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커피는 계몽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서, 카페는 민중의 혁명의식을 고취한 아지트로서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냈다.
- 미국에선 커피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이처럼 시대적 각성, 혁명,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킨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그러나 한반도에선 통하지 못했다.
이렇듯 기록에 근거해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커피 역사는 시대를 함께한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 전문가들은 그들의 커피 역사가 한국보다 200년가량 앞섰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꽤 오랫동안 “개항이 앞선 만큼 그럴 수 있겠지”라며 대체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의 거대한 커피 시장이 열리면서 커피 음용의 역사와 정통성은 시장에서 한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브랜드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믹스커피 발명국으로, 일본은 캔커피 원조국으로서 세계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사이인 만큼, 커피의 깊이에 대한 올바른 조명은 더 미뤄둘 일이 아니다.
고종이 처음 마셨다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종황제가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상황은 바로잡아야 한다. 누가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더욱이 고종황제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참변(을미사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 2월 11일 칼바람 부는 한겨울 새벽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됐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같은 겨레로서 피를 끓게 만드는 엉터리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국의 커피 역사는 고종황제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승정원일기’(1623~1894) 등 어떤 문헌에도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이에 비해 일본은 1700년경 나가사키 앞에 있는 ‘데지마’라는 자그마한 섬에 네덜란드 상인을 거주시키면서부터 커피 문화를 만들어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증은 없다. 데지마를 드나들던 통역관이나 관리, 상인들이 커피를 마셨을 수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커피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은 나가사키에서 난(蘭)을 연구하던 시즈키 다다오가 1782년에 쓴 ‘만국관규(万國管窺)’에 한 줄 나온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커피라고 부르는 것은 콩과 비슷하지만 실은 나무 열매다”며 음료로서 커피가 아니라 식물로서 커피를 언급했다.
19세기 들어서야 커피의 맛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에도시대 나가사키에 설치된 막부의 관청에서 일하던 오타 난포는 1804년 어느 날 일지에 “서양인의 배에선 커피라고 부르기를 권한다. 콩을 검게 볶아 가루로 만든 뒤 설탕을 넣은 것으로, 단내가 나고 맛이 없다”고 적었다. 일상의 음료 문화를 적은 게 아니라, 신기한 듯 신문물에 대한 체험을 전하는 수준이다.
1867년이 돼도 지도층에게조차 커피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던 듯하다. 에도시대가 막을 내리기 1년 전인 이때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나폴레옹 3세로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초대를 받았다. 막부는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정책을 펴던 차여서 요시노부의 남동생 아키타케가 대신 파리에 갔는데, 항해일지에 “식사 후 ‘카헤(커피의 당시 발음)’라는 콩을 볶은 탕이 나왔다. 설탕, 우유를 넣어 마신다. 가슴이 꽤 상쾌하다”고 썼다.
‘사무라이 커피’
일본에서 커피 대중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후가 아니라 1868년 왕정복고에 따라 메이지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특기할 것은, 커피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유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곁들이는 데에서부터 일본 커피 문화가 조성됐다는 점이다. 1870년 우유와 버터를 판매한 우마회사가 자체 제작한 ‘육식의 설’이란 책자엔 “우유는 소젖을 짜서 그 상태로 마신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차, 커피를 끓여 혼합해 마시면 맛이 좋고 향기가 좋다”고 적혀 있다.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수필가 데라다 도라히코(1878~1935)가 1880년의 상황을 전한 ‘커피 철학 서설’엔 “처음 마신 우유는 약과 같았다. 의사는 이를 먹기 쉽게 하기 위해 소량의 커피를 배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비릿한 우유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넣기 시작한 일본의 사연은 커피 애호가들이 보기엔 이채로운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에선 눈깔사탕 크기로 둥글게 굳힌 설탕덩어리 속에 커피가루를 넣어 손쉽게 물에 타 마시게 한 ‘커피당’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인 스스로 커피의 유래를 네덜란드와 교역한 18세기 초가 아니라 150년쯤 뒤인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사무라이가 교류한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도상 블라디보스토크 맞은편의 일본 땅이 혼슈의 아오모리 현인데, 그중에서도 히로사키 시는 지금도 ‘사무라이 커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커피의 명인’으로 불리는 나리타 센조(64)는 “1855년쯤 변방인 아오모리와 홋카이도를 지키기 위해 교토에서 파견된 사무라이들이 손발이 붓는 풍토병을 앓고는 러시아 사람들에게서 전해 받은 커피를 마시며 치료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소개했다. 당시 사무라이는 손절구로 커피를 빻아 천주머니에 넣고는 뜨거운 물에 우려 마셨다. 임기를 마치고 교토로 돌아간 사무라이들이 건강관리를 위해 커피를 지속적으로 마시는 과정에서 커피는 점차 대중에게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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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손탁’
경인선 개통 3년 뒤인 1902년 서울에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이 호텔 내부에 설치된 ‘정동구락부’라는 레스토랑이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 구실을 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손탁(Sontag)은 고종황제에게 처음으로 커피를 만들어준 ‘국내 최초의 바리스타’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인 만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커피의 왜곡된 역사는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의 의미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손탁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조선에 와서 25년간 살다가 경술국치를 1년 앞둔 1909년 9월 사실상 일본에 의해 추방됐다. 웨베르의 처형으로 외교관 가족 자격으로 31세에 입국한 그녀는 미망인인지 미혼인지 확인할 수 없는데, 어쨌든 ‘미세스 손탁’으로 불렸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났지만, 17세 때 보불전쟁에서 이긴 독일이 점령함에 따라 독일 국적인으로 입국해 러시아 공관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었다.
손탁은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당시 조선 황실은 개항을 맞아 대외교섭을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내부에서 통역을 담당한 손탁은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하면서 조선 외교의 귀와 입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손탁은 특히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을 연결하면서 갑신정변 이후 ‘조선 쟁탈전’에 혈안이 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한 공로로 1895년 고종황제로부터 서울 정동의 현 이화여고 부지에 있던 기와집 한 채와 그에 딸린 부지를 하사받았다. 손탁은 1898년 이 집을 방 5칸짜리 서양식 건물로 개조했는데, 고종황제는 이곳을 영빈관으로 운용토록 했다. 주한 일본공사관이 1899년 5월 자국으로 보낸 공문엔 손탁의 사저를 ‘궁내부의 별원인 정동화옥’으로 칭했다. ‘정동의 꽃처럼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손탁은 1898년 3월 휴가를 받고 2년간 알자스에 갔다가 1900년 4월 궁내부로 복직한다. 당시 조선 황실은 급속히 다변화하는 외교 상황 때문에 정동화옥의 규모로는 몰려드는 귀빈들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증축 공사를 벌인다. 손탁은 기존 건물을 허물고 2층짜리 러시아풍의 빨간 벽돌 건물을 지었다. 1902년 완공된 뒤부터 ‘손탁호텔’로 불린 이 건물은 객실이 30칸에 달하는 규모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기록되기도 한다. 2층엔 귀빈실, 아래층엔 일반 객실과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바로 이 레스토랑에 친미-반일 성향의 외교관과 국내 지식인들이 몰려들어 커피를 마시며 일본의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손탁호텔 1층에 있던 레스토랑을 ‘정동구락부’라고 부르며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정동구락부는 커피를 마시는 장소나 모임 이상의 뜻깊은 가치를 지닌다.
정동구락부의 활약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대거 참여한 정동구락부는 일본에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키려 한 ‘춘생문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호응한 세력이 정동구락부다. 고종은 시종을 통해 정동구락부를 지원하면서 손탁이 운영하던 정동화옥을 아지트로 활용케 했다. 정동구락부 회원들은 손탁호텔이 세워진 뒤엔 호텔 커피숍에 모여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무력화하려는 외교를 활발히 펼쳤다. 1896년 이상재, 윤치호 등을 주축으로 정동구락부는 독립파 관료세력을 흡수, 독립협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자강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1905년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묵으면서 일본이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회유하고 협박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일본이 을사늑약 체결을 추진하는 아지트로 활용한 것이다. 결국 손탁은 1909년 9월 일본의 압박에 따라 손탁호텔을 프랑스인 보헤르에게 매각하고 한국을 떠난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시대적 각성과 혁명, 독립을 고무한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한반도에선 통하지 못했다.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조선엔 암흑의 시대가 드리워진다. 커피에 대한 기록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엔 커피에 관한 기록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고종 35년(1898) 9월 12일 “(독차 사건으로) 황제와 태자의 건강이 나빠진 원인을 경무청에서 규명하게 하다”라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 8년(1915) 3월 4일 “백작 이완용에게 가배 기구를 하사하다”라는 내용이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까지 일제가 잔혹한 무단통치를 벌이면서, 커피와 관련한 기록을 더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문화통치로 전략을 바꾸면서,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모던 보이’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는 이 시기에선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다방으로 불린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은밀하게나마 펼쳐진 조선 지식인의 저항운동은 진정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의해 숨겨져 드러나지 않을 뿐인가. 그것을 밝혀내고 겨레의 자긍심을 키워낼 기회가 지금 우리 손에 있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