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슬림 위구르족, 한족과 인종·언어·문화·종교 딴판
- ‘하나의 중국’ 원칙…3시간 차 베이징과 동일 시간대
- 개발 광풍에 한족 대거 유입, 위구르족 소외
- 中 정부 ‘전통가옥 개조사업’으로 공동체 해체 위기
- 위구르 주민 “기본적 인권, 자유 없다”
이슬람교도는 평소 집 안팎에서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신성한 날에는 반드시 모스크를 찾아 다른 무슬림들과 함께 예배를 올린다. 에드카 모스크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최다 2만 명. 이슬람교는 신도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대한다. 먼저 모스크를 찾은 무슬림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고, 늦게 온 신도들은 모스크 주변에 양탄자를 깔아놓고 쥐메에 참가한다.
시곗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키면 모스크의 스피커에서 이맘(이슬람 성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예배는 아랍어로 진행된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여성은 모스크 일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기에 나름의 방식으로 쥐메에 참여한다.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남자들의 입가에 물, 음식, 과일 등을 댄다. 그러면 남자들은 입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불어줘 알라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나눠준다.
中, 모스크 밖 예배 금지
필자는 1997년 카슈가르를 처음 방문했다. 토요일에 도착하는 바람에 이곳 13개 모스크에서 집전되는 쥐메를 볼 수 없었다. 2009년 6월 말 두 번째로 찾았을 때 비로소 에드카의 쥐메를 취재했다.7년 만인 지난 8월 5일, 에드카에서 본 쥐메는 이전과 좀 달랐다. 광장 곳곳에 사복경찰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한 경찰이 사진을 찍는 필자에게 다가와 “어디서 왔나” “왜 여기에 머무나” 꼬치꼬치 캐물었다. 예배당에 못 들어가는 위구르족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광장에서 만난 무슬림 압둘레임은 “(중국 당국이) 2, 3년 전부터 모스크 밖에서 쥐메 예배 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드카 광장의 이런 풍경은 중국의 ‘화약고’로 변한 신장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예배를 마친 위구르족은 모스크 주변에 모여든 걸인과 장애인에게 성금을 건넨다. 또한 업무 때문에 쥐메에 참석하지 못한 친인척을 찾아 신의 축복을 나눠준다. 현지 무슬림 오스만은 “정부 기관과 일반 기업은 위구르족이 쥐메에 참석하도록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단지 무슬림들이 건물 한쪽에 모여 예배 보도록 잠시 시간을 내줄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이 정도 배려는 신장에서도 위구르족의 인구 비율이 높은 카슈가르, 쿠차(庫車), 악쑤(阿克蘇), 호탄(和田) 등 일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선 쥐메가 정오쯤 거행되는데 왜 에드카의 쥐메는 오후 3시에 열릴까. 이는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統一中國)’ 원칙에서 비롯됐다. 카슈가르는 중앙아시아의 파키스탄·키르기스와 맞닿은 국경지역이다.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과는 경도상 3시간의 시차가 난다. 하지만 중국은 러시아와 인접한 두만강에서 카슈가르까지 하나의 시차로 묶었다. 여름철 카슈가르에선 오전 8시가 훨씬 넘어서야 해가 뜨는 것도 그래서다.
중국 정부는 이처럼 시간대를 하나로 묶어버렸지만 위구르족은 현지 사정에 맞게 생활한다. 카슈가르의 일상 업무는 오전 10시가 돼야 시작된다. 이런 독자성과 통일성이 오늘날 신장 문제를 이해하는 키포인트다.
카슈가르의 독자성은 바자르(Bazaar)에서도 드러난다. 바자르는 투르크어로 ‘시장’이란 뜻이다. 위구르족에게 바자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다. 이웃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이자, 한 주의 피로를 씻는 쉼터다. 1000년 역사를 지닌 카슈가르의 바자르는 현재 세 곳에서 열린다.
‘바자르’의 도시
첫째는 중시야(中西亞) 바자르다. 2004년 카슈가르 시(市)정부가 1억 위안(약 170억 원)을 투자해 만든 상설시장이다. 600여 개의 상점이 입주했는데, 주민과 관광객, 중앙아시아 상인들로 문전성시다. 지난해 카슈가르에서 수출된 11억 달러(약 1조2000억 원)의 상품이 대부분 이곳에서 거래됐다.둘째는 일요일마다 열리는 역센베(星期天) 바자르다. 중시야가 개설되기 전 카슈가르 바자르는 역센베를 가리켰다. 상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일요일 노천시장으로 개념이 변했다. 그마저 2년 전부터는 과일을 제외한 모든 물품의 거래 행위가 금지됐다. 중시야에서 만난 주민 푸르캇은 “3년 전부터 테러 사건이 빈발하면서 시정부가 마차와 삼륜차의 도심 진입을 막았고, 거리에서 일상용품의 거래를 금지했다”고 전했다.
셋째는 우락(巴札) 바자르다. 우락은 위구르어로 ‘가금(家禽)’을 가리킨다. 카슈가르 외곽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데, 주로 위구르족이 먹는 소와 양을 거래한다. 우락의 규모는 7년 전보다 훨씬 커졌다. 이곳에서 만난 아무르한은 “우락은 시정부의 간섭이 적어 카슈가르 일대의 모든 위구르족이 몰려와 다양한 물품을 사고판다”고 했다. 노천식당과 쉼터도 열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카슈가르는 환경적 요인으로 ‘바자르 도시’가 됐다. 카슈가르는 톈산(天山)산맥, 아래로는 쿤룬(崑崙)산맥, 동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로는 파미르 고원에 둘러싸인 탓에 사방 각지에서 쳐들어오는 외부 세력, 즉 유럽계, 중국계, 티베트계, 투르크계, 키르기스계 등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데도 이런 약점을 역이용해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카슈가르는 서역(西域) 36국의 하나인 소륵(疏勒)의 수도였다. 소륵은 기원전 2세기에 세워져 기원후 7세기까지 유지됐다. 한족도 위구르족도 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럽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다. 이들은 2세기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주업은 상업. 카슈가르는 중국에서 톈산남로를 통해 인도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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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대 자원 寶庫
2010년 조사 결과 신장 인구는 2181만 명이고 이 중 한족은 40.4%(882만 명)였다. 30년간 민족 구성비에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통계상 허점이 있다. 인구센서스의 조사 대상자는 ‘장기거주자’로 한정한다. 임시거류증 없이 일하는 외지인,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團)에 소속된 군인 200만 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병단은 기업과 농장을 운영하는 준(準)군사조직으로 오직 신장에만 있다. 외지인과 병단원의 90% 이상은 한족이다.중국은 개혁·개방 이전에는 거주·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한족은 1980년대 이전에는 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이주했다면, 그 뒤로는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신장이 중국 최대의 자원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6분의 1, 천연가스의 30%가 신장에서 나온다. 이 ‘블랙골드’로 인해 새로 건설된 칼라마이(克拉瑪依)와 코를라(庫爾勒)는 한족의 인구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신장의 기업과 상점들은 직원을 채용할 때 한족을 우선 뽑는다. 한족은 의사소통이 용이한 데 반해, 위구르족은 중국어가 서툴고 무슬림이라 경계 대상이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의 개발, 관리, 운송 등에 종사하는 인력은 거의 다 한족이다. 위구르족은 취직을 하더라도 가게 판매원, 식당 종업원, 청소부 등 급여가 낮은 허드렛일을 주로 한다. 카슈가르에서 만난 위구르족 대학생은 “지역 최고 명문인 신장대학을 졸업해도 중견기업에 취업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다수는 정원의 50% 이상을 위구르족으로 뽑는 공무원과 경찰 시험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금세기 들어 개발 붐을 타고 카슈가르 악쑤, 호탄 등 남서부에까지 한족이 밀려들었다. 2015년 카슈카르에서 한족은 29만 명으로 6.5%를 차지했다. 한족은 대부분 도심에 거주한다. 신장의 최서단 카슈가르까지 한족이 밀려든 데는 난장(南疆) 철도가 큰 역할을 했다. 난장철도는 1999년 개통됐는데,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까지 1446㎞에 달하며 코를라, 쿠차, 악쑤 등 위구르족 주요 도시를 통과한다.
2011년 10월 중국 정부는 카슈가르 경제특구(SEZ) 개발계획을 발표해 한족의 유입을 증폭시켰다. 카슈가르에 50㎢ 규모의 특구를 조성해, 물류·전자·섬유·건설자재 등을 핵심 산업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들고 나왔다. 그 첫 행보로 지난 5월 6일 카슈가르에서 파키스탄의 항구도시 과다르에 이르는 총길이 1152㎞의 고속도로가 착공됐다. 우선 1구간 392㎞가 건설된다.
개발 혜택 소외된 위구르족
중국업체가 공사비 29억 달러(약 3조2500억 원)를 조달하고 시공을 맡았다. 이 사업이 ‘일대일로’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남중국해가 봉쇄될 경우 중동으로 바로 나가는 길이라 중국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개발 바람에 따라 카슈가르엔 일확천금을 노려 돈다발을 싸들고 온 연해지방 투자자와 투기꾼이 수두룩하다. 지난 5년간 이들의 투기 탓에 카슈가르의 부동산 가격이 급상승했다.하지만 위구르족은 개발의 혜택에서 소외됐다. 그 와중에 위구르족 전통촌락 카드미셰해르(老城)가 사라지고 있다. 2010년 8월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70억4900만 위안(약 1조1983억 원)을 들여 ‘전통가옥 개조·정돈사업’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따라 지난해 말까지 507만m²의 촌락과 가옥을 철거하고, 4만9000가구, 22만 명을 신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정부는 “위구르족 촌락이 오래돼 상하수도 건설이 어렵고 가옥은 지진에 취약하다”며 사업을 밀어붙였다. 지진이 빈발하는 신장에서 내진 설계가 안 된 전통 가옥을 철거하고, 위구르족을 현대식 아파트로 이주시켜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것.
하지만 위구르족의 반응은 차갑다. 카드미셰해르는 위구르족 공동체의 산실이자 전통문화의 보고이기 때문. 쿠드자 비쉬(高臺民居)에서 만난 주민 아니발은 “시 정부가 방은 1m²당 1600위안(약 30만6000원), 거실과 복도는 700위안(약 11만9000원)으로 쳐서 보상하겠다면서 이주를 강요한다”며 “카슈가르 외곽의 아파트가 1m²당 2600위안(약 44만2000원)이라 보상금으로는 새집을 구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아니발은 동생 오마르와 6대째 전통토기를 빚는 장인(匠人)으로 이곳 유명인사다.
카드미셰해르의 생활여건은 열악하지만, 아니발 형제는 아파트로 이주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다. 아니발은 “이곳이 우리의 집이자 일터”라며 “시 정부에서는 공방을 따로 만들어 우리를 고용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남의 밑에서 일해야 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위구르족 주민은 “카드미셰해르의 원주민 70%가 쥐꼬리만한 보상금만 받고 이사하는 바람에 막대한 아파트 대출금을 빚으로 떠안으며 수백년 동안 살아온 생활 터전을 떠나야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위구르족에게 전통 가옥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다. 그들은 집에서 전통 음식과 전통 공예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해왔다. 골목길에서 장작을 태우고 음식을 만들어 바자르로 가져가 파는 식이다. 아니발 형제처럼 집 안에서 토기를 구워내거나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카드미셰해르는 모스크, 시장과 더불어 위구르족의 생활상을 상징한다. 카드미셰해르엔 위구르족의 역사와 옛 도시계획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통 가옥은 길게는 50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보리 짚과 흙을 덧쌓아 지었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카드미셰해르 해체에는 중국 정부의 또 다른 노림수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산다. 위구르족의 전통문화를 퇴색시키고 주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신장대학의 한 위구르족 교수는 “신장 전역에서 진행되는 전통 가옥 개조·정돈사업은 위구르 공동체의 해체가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인권도 자유도 없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에게 몇 가지 혜택을 주고 있다. 중국 최초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공무원과 경찰을 채용할 때 위구르족을 인구 비율만큼 뽑으며 시험에서 가산점을 준다. 농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과 교사의 봉급은 도시보다 20~30% 더 많다.그러나 이런 정책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위구르족 주민은 “얼마 전 길거리를 지나가다 검문을 당하면서 휴대전화의 SNS와 사진까지 검열당했다”며 “신장에 사는 위구르족에게는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가 없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