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명사 에세이

사진이 열어준 세상

  • 박찬원 | 사진작가, 前 코리아나화장품 사장

    입력2016-06-20 15: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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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은 예술사진 작가다. 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 목표다. 기업에서 은퇴한 후 3년간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나는 69세에 예술대학원에 들어가 순수사진 전공으로 조형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간 예술대학원은 가시밭길이었다.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미 대학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 덕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고려원북스)라는 책도 썼다. 사진, 예술에 대한 수업기이지만 낯선 이방인의 여행기 같은 책이다.

    사진을 늦게 시작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전략은 ‘한 주제를 잡고 100일 촬영하기’다. 더욱 성숙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배수진을 친 것이다. 100일 촬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1주일에 한 번 출사(出寫)를 한다고 치면 100일 촬영을 하기까지 2년이 걸린다. 돼지 사진도 지난해 8월부터 올 3월까지 매주 2박3일 양돈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이 작전은 의외로 효과가 컸다. 사진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졌다. 사진 기술도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양돈장에서는 갓 태어난 새끼 10여 마리가 어미젖을 물고 잠든 모습을 가장 많이 찍었다. 어미와 새끼가 생명을 나누고 영혼을 교감하는 광경이 신비로웠다. 넓게도 잡고 클로즈업해 찍기도 했다. 둥그렇게 부푼 돼지의 젖은 사람의 젖과 비슷했다.





    어미 돼지 젖과 어머니 젖

    어느 날 어미젖을 가만히 보니 상처투성이였다. 새끼들이 젖을 빠는 힘은 의외로 강하다. 새끼들의 이빨에 찢겨 나간 젖도 있고 새끼들에게 물어뜯겨 곳곳에 피가 흐르는 젖도 있었다. 그래도 어미는 아픔을 참으며 모른 척 젖을 내주고 있었다. 젖은 희생이었다.

    카메라를 바닥에 붙이고 위로 올려다보니 젖통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 같은 모양새였다. 새끼들이 파파야 열매 같은 젖통에 달려들어 줄줄이 빨았다. 젖은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수, 생명의 나무란 생각이 들었다. 젖을 물고 잠든 새끼들은 둥지나 동굴 속에서 평화롭게 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수명이 다돼 도축장으로 가는 어미 돼지의 젖을 봤다. 쭈글쭈글 비틀어지고 상처가 메말라 딱지 진 젖이다. 7년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젖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렇듯 사진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해준다.

    사진은 못 듣던 소리도 듣게 해준다. 돼지는 꿀꿀거리지 않는다. 돼지가 내내 시끄러운 것도 아니다. 잠을 많이 잔다. 밥을 먹을 때 가장 시끄럽다. 사료 통에 몰려들어 “꿱꿱꿱”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다툰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이때는 뜯어말려도 소용없다. 잠을 자다가도 돈사 문을 열면 화들짝 놀라 “뀍 뀍” 소리를 지른다. 경계 신호다.

    그러나 잠시뿐, 사람이 들어가면 살금살금 다가와 장화를 물어뜯고 기어오른다. 침입자를 저울질해보는 인사법이다. 진짜 놀라거나 위협을 느낄 때는 “뀌기 깃~” 하면서 금속성 비명을 지른다. 주사를 놓으려고 돼지를 붙잡을 때 이 소리가 나온다. 싸울 때는 “꿰엑꿰엑” 하고, 발정이 났을 때는 “뀌이~익 뀌이~익” 하고, 혼자서 이야기하거나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는 “꿀꿀꿀” 한다. 진짜 아프거나 죽어갈 때는 소리도 못 지른다. “그르렁 그르렁” 신음을 낼 뿐이다. 돼지의 소리는 본능이다. 꾸밈이 없다.



    차곡차곡 쌓인 ‘사진 생각’

    사진은 냄새도 바꿔준다. 촬영이 끝난 후 3개월이 지났는데도 카메라에서는 돼지 냄새가 진하게 난다. 모른 척했지만 여행을 떠난 버스 안에서도 사람들이 내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카메라와 장비에 돼지 냄새가 묻어 나왔다. 아무리 닦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젖 사진을 찍을 때는 돼지 똥이 깔린 바닥에 얼굴을 대고 렌즈를 들여다봤는데도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곁에 있으니 돼지도 긴장한 듯 쏴 하고 오줌을 누는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한여름 폭포 옆에 갔을 때 물보라가 퍼지듯 오줌폭포, 오줌보라가 쏟아진다.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튄다.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되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되뇐다. 그러나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다. 오줌 누는 동안은 돼지가 움직이지 않아 사진이 잘 나온다. ‘오줌보라를 흠뻑 맞아도 좋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주문을 왼다.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

    종일 돼지와 살다 보면 돼지와 말이 통한다. 어미젖을 뗀 지 열흘 정도 된 아기 돼지들도 내가 우리에 들어가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달려든다. “안녕, 오늘은 너희들과 지낼 거야. 잘 도와줄 거지?” 내가 먼저 인사한다. 카메라와 라이트를 설치하고 1m 정도 앞에 줄을 그어놓는다. “아가들아,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돼!” 선언한다. 그래도 돼지들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살금살금 선을 넘어온다. 그러면 장갑이나 모자를 흔들어 쫓아낸다. 잠깐 방심하면 라이트를 설치한 삼각대까지 물어뜯는다.

    한번은 돼지들이 잠자는 모습을 찍고 싶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모두 함께 잠들어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돼지들은 보통 먹는 시간 빼고는 계속 잠을 자지만 내가 있으니까 좀처럼 잠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끈질기게 기다려볼 참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모두 바닥에 편히 누워버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옆에 놓아둔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살그머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일어났다. 돼지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했다. 드디어 모든 돼지가 잠들어 있는 사진을 찍었다. 겨우 잠든 돼지들이 깰까 봐 나갈 수가 없어 조용히 앉았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반복해 보며 돼지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사진 생각을 만들어줬다.



    사람을 보는 돼지의 시선

    6, 7월에 걸쳐 두 번의 돼지 전시(서울 문래동 ‘이포’, 불광동 ‘혁신파크’)를 한다. ‘꿀 젖 잠’이라 이름을 붙였다. 돼지를 통해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고 나를 비춰보는 전시다.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다. 생명의 신호일 수도 있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젖’은 생명이다. 전생과 현생을 이어주는 물리적 연결고리다. 삶의 의미, 가치를 알려준다. ‘잠’은 영혼이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 같다. 전생, 현생, 내세를 넘나든다. 사람이 돼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사람을 본다. 신기한 눈, 기이한 눈, 측은한 눈으로 사람을 본다. 탐욕, 시기, 상처로 가득한 사람을 본다. “꿀꿀꿀 끌끌끌~” 돼지가 안타까워한다.

    여름은 돼지에게 가장 좋은 계절이다. 병도 잘 없다. 무럭무럭 잘 자란다. 올여름에는 돼지들과 함께 한판 신나게 놀아야겠다.

    박 찬 원


    ● 1944년 서울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 졸업
    ● 코리아나화장품 사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現 사단법인 CEO 지식나눔 컨설팅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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