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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에·세·이

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 정재민 | 전 판사·소설가

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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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법복을 벗었다. 11년 법관 생활을 마감했다. 법과대학, 사법연수원, 법무관, 판사까지 20여 년 법률가 생활도 일단락 지었다. 곧이어 방위사업청 팀장으로서 행정관료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지면에서 판사의 일을 소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판사직을 떠나 독자께 죄송하다. 사직을 기회로 이번에는 내가 왜 법복을 벗었는지를 말해보고자 한다. 평판사 하나 사직하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래도 굳이 말하는 것은 내 솔직한 사연이 이 글의 주제인 판사의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판사직이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직업이었다. 나이와 깜냥에 비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실제보다 더 반듯한 사람인 양 신뢰받았다. 경력이 같은 다른 공무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타인으로부터 괴롭힘도, 무시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당사자 수만 명으로부터 세계문학전집보다 더 생생한 삶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쌍방의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에서도 판사만큼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판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처리할 사건들이 배당되므로 서로 자기 일과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동료를 속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 직장 내에 만연하다는 내부정치의 권모술수도 적었다. 윗사람과 관계가 안 좋아 나쁜 평정을 받을지언정 잘릴 걱정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내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법과 양심에 따른 판단이 헌법상 보장돼 있어서 판결문을 쓸 때에는 내가 실제로 믿는 그대로를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판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 번 사는 인생에 오로지 판사만 해야 하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족은 엇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다음과 같은 점들이 힘겨웠다.



대한민국 판사는 격무에 시달린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달려야 가까스로 현상유지를 한다. 저녁이 없는 삶, 주말이 없는 삶이 원칙이다. 내 보직이 비교적 더 바쁜 편이 아닌데도 작년 한 해 동안 주중 절반은 자정 넘어 집에 들어갔다.



정의의 균형점 찾기

성취의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수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많아져야 정상 아닌가. 오히려 반대로 선택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심리적으로 쫓겼다. 세상이 나를 속이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에는 명문대만 가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갔더니 이제는 사법시험만 합격하면 내 뜻을 원 없이 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꾹 참고 공부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더니 이제는 판사만 되면…. 그래서 판사가 됐더니 이제는 25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만 되면….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보람을 느낄 때도 적지 않았지만 그렇게 장시간 일하는 만큼 큰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것은 일 자체보다는 개인의 한계 때문이다. 판사가 될 때 법률 문제를 잘 푸는지를 평가하는 시험만 통과했을 뿐 정의의 균형점을 제대로 찾는지에 대해서는 검증받지 않았다. 판사로서 매일 숱하게 부딪히는 문제는 대개 법률 문제보다 정의의 균형점에 관한 것이다.

가령 이런 문제들이다. 징역 6월이 옳은가 10월이 옳은가. 이혼재판에서 경제력 없는 어머니와 육아를 해본 적 없는 아버지 중에서 누구에게 자녀 양육권을 주는 것이 옳은가. 죄를 자백하는 피고인에 비해 죄를 부인하는 피고인은 얼마나 더 높은 형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평균인의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학력, 사회적 지위, 경제력, 직업군 등 여러 면에서 내가 평균인일까. 저마다 상식과 비상식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구분한다지만 법정에 나온 사람들의 상식은 서로 꽤나 다르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고칠 자신이 없으면 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할 수 있지만 판사는 자기 사건을 다른 판사에게 떠넘길 수가 없으니 이런 문제가 더 큰 부담이 된다. 고백건대, 끝내 내 답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시험 종료시간에 쫓긴 수험생처럼 답을 선택해서 판결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아는 오판보다 모르는 오판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정의라 착각한 치기 어린 감상과 독선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평생 가는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판결을 할 때마다 자갈 하나씩 삼킨 것처럼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법복 속에 개성 감추기

판사의 일을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부부를 이혼시키고, 자식의 양육권을 어느 한쪽에만 주고, 재산을 빼앗거나 회사를 파산시키는 일들이 재미있겠는가. 재미는커녕 상처만 쌓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흠집이 남는다.

판사는 검은 법복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춘 채 살아간다. 개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제한된다. 생각도 평균인의 상식에 끼워 넣어야 한다. 당사자들이 어느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판결을 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수많은 판결례가 사실상 판사의 판단을 제어하고 있고 그에 반하는 판결을 하면 항소심에서 교정된다. 판사가 어떻게 말하고 조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빈틈이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매뉴얼이 확립돼 있다. 사람이 각자 ‘나’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이루어간다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게 판사로만 사는 것은 갑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판사가 됐나. 출퇴근할 때마다, 어려운 사건 앞에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무수히 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어떤 판사들은 뚜렷하고 근사한 대답을 품고 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실은 절실하게 판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학창 시절 내 꿈은 특파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판검사가 돼야 한다면서 힐난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제 하고 싶은 대로만 사노.”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 거친 세상에서 몸 하나밖에 없는 놈이 어찌 나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가난한 집안 맏이로서 가계에 도움도 되어야 하겠지. 아픈 어머니 말씀이라 더욱 거역할 수 없었다. 나만의 길을 홀로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내 심지가 여물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모님의 바람과 선생님의 말대로 법대를 갔다. 나 역시 사회적 지위, 장래의 경제력 등 실리적으로도 좋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법시험을 보게 됐고 합격하고 나니 판사가 된 것이다. 마치 혼잡한 지하철에서 내려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 나가는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편지

그러나 남들이 좋다는 삶도 소문난 잔치처럼 별것 없었다. 그저 그런 패키지여행 같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신나지도 않았다. 여행 끝나고 남는 것은 감동 없는 관광명소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뿐. 내가 좋아하는 일과 연애결혼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는 일과 중매결혼한 아쉬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틈틈이 소설과 논문도 몇 편 쓰고, 이례적으로 국방부 정책실, 외교부 국제법률국, 유엔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일하는 일종의 외도를 감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재작년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는 헤이그에 머물 때 수십 번 고쳐 읽은 편지 구절이 있다. 일본 근대소설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교토대 영문과 교수직을 거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친구에게 쓴 편지다.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심했네. 다시는 지금까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지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 이제는 내 혼자 힘으로 가는 데까지 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면 거기서 쓰러지겠네.’ 이 중에서도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라는 구절이 정곡을 찔렀다. 내가 그동안 대체로 남들이 좋다는 안전한 일만 좇은 것도 내가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믿어주지 못한 내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실패를 겪더라도 내 자신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내 자신이 서럽게 울 것 같았다. 마침 나이 마흔을 맞이하면서 각오도 남달랐다. 그래서 결심했다. 귀국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남은 절반의 인생은 오로지 ‘나’로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먼저 ‘나’보다 비대한 ‘판사’라는 꼬리표를 잘라내야 했다. ‘정 판사’가 아니라 ‘정재민’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번듯한 명함에 기대지 않고 대접이 더 나쁘더라도 내 이름 석 자의 무게로 살기로 했다.



왜 방위사업청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행정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국방부, 외교부에서 일할 때 행정부 일의 스케일과 재미와 보람에 홀딱 반한 기억 때문이었다.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 만큼 보람이 크고 문제 해결 방식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미력하게나마 국익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방위사업청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많은 이가 말하는 방산비리 척결이 최우선 동기는 아니다. 방사청장도 아닌 일개 팀장으로 가면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다. 방위산업전문 변호사가 되려고 잠시 경력을 쌓으려는 것도 아니다. 정년을 채우려고 직급을 낮춰 정규직 공무원이 됐다. 은퇴하고 취업제한기간이 끝나면 아무래도 변호사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나중에 내가 로버트 태권V를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직급이 낮아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분들도 있지만 정부중앙부처의 베테랑 공무원 스물다섯 명과 일하는 팀장 자리가 내게 과분할지언정 결코 낮은 자리라 생각지 않는다. 퇴계 이황 선생도 정3품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내 선택이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대단한 모험은 아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그저 정년 보장되는 공무원 된 것 아닌가.

방위사업청에 간 데에는 무엇보다 방위사업청 자체의 매력이 컸다. 방위사업청은 우리 군이 필요한 무기나 장비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국내외에서 구입하는 기관이다. 국내업체가 만든 무기를 외국에 팔 수 있도록 활로를 개척하는 일도 한다. 구축함이나 헬기를 프라모델로 만들어도 뿌듯한데 세계를 다니면서 장비와 부품을 구해서 실제로 디자인하고 조립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우리나라 무기를 들고 새로운 나라에 활로를 뚫는 일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정무적, 추상적 담론만 다루는 부처와 달리 구체적인 성과가 무기나 장비로 눈에 보인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외교, 안보, 과학기술, 법률, 국제, 경제, 회계, 인문학 등 여러 분야가 얽혀 있는 영역이므로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익힌 이런저런 지식과 경험을 헛되지 않게 써먹을 수도 있다. 방위사업청 입장에서 내 이력이 특이한 만큼 전문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약과 같이 법률적인 일을 다루는 기관이므로 법률가가 팀장이 되면 일의 처리 속도와 합법성이 제고될 것이다.

모난 돌이 돼 사방에서 정을 맞고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불법과 부패에 부역하지 않을 것이다. 진급과 평판에 인질 잡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옳은 일은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그런 양심적인 공직생활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내 자신을 믿어주고 ‘내 삶’을 치열하고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정 재 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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