다.

    이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발화한 추모 열기가 강남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됐고, 릴레이식 ‘성폭력 경험 나누기’가 강남역을 비롯해 온·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됐다. 놀라운 것은, 경찰이 ‘조현병 환자에 의한 살해사건’으로 결론지었음에도 시민 상당수가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에 기반을 둔 살인’이라 명명했다는 점이다.   



    “네가 나를 무시해?”

    나는 이 사건을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혐오 문화가 배태한 여성 살해의 한 형태로 본다. ‘무시’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무시는 행위다. 많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시한다. 자기 의사를 조금만 표현하면 “여자가 뭘 안다고…” 하며 소리 치고 윽박지른다. 그래도 어머니는 “무시당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한 마디만 해도 “네가 나를 무시해서 그래?”라며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언어화한다.



    남자들은 아버지, 상사, 선배 등으로부터 훨씬 많은 폭력의 대상이 되지만 “무시당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고 화를 내며 증오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냥 참는다. 교수는 학생에게 “네가 나를 무시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학생은 그러지 못한다. 무시당했다는 느낌, 그에 동반되는 굴욕감, 언행을 통한 분명한 대응(reaction)은 적어도 권력관계가 동등하거나 대개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는 행위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발단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을 일상 속에서 무시해온, 무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무의식적 리액션에 있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그 남자는 평소 수많은 남성으로부터 더 많은 무시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비가시적이지만 구조적인 차별에 많은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피의자가 “평소 여자들이 무시해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내가 무시해 마땅한 너(여자)가” “감히 나(남자)를 무시해” “그러니 내가 화내는 건 당연해”라는 생각의 다른 표현이다.

    표현은 우월적 지위의 상징이자 도구다. 사회적 약자인 남성에게도 모든 여성은 상대적 약자다. 그가 청와대나 국회 앞으로 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여성이 오기만을 기다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로서 여성혐오(misogyny)는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모든 구성원이 체화한 관습이다. 여성혐오는 일상 속에서 늘 일어나는 아주 교묘한 방식의 성차별주의에서부터 극단적이고 집단적인 강간과 살해까지 포괄한다.

    성차(性差)를 강조하고 성별 구분에 따른 행위규범과 노동분업을 당연시하는 관행부터 노골적인 조롱, 멸시, 비하, 비인간화, 성적대상화, 배제, 위협 등으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부터 제도화한 차별과 물리적 폭력까지 광범위하다. 제노사이드, 집단강간, 연쇄살인, 성폭력, 데이트강간, 아내 구타, 학대, 영아 낙태와 살해, 성매매와 인신매매, 음란물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는 마치 공기처럼 누리는 특권 같아서 여혐은 의도나 동기조차 필요 없을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개인이나 집단의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의지적으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혐 문화 속에서 상대적 약자는 불안하고 불편하며, 분노하고 공포스럽고, 상처받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지만, 상대적 강자는 유사한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하기 어렵다. 이러한 혐오 문화는 상대적 약자가 저항을 시작해야만 비로소 수면으로 떠오른다.


    잘못된 프레임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심하던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없었다면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혐오 현상이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까. 성적소수자 탄압에 항거하기 위한 퀴어 축제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이고 성소수자 혐오 문화가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약자들의 항거가 있기까지 상대적 강자는 자신들이 약자를 억압하거나 조직적으로 차별한다고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혐오’는 구조적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요구하는 언어다.

    여성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살해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미국의 여성학자 다이애너 러셀이 지적하듯 “여성(female)이라는 이유로 살해하는 남성들의 범죄”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 주체의 지배 유지를 위해 여성 타자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도구 중 하나이기에 개별적으로 볼 땐 ‘커다란 의도조차 필요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여성 살해다. 의도도 의지도 필요 없지만 기다려서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며, 가해자는 단지 여성으로부터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류 언론은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 대(對) 여성혐오 범죄라는 이분법적 틀에 머물렀다.  추모 현상과 관련된 내용을 남성혐오 대 여성혐오라는 구도로 포착하면서 남녀 갈등, 성 대결 양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일부 남성들 또한 “조현병 환자에 의한 특수한 사건”이라 규정하고 “우리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며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여성을 비난하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조현병과 여성혐오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사회문화가 ‘병(病)’을 규정하듯, 망상도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자주 발현되는 망상이 흑인혐오 문화와 무관하지 않듯, 성차별적 사회에서 구성되는 여성에 대한 망상은 여성혐오 문화와 완전히 분리되기 어렵다.



    정형화한 젠더 이데올로기

    남녀 간 갈등 구도로 보는 것 또한 문제다. 갈등은 적어도 동등하다고 믿어지는 관계에서 발현된다. 남녀는 동등하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오랫동안 여성은 상대적 약자였다. 최근에야 여성들은 아주 약간의 권리를 보장받았을 뿐이다. 우월적 위치의 남성들이 그간 누린 특권에 대해, 아니 이로 인해 유발되는 피해에 대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집단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남성들이 만약 ‘여성혐오’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들이 평소 인지하지 못하던 특권들, 이에 기반을 둔 언행들을 ‘처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그나마 인정조차 못하겠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방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에 깊게 각인된 여성혐오의 증거 아닌가.

    따라서 경찰과 정부의 태도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 3개월간 여성범죄대응 특별 치안활동, 남녀화장실 분리, 비상벨, CCTV 설치 등 근시안적이고 제한적인 대책 말고도 범죄위험 정신질환자 및 알코올중독자를 분류·관리·행정입원 조치하고 강력범죄자 처벌 및 보호관찰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은 실망스러움을 넘어 놀랍다.

    일상의 다양한 여성 폭력의 현실을 외면한 채 ‘위험 인물’만 통제 혹은 제거하면 된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특수한 자의 예외적인 사건이자, ‘비정상적인’ ‘환자’ 혹은 ‘일탈자’의 행위로 축소해 차별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애초에 봉쇄하기 위함인가. ‘어쩔 수 없는 불운’에 의한 피해임을 암시함으로써 여성들의 취약함과 무력감을 강조해 여성의 불안감 증폭과 의존성 강화를 의도함인가.

    의도가 무엇이든 경찰과 정부는 정형화한 젠더 역할과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미 사회적 고립으로 심각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고 혐오를 재생산하는 통로가 됐다. 이것이야말로 성차별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주류 남성의 시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공감으로, 행동으로

    벽을 뒤덮은 수많은 포스트잇에 또박또박 새겨진 추모의 언어들,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외치는 성폭력 경험의 릴레이 고백 현상, 이를 지켜보고 공감하는 시민들. 강남역 10번 출구는 사실 여자인 내 몸 곳곳에 새겨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자 해석의 과정이며, 어쩌면 미래에 닥칠 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과정이기도 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고, 배제당하고, 차별받으며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강간당하고 죽어왔지만, 표현하지 못한 나, 그녀들의 경험이 소환되는 자리였다.

    이들이 창출해낸 대안적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느끼는 불편함은 역설적으로 여성 살해, 여성 폭력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도 보편적인 것이며, 그러한 구조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대한민국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갔었을, 갈 수 있을 강남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이 ‘일반’ 여성들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던 불안과 공포, 경험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표현은 사실 “나도 당할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나도 피해자였다”는 여성 공통의 경험을 의미한다.

    여성들은 지난 10여 년간 온라인 공간에서 횡행해온 폭력적 여성혐오의 실질적 피해자이자 제도적 여성차별을 부인하는 허구적 역차별 담론의 피해자다. 사회적 죽음을 목도했으되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세월호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침묵하던 피해자에서 공감하는 청중으로 거듭나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고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는 가해자에 대한 가중처벌 요구나 개인과 집단에 대한 혐오 표출의 장이 아니라, 성차별적 구조를 직시하고 사회 전반에서 장기적 대책을 마련하라는 여성들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여성들이 이번 살해사건을 ‘여성혐오’라고 명명한 것은 여성들이 당하고 있는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물리적 폭력이 비가시적인 거대하고 구조적인 폭력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적시다.

    또한 이 둘 간의 연결고리로 존재하는 불평등한 젠더 질서에 대한 대중적 인지를 요청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협소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이해되던 여성혐오란 용어를 꺼내야만 성차별적 사회에서 ‘죽은 자, 죽을 자, 죽을 수 있는 자’와 비대칭적 위계관계에 있는 ‘죽인 자, 죽일 자, 죽일 수 있는 자’의 위치를 또렷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존을 위한 투쟁

    누군가에게는 삶이 불가능한 사회,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 안전마저 불공평하게 배분되는 사회, 이들에 대한 애도마저 힘든 사회에서 여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공존을 위한 전반적인 인식 및 문화의 변화, 포괄적 사회구조의 변화다. 이미 쪼그라든 가부장제의 잔여물을 붙들고 있어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거대한 부정의(不正義)에 맞서 공존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라는 권유다.

    사회정의 프로젝트로서 ‘강남역 10번 출구’가 보내는 시그널은 그렇게 의미화하고 확장될 것으로 믿는다.

    이 나 영


    ● 미국 메릴랜드대 박사(여성학)
    ●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 한국여성학회 편집위원장, 한국문화사회학회 편집위원장
    ● 現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및 논문 : ‘젠더와 사회’(공저)  ‘성매매 비범죄화를 위한 시론’ ‘한국사회의 중층적 젠더 불평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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