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만 명 찾은 창업지원센터 ‘마루180’
- 6000억 기금, 창업·취약계층 지원
- 기업가정신과 섬기는 리더십
아산(峨山)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남긴 말이다. 그의 도전·창조 정신을 계승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확산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는 아산나눔재단이 창립 5주년을 맞아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산재단을 이끄는 인물은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총장 재직 시절 창의와 실험정신으로 대학의 면모를 크게 바꾼 그가 지난해 말 이사장을 맡아 재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초기 창업자들의 입주 공간인 마루(MARU)180을 아세요? 꿈을 실현하는 곳이라 거기서 만나는 청년들 얼굴이 다 밝고, 아주 활기가 있어요.”
86개 스타트업 지원
이경숙 이사장은 아산재단 창업지원센터 소개에 신바람이 났다. 재단의 본부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북촌로에 있지만, 재단의 설립 취지를 이행하고 관련 활동이 실제로 이뤄지는 대표적인 곳이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마루180이다. 2014년 4월 개관해 그간 86개의 스타트업을 지원했고, 1900억 원의 간접투자 효과를 창출했다. 방문객은 33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아산재단은 사업화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자를 위해 마루180에 ‘사업 공간’을 제공한다. 선정된 업체는 최장 18개월까지 창업 지원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이곳을 통해 성장한 플리토(번역 플랫폼 운영), 드라마앤컴퍼니(명함 관리 앱 개발), 망고플레이트(맛집 검색·추천 서비스 제공) 등은 특히 장래가 촉망되는 스타트업이다.
요즘 재단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기업가정신 확산, 청년창업 지원, 사회 혁신을 통한 취약계층 지원 등 크게 3가지. 마루180뿐 아니라 청소년 기업가정신을 교육하는 히어로스쿨, 인문교육의 산실 아산서원, 경영학 교육용 사례집 ‘아산 기업가정신 리뷰’, 예비 창업자를 발굴하는 정주영 창업경진대회, 정주영 엔젤투자기금 등이 아산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한 대표적 프로그램이다. 또한 사회 변화를 위한 지원 사업으로 비영리기관 현장 경험을 돕는 아산 프론티어 유스, 소셜 섹터의 차세대 리더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펠로우십, 비영리기관 지원 프로그램 파트너십 온 등이 있다.
창업지원 사업 중에선 정주영창업경진대회가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올해로 5회째인데, 전국에 창업문화를 확산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예비 창업자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이다. 꿈을 실어주는 스타트업 창업자 강연,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전문가 멘토링, 시장에서 사업에 성공할 가능성을 투자자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는 결선대회 등이 6개월간 진행된다.
창업경진대회 50대 1
“올해는 유관 협력기관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기관들의 협력으로 교육과 멘토링 수준을 더 높였어요. 또한 이미 스타트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강사로 나서고 있죠. 결선은 8월에 치러집니다.”올해 창업경진대회에 지원한 팀은 528개. 결선대회에서 5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최종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난 4년간 평균 경쟁률은 31대 1. 해마다 지원팀이 늘고 있다. 2012년 첫 대회 이후 지금까지 37개 팀이 발굴됐다. 이 대회 출신 팀들의 사업 지속률은 76%. 이런 성과에 힘입어 아산나눔재단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 창조경제대상 공헌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스타트업들이 경진대회에서 입상하고 마루180에 입주하면 성공의 길로 간다고 여기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합니다.”
아산재단의 정주영 엔젤투자기금은 스타트업 초기 자금을 제공한다. 기금 규모는 1000억 원. 2012년 2월 이후 이 기금을 받은 업체는 304개. 기금 수혜는 그 자체로 업체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는 것이라 수혜 업체는 다른 곳에서도 투자를 유치하기가 수월해진다. 재단에 따르면 기금 수혜 뒤 투자금이 평균 10.8배 늘어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재단이 집중하는 또 하나의 일은 ‘아산 기업가정신 리뷰(AER, Asan Entrepreneurship Review)’ 제작이다. 한국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중견기업의 전략 마케팅 인사 등의 분야를 경영학 이론과 함께 다루는 대학(원) 교육용 사례집이다. 그동안 락앤락, 카카오, 이지팜, 쏠리드 등의 기업 사례 10여 건이 소개됐다.
“우리나라 대학에선 토론식 수업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 AER은 그런 수업의 교재로 쓸 수 있을 만큼 훌륭합니다. 경영학과 교수들이 AER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AER이 대학생과 교수들에게 필요한 작업이라면, ‘히어로스쿨’은 초·중·고교생들을 위한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젝트다. 2018년부터 국내 초·중·고교에 기업가정신 교육이 정규 과목으로 도입될 예정이라 이 프로젝트의 가치는 더욱 크다.
“기업가정신 과목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으면 여느 교과과정의 하나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학생들이 기업가정신을 경험하고 체화하는 데 적합한 학습 모델을 찾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재단에선 대학생 강사들을 길러요. 저희 재단에서 몇 주간 교육을 받은 강사들이 2개월간 1인당 25~30명의 청소년을 가르치게 됩니다. 기업가정신이 우리 사회에 확산돼야 젊은 사람들이 꿈을 갖고 우리 사회의 성장동력을 키워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영리기관 혁신 도모
아산재단이 다른 재단과 눈에 띄게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비영리기관의 성장과 혁신을 도모하는 데 있다. 비영리기관에 대한 맞춤형 재정지원, 교육과 컨설팅 등을 통한 비재정적 지원 시스템을 갖췄다.“사회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을 위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하고자 하는 비영리기관 10곳을 선정해 연 2억 원씩 지원합니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를 통해 재교육을 받은 비영리기관 직원은 119명입니다. 이들은 6개월간의 교육을 통해 실무 경험을 쌓습니다. 아산 프론티어 펠로우십에 선정된 이들은 미국 비영리기관에 파견돼 1년간 근무하고 옵니다. 대한민국의 NGO 문화를 바꿀 이들을 위해 연간 4000만~5000만 원씩 지원하는데, 현재까지 10여 명이 이 혜택을 봤습니다.”
재단은 이 밖에도 외부 기관과의 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글과 업무협약을 통해 구글캠퍼스서울에 입주하는 벤처기업들을 재단에서 심사한다. 4월 21일엔 에어비앤비와 비영리기관·스타트업 역량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협약을 통해 국내 비영리기관 종사자, 초기 기업, 예비 창업가의 해외 숙박 지원이 이뤄지게 됐다.
“기업가정신은 철학”
▼ 재단의 연간 지원 예산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곳에 쓰입니까.“초기 기금은 6000억 원인데, 자산운용과 이자 등으로 100억 원 정도의 연간 예산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0%는 청년 역량 강화와 창업 지원에, 70%는 취약계층 지원 등에 사용합니다.”
▼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흔히 기업가정신은 기업인에게만 필요한 것 아니냐고 오해하는데요. 저는 기업가정신이 인생과 사회에 대한 태도나 철학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빨리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전하는 태도가 바로 기업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숙 이사장은 아산 정신을 5C로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정신(Can-doism), 도전정신(Challenge), 창의성(Creativity), 신뢰(Credibility), 헌신(Commitment)이다.
“아산의 브랜드처럼 돼 있는 말이 ‘해봤어?’ 아닙니까. 그 속에 굉장한 도전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소떼를 몰고 방북한 것에서 창의성을 볼 수 있고요. 사업을 수주하면 손해가 나도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병원이나 나눔재단 설립 같은 것은 사회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정신은 우리 시대 모든 리더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 아산나눔재단과는 언제부터 인연이 시작됐습니까.
“제가 숙명여대 총장(1994~2008)으로 있을 때 정주영 회장님을 몇 번 뵈었지요. 2005년부터 10년간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로 활동했고요. 그러면서 자연히 그분의 기업가정신을 잘 알게 됐지요.”
▼ 총장 이임 이듬해인 2009년엔 한국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는데, 어디에 특히 역점을 뒀는지요.
“저는 정말 고맙게도 평생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장학재단은 200만 명의 대학생과 400여 개 대학을 지원하는 기관이라 그곳 이사장으로 일하는 건 의미가 남달랐지요. 기초생활수급자 자녀는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하는 등 소득분 위에 따른 장학금 차등 지급 시스템을 만들었고, 학자금 대출금리를 7~8%에서 2%로 끌어내려서 학생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사회 저명인사 400여 명을 멘토그룹으로 만들어 대학생들에게 1년 계약으로 멘토링을 하게 한 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 14년간 재임한 숙명여대 총장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이 대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합니다. 요즘은 어떤 식으로 숙명여대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지금도 ‘이사장’보다 ‘총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제 전공이 정치학인데, 리더십을 부전공으로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부전공이 전공처럼 됐습니다. 2000년부터 숙대 학생들의 멘토링을 해왔는데, 지금은 일부 교수들에게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남북하나재단의 이사여서 탈북자들에게도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동독 출신의 메르켈이 독일 총리가 됐듯이, 탈북자 중에서도 우리 사회 리더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하려는 겁니다.”
“섬기는 리더십 절실”
▼ ‘신동아’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즐겨 읽는 매체입니다. 바람직한 리더십 모델을 한 가지만 꼽아본다면.“갈등하고 분열하는 지금 우리 사회엔 섬기는 리더십이 절실합니다. 지금은 1인 창작, 1인 창업, 1인 CEO 시대로 가는 문명사적 전환기입니다. 권위주의 시대는 지났고, 사람들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중요한 때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동기부여를 하는 리더십이어야 우리 사회도 더 성숙할 수 있을 겁니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만 리더가 되라는 거죠. 그래야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재단에선 20대 직원도 모두 ‘매니저’라 부릅니다. 모두가 존중받으며 책임의식을 갖고 스스로 결정해서 일하는 문화입니다. 섬기는 리더십이 실현되는 조직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