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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美 참전 자극한 히틀러 ‘자급자족론’

2차대전은 ‘경제전쟁’ / 독일편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美 참전 자극한 히틀러 ‘자급자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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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안정 국면에 있던 독일 경제가 다시 위태로워진 것은 1929년경부터다. 미국과 연합국이 배상금 총액과 지불계속기간을 구체화하는 등 채권 회수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전기(電氣) 시장을 독점한 미국 GE의 최고경영자(CEO) 오웬 영이 배상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오웬 영의 이름이 붙은 이른바 ‘영 안(案)’에는 당초 독일이 부담해야 할 배상액을 3분의 1까지 대폭 줄여주는 대신 미래 가치를 담보할 수 없는 마르크화 대신 연합국 상대국의 화폐로만 지불하도록 했다.

연합국으로서는 더 이상 마르크의 통화가치 유지를 위해 암묵적인 보호막을 설치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겨우 부흥의 1단계를 넘어선 독일에는 찬물을 끼얹는 조치임에 분명했다. 당시 영국의 경제석학 케인스도 이에 대해 “아무리 단기간이라고 해도 실행되기 힘든 조치다. 1930년이 되면 어떤 식의 경제위기가 찾아와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위기는 금세 찾아왔다. 1929년 6월 ‘영 안’이 발표되자 미국 투자가들이 마르크의 안전성에 의문을 갖게 되면서 일시에 자본을 빼내갔다. 경제위기 조짐이 보이면 얼른 신흥국에서 투자자금을 빼내 주식시장 및 환 가치를 추락시키는 요즘 투기자본의 양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배상금 추가 지급에 난색을 표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로부터 배상금이 들어오지 않자 미국에 대한 채권 상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조짐을 보였다. 결국 미국 투자자 자산의 부실채권화 우려가 커지자 곧이어 미국 주식시장이 대폭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영 안’이 발표된 지 4개월 후에 발생한 대공황(Great Repression)의 서막이다.

히틀러의 ‘경제 살리기’



1930~1931년 사이 독일에 투자된 미국 자본은 무섭게 빠져나갔다. 국제 금융업계는 독일에 대한 신규 대출을 정지했고 단기 채권의 우선 상환을 요구했다. 1931년 7월엔 독일 2위 은행이던 다나은행이 파산했고, 역시 메이저급인 드레스덴 은행이 경영위기에 빠지는 등 자본시장 경색이 심화했다.

급격한 불황으로 인해 전체 인구 6000만 명 중 650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독일 국민은 결국 ‘못살겠다 갈아보자’ 심리를 앞세워 1932년 7월 총선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스를 제1당으로 선택했다.

히틀러는 1933년 2월 수상에 취임한 지 1개월 만에 ‘제1차 4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최우선 순위로 내세운 과제는 역시 ‘공공사업에 의한 실업문제 해결’이었다. 또한 △가격통제를 통한 인플레 억제 △피폐한 농민, 중소 수공업자 구제 △유대인 및 전쟁 이득자들의 부당이익 환원을 통해 국민에게 배분 △독일 경제계의 재편성 등을 내걸었다.

대대적인 ‘경제 살리기’를 통해 3년 만인 1936년에 실업자 수를 세계공황 이전 수준인 100만 명 선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국민총생산(GNP)은 이전 최고점이던 1928년 실적의 15%를 넘어섰다. 독일은 이처럼 대공황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침체 속에서 가장 먼저 경제 회복에 성공했다. 2년 뒤인 1938년에는 실업자 수가 29만 명으로까지 줄었다. 미국도 대공황 시기에 최대 1200만 명에 달하던 실업자를 뉴딜 정책 등 다양한 정부 시책을 통해 783만 명으로까지 줄였지만 독일에 비견될 수준은 못됐다.

당시 세계 열강 사이에선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식민지 국가와의 교역 외에는 해외 수입품들에 대해 관세율을 올리는 이른바 ‘블록 경제(Block Economy)’ 정책이 대세였다. 미국도 ‘스무트·홀리법’을 통과시켜 무려 2만 개 품목의 관세율을 평균 40%대로 일제히 상승시키는 등 유례없는 보호무역 정책을 폈다. 하지만 독일은 2차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 별다른 식민지 없이 내수경제 부흥만으로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1933년 5월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립계획을 발표한다. 다른 유럽 지역 점령을 염두에 둔 군국주의 발상이 내재된 것이었으나 당시엔 실업구제 대책의 의미가 훨씬 컸다. 1년 세입이 70억 마르크인 나라에서 첫해부터 무려 20억 마르크의 예산을 투입했다. 그전까지 진행된 공공사업 예산 총액이 3억2000만 마르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대책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아우토반 건설사업은 ‘노동자 친화적 공공사업’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건설비의 무려 46%가 건설노동자의 임금으로 나갔다. 먼저 노동자 임금이 책정된 다음 역순으로 총 건설비가 정해지는 방식으로 예산이 편성됐다. 노동자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소비 여력도 급격히 확대됐다. 나치스 정권 차원에서 오락 위문단을 구성해 아우토반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이나 스포츠 이벤트를 열기도 했고, 영화·연극 감상회 등도 다채롭게 이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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