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손기정 우승 80주년 특별기획

총도, 칼도 없이 민족명예 위해 싸워보라!

마라톤 개척자 권태하의 ‘스포츠 독립운동’

  • 김희찬 |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 gomappa10@gmail.com

    입력2016-07-01 14: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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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만능 코치’
    • 손기정보다 4년 앞서 올림픽 마라톤 출전
    • 충주만세운동 불발…“마라톤으로 세계 제패하자”
    • “일본에 당한 멸시에 저항”
    1시간 12분의 질주 끝에 반환점을 막 돌아 나오는데 귓전을 따갑게 스치는 고함소리는 분명 우리말이었다. “기정아! 4분 전에 자바라가 달아났어.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그놈 잡아야 돼.” 언제 어떻게 그곳에 와 있었는지 권태하 선배가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퍼붓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나는 권 선배의 말대로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자바라를 제치고 선두에 나섰다.

    -손기정, ‘그때 그 일들’, 동아일보 1976년 1월 1일자



    올해는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지, 그리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정간되고 ‘신동아’가 폐간된 지 꼬박 80년이 되는 해다. 울분의 시절, 손기정의 금메달과 그의 가슴팍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의 기개는 움츠렸던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러나 여기 잊힌 사람이 있다. 손기정보다 4년 앞선 1932년 한국인 마라토너 최초로 올림픽(미국 LA올림픽)에 출전했고, 일찍이 손기정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했으며, 미국에서 익힌 선진 마라톤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했고 1936년 베를린으로 건너가 현장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를 적극 지원한 권태하(權泰夏·1906~1971)다. 권태하의 고향(충북 충주) 후배이자 육상 동료로 역시 베를린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정상희(鄭商熙·1907~1981)도 그와 함께 잊힌 인물이다.



    손기정·남승룡 지원작전

    일본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조선인 선수를 여럿 출전시킬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4년 전 LA올림픽 마라톤에 일본인 쓰다(津田)와 조선인 권태하, 김은배 세 선수를 출전시켰는데, 쓰다가 5위에 그치자 그 패인을 두 조선인 선수에게 돌렸다. 두 선수가 일본의 작전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6년 5월 일본은 베를린 본선에 나갈 3명의 선수 선발과 관련해 ‘손기정은 지난해 세계기록을 경신했으므로 최종 선발전에서 2위를 해도 출전시키지만, 남승룡은 1위를 못하면 탈락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회의에 참석한 정상희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손기정과 남승룡이 머물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방법은 하나일세.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군이 1등, 손군이 2등을 해야만 하네.”

    최종선발전. 두 선수는 최선을 다했다. 손기정은 속도를 늦췄다, 높였다 하며 일본 선수들의 페이스를 무너뜨렸다. 결국 남승룡이 1위, 손기정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다시 2명의 일본 선수를 포함해 4명을 베를린 현지에 파견한 뒤 그곳에서 재차 예선을 치러 본선에 나갈 최종 3명을 가리겠다고 말을 바꿨다.

    문제는 또 있었다. 4년 전 LA올림픽 마라톤 실패 책임을 조선인에게 씌운 쓰다가 마라톤 코치였다. 이에 당시 만주에 머물던 권태하가 원거리 사격에 나선다. 그는 ‘실력 있는 전문 코치가 없고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가 부족한 것이 4년 전 마라톤 실패 원인’이라는 장편의 글을 일본 신문에 기고해 여론을 몰아갔다. 또한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일본 최초로 금메달을 딴 오다 미키오 아사히신문 체육부장을 설득한 끝에 쓰다를 코치에서 해임시킨다. 베를린 출발 2주 전이었다.

    정상희는 ‘조선육상경기협회’ 명예비서 자격으로 베를린에 공식 파견됐다. 권태하는 개인 자격으로 만주에서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둘은 한 달간 합숙하며 마라톤 우승을 위해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헌신한다.

    예상됐지만, 베를린 현지에서 두 선수에 대한 일본의 차별은 심했다. 치료를 핑계로 일본인 선수를 데리고 나가 일본 음식을 먹여가며 따로 연습시키는가 하면, 현지 예선에서 일본 선수 시오아쿠는 반칙까지 일삼았다.


    “36년은 손기정이, 너다”

    집안 사정으로 독립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권태하가 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였다. 그는 김은배가 1931년 10월 세운 마라톤 비공식 세계기록에 자극받아 조선인 최초 올림픽 참가 및 마라톤 세계 제패를 향해 달렸다. LA올림픽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메달권에 들지 못하자 그는 LA에서 일찌감치 손기정을 지목한다.



    내가 양정고보 2학년 때, 미국 남가주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권 선배가 “36년 올림픽은 손기정이, 너다”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었는데, 그것은 내가 베를린 올림픽을 내 인생의 최대 결전장으로 설정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손기정, 동아일보 1976년 1월 13일



    LA올림픽이 끝난 후 권태하는 귀국하지 않았다. 교민 이한식 씨의 주선으로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했다. 세계적 코치 딘 크롬웰이 그 학교에 있었다. 권태하는 그에게서 체계적인 마라톤 지도를 받으며 세계 육상계의 동향도 수집했다. 그러던 중 양정고보 1학년 손기정에게 격려 편지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그가 외국에 머물며 활동하는 것이 일본으로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권 연장을 거부하고 1933년 반강제로 귀국시킨다. 권태하는 3월에 돌아와 도쿄를 근거로 2개월 정도 인근 지방을 순회 강연했다. 당시 세계 육상계의 동향과 크롬웰에게서 배운 마라톤 기술에 대한 것을 주로 강의했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서 정상희와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화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6월에 서울로 돌아와 매일신보가 준비한 귀국강연회에 참가한다. 7월 10일에는 춘천에서 강연한다. 이게 끝이다. 그는 갑자기 만주로 옮겨간다. 일본은 서울에서 크게 주목받는 그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부터 남만주철도회사에서 조선인을 본격적으로 채용하기 시작하자 그를 만주로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권태하는 만주에서도 ‘베를린 프로젝트’를 향한 열의를 내려놓지 않았다. 조선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만주에서 원거리 지원을 하다가 만주에서 곧장 베를린으로 넘어가 손기정, 남승룡의 ‘만능 코치’이자 ‘특별 매니저’로 활약했다. 그에게 베를린 프로젝트는 ‘스포츠 독립운동’이었다. 후배 선수들을 향한 그의 외침을 들어보자.



    ‘만능 코치’ 겸 ‘특별 매니저’

    어린 선수 제군(諸君)! 쓸쓸한 타국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의(如意)하지 못한 중에서 장래의 대망(大望)을 바라보고 일각(一刻)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보아라. 제군은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구상 각지로부터 자기의 민족의 명예를 쌍견(雙肩)에 지고, 평화의 전장에 온 용사들과 싸우어 보아라!

    그 싸홈(싸움)! 총도 없고, 칼도 없고, 정의(正義)에 입각하야, 목심(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때에, 제군은 반드시 무슨 교훈을 받을 것이다.

    -권태하, ‘어린 선수들이여’, 1933



    베를린 올림픽 폐막 며칠 후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에선 대대적인 축하연이 열렸다. 하지만 마라톤 패자(覇者) 조선 선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시각 손기정, 남승룡은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던 안봉근(安鳳根·1889~?) 씨가 자택에서 마련한 소박한 저녁식사에 초대돼 조선인들만의 숙연한 자축 시간을 가졌다. 안봉근 씨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다. 유학생들이 연 환영회가 있었지만 혹시라도 일본 측에서 트집을 잡을까 염려해 미루고 미룬 저녁 자리였다. 그날 저녁 안봉근 씨는 베를린 방송국을 찾아가 마라톤에 우승한 선수는 ‘재팬’이 아니라 ‘서울 코리아’ 손 선수라고 말했다고 손기정은 회고한다. 손기정은 안봉근 씨의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본다.  

    “저기 벽에 걸린 것이…?”

    “그렇소. 태극기요. 이 태극기는….”

    태극기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안씨는 “손 선수나 남 선수가 저 태극기를 달고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하며 식탁으로 안내했다.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푸짐한 두부찌개가 놓여 있었다.

    귀국길에 오른 두 선수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해서야 정상희가 남긴 메모를 보고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후 전개된 일들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리고 정상희는 서울로, 권태하는 다시 만주 대련으로 조용히 복귀해 일상으로 돌아갔다.



    백절불굴의 정신

    6월 2일 충주에서는 권태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 ‘한국 마라톤 개척자, 충주인 권태하를 새로 읽는다’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서 권오륜 부산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권태하를 “인생의 여정에서 오로지 마라톤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스포츠 선진 기술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

    권태하는 “마라톤 선수라면 육신의 고통으로 의식이 불명(不明)할 때까지 이르도록 노력하야 자기의 실력을 전적으로 발휘하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을 함양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했는데, 이것이 그에겐 “일본인들에게 당한 멸시의 저항일 수도 있고 조국의 광복일 수도 있으며, 또한 세계 제패라는 개인의 포부였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우리가 권태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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