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뭘까.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1980년대 광주를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그린 ‘소년이 온다’ 를 논문을 통해 되짚어봤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등 4편이 실린 데 이어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으로 등단해 단편집 ‘여수의 사랑’(1995) ‘내 여자의 열매’(2000) ‘채식주의자’(2007) ‘노랑무늬 영원’(2012)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소년이 온다’(2014),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흰’(2016)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작품을 써왔다.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뿐 아니라 1980년대의 광주를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최근작 ‘소년이 온다’ 등을 되짚는 것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고민하는 일이다.
한강의 작품에서 일관된 주제는 ‘폭력 세계’다.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제, 남성, 문명의 폭력을 드러내며, ‘소년이 온다’는 국가적·정치적인 폭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문학 안에서의 능동적인 저항을 보여준다. 어쩌면 문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이렇게 세계의 폭력을 비판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물로 변신하기
한강의 문제의식은 그의 작품에 대한 학술논문이나 학위논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한강을 다룬 논문 중에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 주목한 경우가 많다. 이들 논문은 ‘채식주의자’를 에코페미니즘이나 욕망과 연결해 해석하고,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광주를 애도하거나 반대로 광주를 증언할 수 없다고 본다. 필자는 이 글에서 두 작품을 다룬 논문에 집중해 한강 작품의 의미를 짚고, ‘감정의 증언을 통해 한강 소설을 읽는 법’을 살펴본다.한강의 소설에는 육식으로 나타나는 폭력적인 세계를 비판하기 위해 식물로 변신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온몸에 푸른 멍이 드는 것으로 시작된 식물로의 변신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연작(連作)으로 이뤄진 ‘채식주의자’에서 정점을 이룬다(‘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은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아내이고, ‘채식주의자’ 연작 소설의 주인공은 영혜다).
김순옥의 논문에서는 ‘내 여자의 열매’가 전통적인 결혼제도, 아파트로 상징되는 획일화한 도시, 부부 간 소통의 부재, 오염된 환경 등의 폭력 때문에 아내가 식물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김규연도 식물이 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자연과 관련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채식주의자’에서는 육식하지 않으려는 영혜가 가족과 부딪치며,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몽고반점에서 영감을 얻은 형부가 몸에 꽃을 그리고 영혜와 관계를 맺는다. ‘나무 불꽃’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가 먹는 것을 거부하면서 점차 식물이 되는 과정을 언니 인혜가 관찰한다.
영혜가 식물이 돼가는 과정을 에코페미니즘(환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사상을 통합한 생태여성론)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여성, 문화·자연, 정신·육체, 이성·감성으로 대립되는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지배에서 벗어날 때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더 풍부한 회원 전용 기사와 기능을 만나보세요.
모독하지 않고 고통 증언하기
심영의는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주체가 민초나 민중, 무장시민군 등의 정치적인 이름이 아니라 사건을 겪은 개인의 감정이 모인 ‘집합적 감정’이라고 말한다. 동호, 은숙, 선주 등 소년과 소녀들이 도청으로 간 것은 저항의식 때문이 아니라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남은 자에게는 증오와 복수뿐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경험을 통해 연대의 감정도 나타난다. 조연정도 애도를 통해 사건이 종료되는 것을 거부하고, 슬픔의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고통을 함께 겪는 것과 연관된 ‘공감’은 ‘채식주의자’에서는 찾기 힘들다. 이귀우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와 인혜가 같은 약자로서 진정한 공감을 한다고 해석했는데, 인혜는 자신을 영혜와 동등하게 놓지 않고 영혜를 관찰하면서 ‘이해’하므로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감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진정한 공감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양현진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공감을 증언한 것은 긍정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인공인 그녀는 죽어가는 백구를 안음으로써 백구의 고통을 느낀다. 이는 죄의식 혹은 동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실명한 그가 소리로 느낀 병원을 설명하고,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이를 들은 뒤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는데 이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폭력의 세계에 놓인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들도 언어라는 폭력의 세계를 살아내는 인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다. 한강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서 신샛별은 작가가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로서의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이분법을 넘어서
한강도 인터뷰에서 다른 이의 고통에 몸을 기울이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작가가 말한 것처럼 폭력적인 세계에서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일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을 이어가는 한강의 소설과 더불어, 한강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은 진행 중이다.한강의 소설은 이분법을 넘어서 볼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식물로 변신한 영혜가 동물의 성격도 가졌다고 보는 시각 또한 그에 해당한다.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동박새를 물어뜯고, ‘몽고반점’에서는 몸에 그린 꽃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 강지희는 이를 ‘동물적인 식욕과 성욕을 보존하고 있는 기이한 식물의 몸’이라고 말한다. 김미현도 육식성을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우미영도 영혜는 식물도 동물도 아닌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죽은 정대의 ‘혼’을 통해 광주를 증언할 때 육체와 정신의 대립을 넘어선다. 죽은 사람은 증언할 수 없지만, 상황을 가장 잘 증언할 수 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이다. 혼의 증언들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리얼할 수 있다.
동호가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소년이 온다’ 12쪽)라고 질문하는 것은 몸과 분리될 수 없는 혼이 어떻게 광주를 증언하는지 보여준다. 고문 때문에 혼이 없는 몸으로 살아남거나, 이미 죽어서 몸이 없는 혼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느 쪽의 고통이 더 무거운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니 몸과 혼의 우열을 가리는 것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동호를 모독할 수 없도록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에필로그의 말처럼, 이들의 고통을 잊음으로써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함으로써 증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