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은 1961년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이번의 위기는 성격이 달라 보인다. 존립 바탕 자체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이미 공기업 등 일부 회원사들은 탈퇴를 선언했다. 전경련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 마당이다. 경제단체 대표로서의 위상에도 흠집이 났다.
전경련은 태생부터 정치권력과 맞닿았다. 1961년 5월 16일,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오전 7시 골프를 치기 위해 도쿄의 한 호텔을 나선 그는 일본인 운전기사로부터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동행한 친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골프를 치지 말자고 했지만 이 회장은 일정을 그대로 진행했다.
5월 29일 군사정부는 경제인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부정축재 1호’로 지목된 이 회장은 당국으로부터 귀국을 종용받았다.
태생부터 정권과 밀접
차일피일 귀국을 미루던 이병철 회장은 6월 26일 귀국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2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은 “경제인들을 처벌하지 말고 경제 건설을 맡게 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6월 29일 아침, 구속됐던 경제인들은 모두 풀려났고 메트로호텔에 연금됐던 이병철도 풀려났다. 8월 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업들에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 징수를 통고했다. 27개 기업주에게 378억800만 환이 부과됐는데, 이병철에게는 27%에 달하는 103억400만 환이 부과됐다. 부정축재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됐다.이 사건이 이병철 회장이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다시 말해 한국경제인협회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경제인들을 처벌하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경제 건설에 나서게 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경제인들은 서슬 퍼런 신권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른 후 이병철은 전경련 창립 20주년 기념 좌담에서 창립 배경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여러 경제 얘기를 하면서 의견을 묻다가 ‘경제단체 같은 것을 만들어 경제인들이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고 경제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경제인협회가 출범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961년 8월 16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병철이 초대 회장을 맡아 1년간 재임했다. 그가 생전에 맡은 유일한 ‘공직’이었다.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 간 연결을 도모하여 주요 산업의 개발과 국제 경제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정관에 나와 있는 한국경제인협회의 설립 목적이었다.
경제인협회+경제협회
창립 회원은 13명으로, 대개 5·16 직후 부정축재로 구속된 기업인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경제재건촉진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나 한 달 만에 간판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면서 이병철을 전면에 내세웠다.한국경제인협회 창립 회원은 이병철, 조성철, 남궁련, 이정림, 설경동, 박흥식, 홍재선, 최태섭, 정재호, 김지태, 이한원, 이양구, 함창희. 창립 직후 송대순, 박선기, 김종희, 구인회, 우창순, 서정익, 김용성 등 7명이 추가 가입했고, 그해 11월 다시 20여 명이 더 가입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 과정에서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을 정부에 건의했다. 물금, 삼천포, 울산 등 세 곳의 후보지를 정밀 실사한 뒤 울산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1961년 12월 울산공업단지 계획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국가 기간산업 발전 전략의 밑그림을 제시하고 공업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 출범 과정에서 소외된 기업인 90여 명이 1961년 10월 한국경제협회 창립을 주도하면서 재계 갈등이 노출됐다. 1961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는 ‘한국경제협회 난항’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 한국경제협회의 발기인총회를 앞두고 경제계는 분열을 점차 표면화하고 있다. (…) 한국경제인협회 측에서 한국경제협회 측이 발기함에 있어서 전연 아는 바가 없으며 준비위원으로서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단이 발표됐으나 사전 교섭이나 연락을 받은 바 없으며 응낙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원만한 타결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경제계는 혼란이 격화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결국 두 단체는 한국경제인협회로 합치기로 하고 1968년 3월 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꿨다. 전경련은 3대 회장까지는 투표로 회장을 뽑았으나 4대 회장인 김용완 경방 회장을 회원들의 추대로 선출하면서 이때부터 추대로 회장을 뽑는 것이 전통이 됐다.
권력과의 관계에서 출범했기에 전경련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정치헌금’이었다. 전경련은 1963년 민정 이양에 따른 총선 때부터 분기별로 정치헌금을 하기도 했고, 1968년 7월 23일에는 아예 정식 헌금 기구인 ‘정경간담회’를 만들기도 했다. 반도호텔에서 발족한 정경간담회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 정일형·이재형 신민당 부총재 등과 재계의 주요 경제단체장들이 참석해 정치자금 양성화 등 재계와 정계의 협조 강화 및 풍토 개선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내는 게 편히 사는 길”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968년 7월 26일 전경련 회의실에서는 정경간담회 제1회 상업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정치자금의 배정과 모금 등에 관한 내규를 만들었다. 정치자금 모금과 관련해서 갹출 대상인 정경간담회원 개인을 기준으로 하되 사회적 명망, 재력, 운영하는 기업체 숫자, 수익성 등을 참작하기로 했다.모금한 정치자금은 정경간담회를 거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넘어갔다. 그러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여야에 돈을 배분하는 형식을 취했다. 헌금액이 계속 커지다 보니 재계 일각에서는 아예 재계 의견을 대변해줄 국회의원을 만드는 게 낫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전경련이 정치자금 모금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88년 5공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일해재단 기금 모금과 관련해서다.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는 일해재단이 1984년 185억5000만 원, 1985년 198억5000만 원, 1986년 172억5000만 원, 1987년 42억 원 등 총 598억5000만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그는 일해재단 기금 조성과 관련해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아웅산 사태 희생자 유족들을 돕는다는 취지로 23억 원을 걷을 때는 부담 없이 모금했고, 1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한 2차 모금 때도 재단 설립의 취지에 찬동, 적극 협조했지만 기금 목표가 200억 원, 300억 원으로 계속 증액될 때는 ‘내는 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냈다. 정부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해서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시류에 따라 돈을 냈다.”
정권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기업별로 할당해 돈을 걷었다는 얘기다.
‘세풍’ ‘차떼기’…잇단 추문

1995년 11월 3일 최종현 전경련 회장을 필두로 한 전경련 회장단은 “앞으로 음성적 정치자금은 내지 않겠다. 기업풍토쇄신위원회를 만들고 기업 윤리헌장을 제정하겠다”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 때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이 23개 대기업에서 166억 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이 일어났다. ‘차떼기’로 유명한 2002년 불법대선자금 사건에도 전경련이 연루됐다. 2003년 12월 12일 전경련은 또 사과해야 했다.
“시대에 필요한 것 추구”
“회장단은 경제계가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함에도 정치자금 문제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친 데 대해 진심으로 송구하게 생각하며 사과했다. 회장단은 정치자금을 둘러싼 문제가 시정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경제계가 책임을 통감할 일이며, 더 이상 국민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했다.회장단은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절대 제공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며, 이러한 다짐이 흔들림 없이 실현되려면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치자금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돈 적게 쓰는 선거 풍토가 마련되고 기업이 자율성과 임의성에 입각해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제공함으로써 정경유착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회장단은 전경련의 정치자금 제도 개선방안을 좀 더 현실에 맞게 보완해 불법적인 정치자금 제공이 근절될 수 있도록 학계나 정치권과 공동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하지만 사과는 사과로 그쳤을 뿐 뼈를 깎는 혁신은 없었다. 2010년에는 ‘박정희 기념 사업관’ 건립 기금 270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들에 공문을 보낸 사실이 알려졌고, 2011년에는 주요 회원사에 로비 대상 정치인을 할당하는 문건이 폭로되면서 물의를 빚었다. 올해 들어서는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에 2012~2014년 5억2300만 원을 불법적으로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권력과의 유착 의혹이 또다시 불거졌다.
이런 가운데 급기야 대통령 비선 실세와 청와대 개입 의혹이 제기된 미르재단 및 K스포츠재단 설립 사건이 터졌다. 미르재단에는 삼성(125억 원), 현대자동차(85억 원), SK(68억 원), LG(48억 원), 포스코(30억 원), 롯데(28억 원), GS(26억 원), 한화(15억 원), KT(11억 원), LS(10억 원), 한진(10억 원), CJ(8억 원), 금호아시아나(7억 원), 두산(7억 원), 대림(6억 원), 아모레퍼시픽(2억 원) 등 16개 그룹이 486억 원을 출연했다. K스포츠재단 역시 삼성(79억 원), 현대자동차(43억 원), SK(43억 원), LG(30억 원) 등 19개 그룹으로부터 288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출연을 받았다. 대기업들이 보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듣도 보도 못한 두 재단에 거액을 출연했고 전경련이 그 모금 창구 노릇을 한 것이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재단법인 미르와 K스포츠는 기업들이 논의를 시작해 자발적으로 설립한 재단이다. 시대 흐름에 맞다고 보고 추진한 것일 뿐 청와대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며 청와대 개입설을 부인했다. “전경련은 그동안 그 시대에 필요한 것을 추구해왔고 지금은 문화를 통한 창조경제 발전이 절실하다고 보고 회원사와 논의해 재단 설립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부회장은 문제가 불거지자 미르·K스포츠재단을 해산하고 문화·체육사업을 아우르는 신규 통합 재단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경제교사’도 해산 권고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였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도 경제개혁연대와 함께 전경련의 해산을 권고하는 성명을 냈다. 10월 12일 김광두 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 전경련 해산을 권고했는데.
“전경련 창립 목적이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기업 환경을 좋게 하는 것인데 최근 활동을 보면 오히려 시장경제를 해치고 회원사들의 이미지를 해치는 것으로 변질됐다. 창립된 지 55년 된 전경련이 그동안 여러 차례 혁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말로만 하고 한 게 없다. 내부 혁신을 하지 못했으니 이제는 없어져도 된다.”
▼ 전경련이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나.
“스스로의 노력도 모자랐고, 이제는 우리 경제가 글로벌화해 대기업들이 국내에서 전경련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대가 지났다. 실제로 주요 5대 기업이 전경련 회의에 거의 불참하고 있지 않나. 구성원들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못하고 시대 흐름에도 뒤떨어졌다.”
▼ 그렇다고 대한상의가 전경련 역할을 대신하기엔 한계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정재계에서 ‘전경련 해체론’이 본격 제기된 데는 전경련 회장의 무게감이 크게 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다. 전경련의 전성기는 정주영 회장기(13~17대)인 1977~1987년이다. 이 시기엔 전경련 회장을 ‘재계의 총리’라 일컫기도 했다. 전경련이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을 세우고, 서울 여의도에 전경련회관을 준공한 것도 이때다.
이후에도 구자경 LG 명예회장(18대), 최종현 SK 회장(21~23대), 김우중 전 대우 회장(24~25대) 등 경제계 거물들이 전경련 회장을 지내며 재계 대표 단체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전경련은 경제사회원을 설립하고 지금은 보편화한 사회공헌활동을 선도했다. 최종현 회장 시절(1993~1998)에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김영삼 대통령이 부르짖은 ‘세계화’를 앞장서 이끌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환경 관련) 창립, 중소기업협력센터(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담당) 설립 등을 발 빠르게 추진했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등 정부 간 협의체의 민간 차원 협의체에 한국 대표로 참여해 한국 경제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20여 개국과 경제협력위원회를 운영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때 한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 정부안에 반영하고 기업들에 이에 대비토록 전파하는 것도 전경련의 활동 중 하나였다.
전경련 회장의 무게감이 확연하게 떨어진 것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99년 대우그룹 해체와 맞물려 자리에서 물러난 뒤부터다. 이때부터 주요 그룹 오너들이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외환위기 여파가 전경련에 밀어닥친 것. 결국 김각중 경방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등 중하위 그룹의 총수가 회장을 맡다 보니 구심력이 약화되고 위상도 떨어졌다는 평가다.
위상 흔들려도 ‘대표’는 필요
2011년부터 재계 6위인 GS의 허창수 회장이 회장을 맡고 있으나 역부족인 상황이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재계 빅4 기업이 전경련과 거리를 두면서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다 보니 요즘은 회장단 회의도 비공개로 진행된다. 시대 흐름에 맞춰 변신하지 못하고 권력의 요구나 재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단체라는 인식도 생겼다. 재벌 위주의 성장에 대한 비판,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 등도 전경련의 입지를 좁혔다.전경련이 제 역할을 못하다 보니 요즘 재계에서는 “재계 대표 단체 자리가 대한상의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지난 9월 19일 있었던 일이 상징적이다. 이날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는 20대 국회의원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이 행사는 전경련이 아니라 대한상의가 주최했다. 19대까지는 전경련이 주최하던 행사였다. 올해도 원래는 전경련이 행사를 준비했지만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불법 지원 사건이 터지면서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날 행사에는 국회의원 160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전경련 사정에 정통한 A 교수는 이런 의견을 내놨다.
“경제 5단체 중 대한상의, 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법정단체다. 법에 의해(의사와 관계없이) 회원이 되고 정부 부처의 지원과 함께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대한상의, 무역협회의 상근부회장은 경제 관료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에 비해 전경련이 ‘순수 민간 종합경제단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은 의미가 크다. 기업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곳도 전경련뿐이다.
세계 각국은 기업을 선봉에 내세우고 경쟁과 협력을 하고 있다. 기업과 정부 간, 각국 경제계 간 가교 역할을 하는 종합 경제단체가 긴요한 상황이다. 다른 나라들의 카운터파트와 같은 레벨에서 정보, 조직 구성, 팀워크 등이 이뤄져야 한다. 한국에서 현재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전경련이 유일하다.”
경제단체 대표로서 전경련의 위상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해산보다 역할 변화”
하지만 전경련의 존속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전경련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홍성추 재벌정책연구원장은 “역할을 시대 변화에 맞게 바꿔야 한다. 권력의 요구를 재계에 전달하거나 재벌들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조직에서 환골탈태해 싱크탱크로서 정책 등을 개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또한 경제교육과 사회공헌 등 민간과 기업의 접점을 만들어가면서 사회통합과 양극화 해소 등을 위해 애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A교수도 “단순히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 자유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 생산적 토론과 전략 창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한편,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베이스캠프로서의 기능을 해야 한다. 전경련은 미래 국가경쟁력 강화, 통일한국의 청사진 제시 등 경제계 차원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