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나는 카메라나 글쓰기보다 ‘장소’야말로 최고의 기억 저장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그때 그 순간만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글쓰기는 그때그때 한 사람이 기억하고 느낀 것만을 기록할 수 있지만, 장소는 수많은 사람의 크고 작은 이야기, 셀 수 없는 시간, 기록된 줄도 몰랐던 온갖 움직임까지 저장한다. 수만 년 전 한반도를 걷던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하고, 수백 년 전 한 남자를 사랑해 자기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삼은 여인의 편지가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장소는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무제한의 기억 저장고다. 장소는 다만 무심하게, 다만 끊임없이, 자신을 스쳐간 모든 존재의 움직임과 표정과 목소리와 감정을 차곡차곡 제 몸 곳곳에 아로새겨 둔다.
나는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삶의 기록이 새겨진 장소들도 좋아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진하게 묻어나는 장소를 더 좋아한다. 그곳에 가면, 그가 이 세상에 없어도 그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가본 장소 중에서는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가 그랬다. 파리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면 1시간가량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모네가 수련 연작은 물론 수많은 걸작을 그려낸 그 ‘물의 정원’과 ‘꽃의 정원’이 있는 집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모네가 이사 가기 전엔 겨우 300명이 살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모네를 사랑하는 전 세계 관광객이 한 해 수백만 명씩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모네의 장소, 지베르니
‘모네가 사랑한 정원’은 가히 ‘모네가 아끼고 사랑한 모든 것’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모네가 6명의 정원사를 고용해 평생 애지중지 가꾼 거대한 정원, 그리고 그 집을 찾아온 수많은 화가와 평론가,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화가가 살던 집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클로드 모네의 인생뿐 아니라 그 시대 화단과 예술가들의 독특한 면면을 구석구석 엿볼 수 있다. 몇 장씩 넘길 때마다 모네의 그림들은 물론 ‘지베르니 학파’라고 불릴 만한 여러 화가의 작품이 함께 눈을 즐겁게 해 지베르니 정원 속에서 미술관을 관람하는 듯한 행복한 착시를 느끼게 해준다.장소와 인간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면 지베르니는 모네와 환상의 궁합을 이룬 곳이다. 예술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먹고사는 문제. 둘째, 비평이나 언론의 입김을 비롯한 수많은 비난이나 질시의 시선. 모네도 이 두 가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모네는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 그 자체를 통해 돈을 버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비평과 뜬소문에 시달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모네는 정기적으로 화가들의 모임에 참석했고, 지베르니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스케치 여행도 많이 다녔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한적한 시골이나 다름없던 지베르니에 집과 작업실과 정원을 모두 결합한 형태의 거주 공간을 만들고 나서는 굳이 파리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기자들과 비평가들은 모네의 정원에 앞다퉈 드나들며 창작의 비밀을 캐내기에 바빴고,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수많은 화가가 모네의 정원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千變萬化 오브제
정원사가 있었지만 그는 직접 꽃씨와 모종을 고르고, 구입하고, 심고 가꾸는 일까지 했으며, 정원과 조경에 관련된 수많은 책자를 탐독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들로 가득하던 정원이 몇 년이 지나자 온갖 꽃이 피어나 빛의 향연을 벌이는 지상의 낙원으로 변했고, 처음에는 그저 ‘관상용’으로 심은 수련이 모네에게 최고의 오브제가 됐다.
도시와 바다, 가족의 모습을 많이 그리던 젊은 시절과 달리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하면서 정원 그 자체만으로도 천변만화한 오브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멀리 스케치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이, 날씨의 변화에도 영향을 최대한 덜 받으면서, 모네는 그림 그리기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됐다.
‘모네가 사랑한 정원’에는 일본 풍경화를 공부하면서 자연과 좀 더 깊은 소통을 추구한 모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네는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비롯한 일본의 예술 작품을 연구하면서 단지 그 정적인 아름다움을 모방하기보다는 일본 풍경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연과의 더욱 깊고 본능적인 관계를 꿈꿨다고 한다. 일본식 다리를 그린 모네의 그림에 스민 ‘뭔가 은밀하고 배타적인 속성’에 의문을 품은 평론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네는 그런 부정적인 평가를 항상 ‘그림’ 그 자체로 극복해냈다. 모네가 그린 일본식 다리를 보고 있으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저 작고 아름다운 다리만 건너가면, 저 세계를 향한 문이 열릴 것만 같다. 그곳은 어쩌면 익숙한 시간과 평범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인간의 힘으로 닿을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이 샘솟아 오른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리지 말고 보이는 대로 그리기가 모네 화풍의 핵심이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앞에 있는 것이 집이든 사람이든 나무이든 그것을 잊어라. 눈앞에 무슨 대상이 있는지 잊어라. 그저 여기에 푸른 정사각형이 있다. 여기에 분홍 직사각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벚꽃을 바라볼 때도 그것이 벚꽃임을 잊어버리고, 장미를 바라볼 때도 그것이 장미라는 관념을 잊어버리는 것. 그 망각의 자유에서 모네의 눈부신 자유로움이 탄생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오직 ‘내 눈’과 눈앞의 형상에 집중하는 모네의 그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어떤 눈부신 영감을 선물하는 것 같다.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게는 이런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삶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미래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보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로 이 장소를 천국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우선 나 자신의 감각, 지금 이곳의 소중함, 지금 내 곁의 존재들을 믿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