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詩人 최영미 “나는 투사가 아니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

[허문명의 SOUL] 신작 산문집 펴낸 최영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0-05-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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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계란이 아니다, 바위다.

    • 신 내림 받듯 쓴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요즘 내 머릿속엔 숫자밖에 없다

    • 지금이 좋다,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 서른에 잔치 끝내고 예순에 맞는 행복, 다들 ‘쉽게’ 행복해지자

    • 적게 벌어 적게 사는 삶, 자족한다

    • 사랑은 어렵지만 행복은 쉽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3회 주인공은 30년 넘게 시를 써온 시인 최영미입니다. <편집자 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시인 최영미(59)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최근 펴낸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작가로서 자존심 다 팽개치고 시장 바닥에 나서니 오히려 맘 편하다. 다 제 업이다. 사람 잘 못 사귀고, 혼자 도도하고 뻣뻣하게 살아온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언제 훌훌 떠나도 좋게 집을 만들지 말고 살자. 이게 그동안 삶의 모토였다. 집이니 차니 남편이니 옷장이니 이런 것들 없어도 사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소유 않고 버틴 건데 요즘 들어 남들이 다 가진 걸 갖지 못하면 사는 게 무지 피곤하다는 걸 알았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후회하지만 이미 지난 일. 차라리 독서예찬을 늘어놓아 지금의 나를 합리화하고 독자들을 유혹하는 게 더 나으리.”

    나는 계란이 아니다, 바위다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 특히 여성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오래 고민해 왔을 그도 이제 환갑(그는 1961년생입니다)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그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펴낸 이후 지난해 고은 시인을 겨냥한 ‘괴물’을 발표하고 법정 투쟁에 이르기까지 문단에 각종 화제를 뿌렸습니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에는 그런 그도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건 내면에 도도히 흐르는 삶에 대한 초연함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12년 원고 청탁을 한 이후 그와의 재회는 8년 만이었습니다. 그는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세파에 많이 시달렸을 텐데 얼굴은 생기가 돌았습니다. 

    - 젊어 보인다. 

    “철이 안 들어 그렇다.” 

    - 나이 들어 철 안 드는 것도 어렵다. 

    “하긴 그렇다. 어렸을 때야 당연히 철이 들 수가 없고. 40, 50이 되면 선택이니까.” 

    - 어떻게 보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온 거 아닌가. 원도 한도 없겠다. 

    “지금까진 그랬지만 앞으로 계속 그러면 망한다.” 

    깔깔, 소녀 같은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신 내림 받듯 쓴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가 고 시인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2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을 마치고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가 고 시인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2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을 마치고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 재판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가 없다. 고은 시인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승리로 종결됐다. 소감이 어떤가. 

    “재판에 인생을 낭비해 좀 억울하다. 나는 투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이다. 나를 만나본 사람들 특히 민주당 사람들 중에는 ‘최영미 시인이 잔치가 끝났다는 제목의 시를 써 과거를 청산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보다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80년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삶을 지키며 살아왔다. 남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바위라고 생각했다.” 

    그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 수록된 시 ‘바위로 계란깨기’에는 이런 당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무슨 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 무슨 상 후보로도 오르지 않은//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

    - 당신에게 시(詩)란 뭔가. 

    “속에 고인 덩어리를 터뜨리는 거다. 멋모르고 시인이 됐다. 첫 시집을 낼 때는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거다. 자다가 깨면 시가 와 있었다고 할까. 그냥 쓰면 시가 됐다. 두 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부터는 달라졌다. 시인이라는 자각이 생겼다. 시어를 다듬고 교정도 보면서 세련돼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짜내고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고, 만들지 말고, 받아 적어야 좋은 시가 나온다. 뭘 모르고 쓰는 게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를 쓰게 만드는 원동력은 ‘생활’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생각, 느낌,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마음속에 뭔가가 고이려면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안에 쌓이는 게 많다.” 

    실제로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온 게 많습니다. ‘50대’란 시를 옮겨볼까요.

    헤어진 애인보다 계단이 무서워//2층에서 내려올 때도 엘리베이터//비 오는 날, 버스에 빈자리가 없으면/예술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중략) 축 늘어진 고기가 되어/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면, 생이 총체적으로 흔들리지(중략) 

    - 시인도 마감에 쫓기나. 

    “화가들이 전시 일정 잡히면 밤새고 열심히 작품을 생산하듯 나도 마찬가지다. 항상 시집 낼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내 머릿속엔 숫자밖에 없다

    - 왜? 

    “할 말을 다한 것 같아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주변에서 ‘최영미는 다시는 시집 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노력해서 쓰는 게 아니라 신 내림을 받듯 쓴 시라는 거다. 그런 시집은 평생 한 번 갖기도 어렵다고 하더라. 돌이켜 보면 내 삶과 바꾼 거였다. 어떻게 보면 저주이기도 하지. 근데 앞으론 몰라. 요즘 내 머릿속에는 숫자밖에 없다.” 

    - 1인 출판사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면 재고를 없애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난 인터넷도 멀리 했고 카톡도 늦게 시작했는데 출판사를 시작한 이후 인터넷에 자주 들어간다. 컴퓨터를 켜고 그 복잡한 로그인을 해서 서점마다 들어가 판매 현황을 살펴보고 달력에 적고 다음 판을 언제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한다. 판매가 부진한 날은 하루 종일 우울하다. 하루에 온라인 서점에서 10권은 나가야 하는데….” 

    - 다른 사람 책도 좀 내면 어떤가. 

    “그러고 싶다. 좋은 시인 글 받아서 좋은 시집 내고 싶은데 아직 여력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타격이 크다. 요즘은 넷플릭스만 보는 것 같다.” 

    - 강연도 못 다니고 있겠다. 

    “올 스톱됐다. 월급 받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1만 부 넘게 찍었으면 많이 팔린 거 아닌가. 

    “그렇다. 코로나가 시작될 즈음 출간한 ‘돼지들에게’ 개정증보판도 2쇄에 들어갔다.” 

    - 작가가 출판사 사장이 되면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팔리는 시, 독자 입맛에 맞추는 시를 생각하고 쓰게 되지 않을까. 

    “굶어죽을 바에야 그럴 일은 없다.” 

    - 그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20대, 30대보다 지금이 행복하다는 거다. 30대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보다 지금 있는 사람들이 더 낫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은 늘 불안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고.”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지금이 행복하다

    “돌이켜 보면 별생각 없이, 그때그때 나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문학상을 탈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많이 안 했다. 그때그때 내가 꽂히는 대로 오바마에 빠지고, 축구에 빠지고.” 

    - 참, 한때 축구광이었지. 

    “10년간 거의 매일 축구 경기를 봤다. 영국 월간지 ‘월드 사커(World Soccer)’를 사러 춘천에서 기차 타고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갔다. 40대를 축구에 바쳤다. 한 신문사에 제안해 유럽 축구 기행을 했는데 5주간 유럽을 돌면서 지금은 스타가 된 손흥민, 박지성 다 만났다. 온몸에 녹음기 카메라 노트북 메고 혼자 유럽을 떠돌면서 밤에 경기 보고 새벽까지 원고를 썼다. 바르셀로나 PC 방에서 원고를 보낸 적도 있다. 로마 한 호텔에서 몇 달 만에 거울을 봤는데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 생활에 불편이 없었으니까 가능했던 거 아닌가. 

    “40대 때만 해도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저축도 조금씩 했다. 혼자 살 때는 절약하면 됐다. 2010년 정도까지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50대 들어서 부모에 대한 부양 책임이 생기면서 ‘돈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없다 보니 맏딸인 내가 감당할 일도 있었다. 춘천 살 때 아버지가 아프고, 엄마가 아프고, 갑자기 책임감이 몰려왔다.” 

    - 왜 춘천으로 갔나. 

    “순전히 주거비 때문이었다. 전세비가 너무 오르는 거였다. 집 보러 다니는데 평수가 작을수록 상태가 엉망이었다. 결국 일산을 포기하고 눈 감고 찍은 게 춘천이었다. 그때는 전철이 생기기 전이라 1억 원이면 집을 샀다. 4년 반을 살았다.” 

    - 다시 일산으로 온 이유는? 

    “소설 ‘청동정원’의 배경이 1980년대였는데, 서울에서 자료를 많이 찾아야 했다. 게다가 엄마가 입원한 병원까지 오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느라 전철과 버스를 열 번이나 갈아탄 적도 있다. 도저히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다시 수도권으로, 일산으로 왔다.” 

    - 산문집을 보면 ‘왜 이렇게 살았을까. 왜 이 길을 택했을까’ 문득문득 회한 같은 게 느껴진다. 한때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됐음을 공개한 적도 있는데. 

    “페이스북 하면서 공개한 건데, 생활보조금이 아니라 근로장려금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세무서에서 지난 연도 소득이 1300만 원 이하고, 집도 없으니 장려금 대상자라더라.” 

    - 매달 나오는 거였나. 

    “동생이 한 첫 질문하고 똑같다(웃음). 한 번 나오면 끝이다. 몇 십만 원. 어떻든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많이 번다는 거잖아. 한국 사람들이 부자구나 싶었다. 주변 사람에게 월급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연소득 얼마니? 교사 월급은? 내가 근로장려금 받았다고 했더니 굶고 사는 줄 알고 라면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백화점 갔더니 ‘기초생활수급자가 백화점도 다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런 불쾌한 시선도 경험했다. 한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무시한다면서 옷이라도 잘 입고 다니라고 동생이 옷을 사주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언뜻 부끄럽거나 심각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적게 벌어 적게 산다, 자족한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8년 만이었다. 그는 별로 늙지 않았다. [박해윤 기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8년 만이었다. 그는 별로 늙지 않았다. [박해윤 기자]

    - 요즘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가난해지는 것 아닐까. 

    “돈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많이 벌어 많이 쓴다고 행복할까? 나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적게 벌어 적게 산다, 자족한다.” 

    - 어떻게 실천하나. 

    “특별할 것 없다. 사고 싶어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옷도 구두도 한 계절에 하나면 충분하다. 맘에 드는 것 가끔 있지만 너무 비싸다. 그래서 안 산다. 가난? 별거 아니다. 소설 ‘흉터와 무늬’ 쓸 때 참 어려웠다. 수입 하나 없이 몇 년 동안 장편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막막했다. 엄마한테 돈을 꾸기도 했다. 그때 한 달에 얼마로 살 수 있나 테스트한 적이 있다. 100만 원 없이도 살더라. 전세 살았는데 통신비 등 기본으로 매달 25만 원은 나갔다. 나머지는 절약했다. 50만 원이면 한 달 생활비가 되더라. 거의 식비였다. 차가 없으니 교통비도 별로 안 들었다. 없으면 쪼개 쓰는 재미가 있다.” 

    - 인색해지지 않나, 마음이. 

    “원래 사람 잘 안 만나니 쓸 데도 별로 없다.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 모르는 사람 만나 맛없는 음식 먹으면 돈 쓰고 기분 나쁘고 너무 싫다.” 

    그의 시 중 ‘내버려둬’라는 게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혼자 울게 내버려둬//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무슨 무슨 보험에 들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건강검진 왜 안하냐고 잔소리하지 말고/누구누구에 잘 보이라고 훈계일랑 말고/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박수치게 하지 말고/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사라/헛되이 부추기지 말고/집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제발 그냥 내버려둬

    -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내버려둬 달라는 말은 진심인가. 

    “반어법이지.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이지(그가 또 깔깔 웃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됐습니다). 마지막에 ‘세상을 원망하며 눈을 감지 않게’라는 행을 썼다가 지웠다.” 

    - 세상을 원망한 적 있나. 

    “있지.” 

    - 잘못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주로 혼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왜 대한민국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대접을 받을까, 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까. 내가 보기엔 저 글은 가짜인데, 같은 생각 말이다.” 

    - 당신이 쓴 산문집에는 ‘나와 다른 진영, 틀린 편에도 옳은 사람이 있음을, 늘 올바른 쪽도 틀린 쪽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철이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가짜와 진짜도 없는 것 아닌가.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나. 내가 재판을 해봤잖아. 했느냐, 안 했느냐 팩트는 있는 거다. 예술에도 사실은 존재한다. 한 걸 안 했다고 하고 안 한 걸 했다고 하면 안 되지.”

    ‘이 나라는 나와 맞지 않는다’ 느꼈다

    문득 화제를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 점(占) 같은 거 본 적 있나. 

    “내 돈 내고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 운명을 믿나. 

    “성격이 운명이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 성격은 타고나는 것인가.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만들어가는 요소도 있다.” 

    - 당신 성격 잘 아나. 

    “너무 잘 알아 탈이다.” 

    - 자책감이나 후회는? 

    “남자 형제가 없다 보니 남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문인이 주변에 없었고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시인이 됐다. 첫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됐다. 겸손했어야 했는데, 우리 집 유전자에 겸손함은 없다. ‘척’도 못한다. 대학까지 서울대를 나왔으니 세상은 내게 더 겸손함을 요구했는데 내가 그걸 못 했다. 오만해 보이고 그랬다. 그건 내가 반성한다.” 

    - 책에 ‘멀쩡한 사람 바보로 만드는 S대 꼬리표’라는 구절이 있다(그는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학력 사회이지 않은가. 문화예술계는 서울대 출신이 드물다. 소수라서 받는 불이익이 있다. 주목받는다는 이득도 있지만, 남자는 괜찮은데 서울대 나온 여자들은 운신의 폭이 좁다. 한때 취직하려고 메리야스 회사 사보 편집자에 지원했는데 서울대 출신은 인화에 문제가 있다며 떨어뜨렸다. 담당자가 ‘아마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하더라.” 

    - 대한민국 최고 학벌인데. 오만함은 없었나. 

    “있었지만 깨졌다. 근데 나는 깨졌는데 주변에서 부담스러워했다. 서울대 나온 남자들한테 환멸도 많이 느꼈다. 홍대 대학원 다닐 때 너무 좋았다. 내일이 시험 날인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애들이 다 알려주고 노트도 빌려주고 그랬다.” 

    두 시간여가 흘렀습니다. 우리는 잠시 쉰 뒤 다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숨을 고른 뒤 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나라가 나한테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30대 중반부터 이민 가고 싶었다.” 

    - 어디로? 

    “어디든. 한국의 문학 시스템에 적응이 안 됐다. 사람 만나는 것 싫어하고, 문단 사교계 싫어하는 내 성격에 늙으면 어떻게 될지 느껴졌다. 다른 나라 언어로 시를 쓰든지, 직업을 바꾸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 운동선수를 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근데 그때 문단에서 상을 준 거야. ‘돼지들에게’ 시집을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냈는데 그걸로 이수문학상을 탔다. 마침 독일 월드컵이 열렸고 방송 3사에서 동행 취재 러브 콜이 왔지만 계약 직전에 깨졌다.” 

    - 왜? 

    “여의도 방송국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한 후 방송국 간부를 소개받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언론계, 특히 방송국 남자들이 여자 작가를 무시하는 것도 싫었다.” 

    - 영혼이 성숙해졌다고 느끼는 때가 있나. 

    “장편 두 권 쓰고 나서다. 거의 자전적 소설이었는데.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내가 자존심이 강해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그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 종교가 있나. 

    “가톨릭 세례는 받았지만 성당에 안 간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느끼는 순간이 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잠시 침묵 후) 엄마 요양병원에 있을 때 힘들고 아픈 사람이 다른 사람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을 느낀다.”

    종교는 없지만 신을 믿는 순간들

    - 누구나 중년이 되면 부모가 아픈 상황에 맞닥뜨린다. 최근 4년간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모친 요양병원에 다녔다고 썼더라. 

    “처음 몇 달은 우울했지만 풍경이 익숙해지더라. 거기에도 사회가 있고 드라마가 있다. 꾀병 부리는 할머니도 있고, 가족끼리 마구 싸우기도 한다. 온갖 집 사연도 다 듣는다. 가식이라곤 숨을 곳이 없는 인간 시장이다. 연민의 정도 생긴다. 자식 있다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더라. 간호사들을 정말 다시 보게 됐다. 의사들은 잠시 왔다가지만 간병인과 간호사들은 리얼리스트들이다. 이건 다른 이야긴데, 요양병원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 어떤? 

    “가족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이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 너무 당연한 질문 같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 아닐까. 

    “노, 가족이 없는 사람들 얼굴이 더 밝다.” 

    - 뜻밖이다. 

    “기대가 없으니까 그렇다. 엄마 병실에 같이 있는 한 할머니에게 가족이 찾아온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 할머니 얼굴이 제일 밝고 훤했다. 자기도 휠체어에 의지하는 아픈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을 살핀다. 남에게 좋은 일 하니까 얼굴도 밝다. 어떤 할머니는 자식들이 왜 안 올까 맨날 불평한다. 손자가 왔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은 와야지 타박한다.” 

    - 노후를 생각하면 우울하지 않나. 

    “생각 별로 안 한다. 늙어가는 것도 별로 두렵지 않다. 나는 지금도 사는 게 즐겁다. 내가 탐식가고 은근한 미식가다. 싸고 좋은 밥집도 많이 안다. 좋아하는 축구 경기 3탕 4탕 본다. 행복, 불행?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다. 나는 내가 불행해지는 조건을 안 만든다.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하고는 안 만난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으니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인생은 ‘싫은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천국’이다. 나는 나만 나를 안 괴롭히면 행복하다.” 

    그는 “건강검진 받은 지도 10년이 됐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건강검진을 받을 때 의사가 자기가 오늘 본 환자 중에 내 표정이 제일 좋다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라,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고 하더라. 나는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 득도한 사람 같다. 

    “득도까지는 아니지만 좀 내려놓은 게 있다.”

    사랑은 어렵지만 행복은 쉽다

    - 계기가 있었나. 

    “특별히 어떤 시점이라기보다 엄마 아빠가 아프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해오며 살았던 것 같다. 아무리 비싸도 가고 싶은 데 가고 멋도 엄청 부려봤다.” 

    - 사랑도 원 없이 해보고? 

    “그건 좀 자신 없다. 취약점 중 하나다, 사랑은.” 

    - 남은 삶에서 하고 싶은 거 있나. 

    “이집트에 가고 싶다. 사막 못 가봤다. 외국에서 어디든 1년 이상 살고 싶다. 석 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재판 끝나면 이기든 지든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묶였다.” 

    - ‘쉽게 행복해지자’는 말을 자주 쓰던데. 

    “예이츠가 쓴 시 ‘다시 부르는 옛 노래’ 중 ‘쉽게 사랑하라’는 말에서 따온 거다. 예이츠도 쉽게 사랑을 못 해 회한에 잠겨서 말한 거다. 사랑도 행복도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좀 어렵지만 행복은 쉽다. 만약 불행했다면 나는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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