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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제국주의 始末 : ‘오싱’ vs ‘일본 패망 하루 전’ [황승경의 Into the Arte⑲]

집단 최면에 빠진 권력자, 고단한 民草의 삶

  •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日 제국주의 始末 : ‘오싱’ vs ‘일본 패망 하루 전’ [황승경의 Into the Arte⑲]

  • ● 미곡상으로 떠나는 여덟 살 ‘오싱’의 애잔함
    ● 적나라한 권력층의 망념 ‘일본 패망 하루 전’
    ● 러일전쟁과 3·1절에 만나는 일본 영화
    ● 국가와 권력은 무엇인가…우리에게 던지는 물음
‘일본 패망 하루 전’ 스틸컷. [Shochiku배급사 제공]

‘일본 패망 하루 전’ 스틸컷. [Shochiku배급사 제공]

같은 달에 발간된 국방부의 ‘국방백서’와 외교부의 ‘외교백서’에 담긴 일본에 대한 표현이 흥미롭다. 국방부는 2월 2일 발간한 백서에서 악화한 한일관계를 반영하듯 일본에 대해서는 ‘동반자’ 대신 ‘이웃 국가’로 격하했다. 반면 외교부는 2월 5일 외교백서를 내면서 일본을 단순히 ‘이웃 국가’라고 한 표현을 격상해 “양국 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도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라고 명시해 대조를 이뤘다. 양국 간 상호주의와 부처별 상황에 따라 일본에 대한 인식이 다르듯, 국민도 일본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한국을 강제 침탈한 군국주의 일본, 그럼에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한미일 삼각동맹의 한 축인 일본. 그래서 여전히 일본은 ‘먼 나라 이웃 나라’다.

야욕의 일본 근대사를 담은 영화

일본 군국주의의 시작을 알린 러일전쟁과 3·1절이 있는 2~3월에 일본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은 영화 ‘오싱’과 ‘일본 패망 하루전’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야욕의 일본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은 영화다.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이 한반도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으며 제국주의의 발톱을 드러낸 사건은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었다. 강국 러시아를 선제공격한 일본은 러시아를 침몰시켜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벌인 청일전쟁(1894~1895) 때보다 군사비를 2배로 증액했다. 

이때 일본 정부가 지출한 군사비는 정부 총 세출의 50%에 육박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은 승전의 대가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청나라에서 할양받은 요동반도는 전쟁 직후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요구로 다시 돌려줘야(3국 간섭)했고, 러일전쟁에서는 배상금조차 요구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청에서 받은 배상금 대부분을 세계 금융 중심지였던 영국의 금시장에 ‘올인’했지만 영국 화폐가치가 흔들리며 예치한 배상금의 환율 또한 급락했다. 결국 러일전쟁 직후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 경제를 일으킬 돈이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본 국민에게 돌아갔다. 일본 권력자들이 천황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국민을 수탈하기 시작한 것도 러일전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오싱’은 1907년 겨울, 가난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했던 일곱 살 여자아이를 통해 당시 도탄에 허덕이던 소작인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2013년 영화 오싱은 1983년 1년 동안 NHK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아침 드라마의 30주년 리메이크 영화다. 앞서 드라마는 1907년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근현대사의 산증인인 오싱의 강인한 인생을 다뤘다. 뒤이어 출간된 소설 ‘오싱’은 68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 수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5년 ‘한국식’으로 윤색돼 영화로 제작됐다. 2013년판 리메이크 영화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작은 거인 오싱의 1907~1908년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군국주의 일본 민초의 고단함

여덟살 소녀 ‘오싱’을 통해 일본 근대사를 다룬 영화 ‘오싱’의 스틸컷. [(주)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여덟살 소녀 ‘오싱’을 통해 일본 근대사를 다룬 영화 ‘오싱’의 스틸컷. [(주)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일본 동북부의 야마가타 시골 마을에 살던 오싱의 가족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다. 수확량의 50%를 소작료로 내면 가족들 몫으로 남는 것은 하루 한 끼의 무밥뿐이다.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오싱은 이웃 마을 목재상에 식모살이하러 떠난다. 할머니는 멀리 떠나는 손녀가 눈에 밟혀 쌈짓돈을 내주고, 엄마는 눈물로 배웅한다. 매정했던 아버지도 멀어져가는 어린 딸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는다. 목재상에서 보내는 하루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아 쉴 틈이 없다. 오싱은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한다. 시뻘겋게 터져 쓰라린 고사리손으로 밥을 짓고 청소를 도맡는다. 

당시 일본에는 근대화의 일환으로 ‘어린이’에 대한 인격권 사상이 유입되지만, 이는 극소수 아이들에만 적용될 뿐 일반 어린이들은 그저 ‘작은 노동자’였다. 오싱은 도둑으로 오인받아 무자비한 체벌을 당한다. 피투성이가 된 오싱은 눈물범벅이 돼 도망치지만 가도 가도 펼쳐진 것은 눈밭뿐. 추위와 허기에 지쳐 쓰러진 오싱을 구해준 사람은 사냥꾼 준사쿠였다. 그는 러일전쟁에 징병됐지만 전쟁의 잔악성에 염증을 느껴 탈영한 평화주의자였다. 준사쿠는 글을 모르는 오싱에게 글과 산수를 가르쳐준다. 영화에서 준사쿠는 일본 여성 시인 요사노 아키코(1878~1942)의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를 낭송한다. 이 시는 천황의 명령인 러일전쟁을 반대하는 시로 문단의 파문을 일으킨 오만불손한 문제작이었다. 

윤동주의 모교 릿쿄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오싱의 감독 도카시 신(61)은 무지의 시대에 비폭력 작가의 반전(反戰) 시를 읊게 한다. 준사쿠는 오싱을 마을로 데려다주다가 일본군의 불심검문에 걸려 최후를 맞는다. 다시 전장에 끌려가느니 일본군의 손에 죽기를 택한 것이다. 오싱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쌀 다섯 가마니에 팔려 미곡상 가가야의 보모로 떠난다. 다행스럽게도 오싱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일한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꿋꿋하게 미곡상으로 떠나는 여덟 살 오싱의 뒷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오싱은 씩씩하게 걷지만 여덟 살 작은 어깨에 올라갈 일본 근대사의 무거운 짐이 연상돼 더욱 짠하게 다가온다.

일본 군부의 계략, 숨죽인 평화주의자

‘오싱’ TV 드라마 포스터와 스틸컷. [NHK 제공]

‘오싱’ TV 드라마 포스터와 스틸컷. [NHK 제공]

이제는 TV 드라마로 시선을 옮겨보자. 드라마에서 오싱의 첫사랑은 민중운동에 심취한 사회주의자 고우타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도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젊은 지식인이 많았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적 위상은 얻었지만 국내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18년 쌀값 급등으로 인한 전국적인 ‘쌀 소동(米騷動)’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마침 우리의 3·1운동을 악랄하게 진압한 총리 하라 다카시가 1921년 도쿄역에서 열여덟 나이의 가난한 도시 노동자 나카오카 곤이치에 의해 암살당한다. 현직 총리의 암살은 일본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3.1운동 이후 우리의 민족해방운동과 일본 내 사회주의·노동·농민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입안의 가시’ 같은 이들을 몰아낼 기회를 엿보던 일본 정부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과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이 지진을 이용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자경단을 통해 6000명이 넘는 무고한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은 학살당한다. 드라마에서 오싱 부부는 공장 개업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빚더미에 앉지만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미곡상의 큰손녀 가요는 여성해방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1886~1971)의 사상에 심취해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 가업을 이어받았다. 일본 경제가 바닥을 치자, 가요의 남편이 투자한 주식이 휴지 조각이 돼 미곡상은 결국 문을 닫는다. 가요는 윤락가를 전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1928년 일본 총선거에서 노동농민당은 19만 표를 얻어 2명이나 의원에 당선되는 쾌거를 올린다. 경제공황으로 정부에 실망한 국민이 늘어나자 일본 군부는 흉흉한 민심을 한 번에 되돌릴 계략을 준비한다. 1931년 9월 18일, 더 넓은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장악하려는 만주사변이었다. 경제 상황이 급변하자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오싱의 첫사랑인 사회주의자 고우타도 결국 전향해 묵묵히 사업에만 매진한다. 

일본은 1936년부터 조선을 포함한 일본과 중국 화북 지역을 묶는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해 이듬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에는 ‘동아시아민족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허를 찔린 미국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 이듬해 미드웨이 해전으로 전세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오싱’이 애지중지 키운 큰아들도 필리핀에서 전사한다.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일본 패망 하루전’의 하타나카 소좌. [Shochiku배급사 제공]

‘일본 패망 하루전’의 하타나카 소좌. [Shochiku배급사 제공]

1945년 3월 아오지마가 함락되자, 미군 346기 B-26 폭격기는 일본 본토를 제집 다니듯 들락날락하며 위협하며 도시를 초토화한다.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은 실제 하루 전이 아니다. 도쿄를 비롯한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 대도시들이 이미 공습으로 잿더미가 된 1945년 4월 새로운 총리 인선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2016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이 영화의 원제는 ‘일본의 가장 긴 하루’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패망 하루 전’으로 개봉됐다. 히로히토 일왕이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방송에서 한 ‘항복’ 선언은 라이브가 아니라 녹음이다. 

영화는 포츠담선언부터 항복 조서의 녹음에 이르는 과정과 이면에 알려지지 않은 군부 쿠데타(궁성사건)에 주목한다. ‘국뽕’급은 아니어도 자국 미화로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당시 사분오열된 일본 권력층의 무모함과 망념을 여실히 보여준다. 뒤안길로 향하는 역사의 마지막은 동서고금 유사하다. 영화 원작은 1965년 출간된 소설이다. 소설은 이미 1967년에 영화화돼 일본의 우경화 세력에 경고장을 날린 전적이 있다. 

1945년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연합국 정상들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촉구했다. 현실감각이 떨어진 일본 군부와 내각은 이를 묵살했다. 8월 6일 오전, 미국은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 한복판에 떨어뜨렸다. 사상 최악의 희생에 일본 전역은 ‘멘붕’이 됐지만 수뇌부들은 곧바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8월 7일 소련도 만주의 일본 부대를 공격해 ‘숟가락’을 얹는다. 8월 9일 오전, 궁지에 몰린 일본 수뇌부는 그제야 최고긴급회의를 열지만 이들이 설왕설래하는 동안 미국은 또 다른 원자폭탄 ‘팻맨’을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한다. 

넋이 나간 일본은 다시 어전회의를 열어 포츠담선언 수락 여부를 정하게 되는데,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결사항전을 고집한다. 일왕이 나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자, 일본 수뇌부는 일왕의 위엄을 거스르지 않게 항복 조서 문구 조정에 며칠을 소비한다. 일왕이 항복 조서를 녹음한 시점은 14일. 15일 정오에 소식을 접한 육군 소장파 장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쿠데타를 계획한다. 무모한 항전 의지도 문제지만 당시 신(神)과 동일선상으로 여겨지던 일왕의 결정을 반대하는 건 반역을 의미했다.

어설픈 쿠데타 ‘궁성사건’

‘일본 패망 하루 전’ 스틸컷. [Shochiku배급사 제공]

‘일본 패망 하루 전’ 스틸컷. [Shochiku배급사 제공]


인지부조화에 사로잡힌 젊은 장교들은 ‘콩가루 조직’처럼 어설픈 쿠데타를 실행한다. 그들은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 녹음테이프를 빼앗기로 하고, 모리 다케시 사단장을 살해했다. 위조 명령서를 들고 일왕의 주거지인 궁성을 점거하는데, 그래서 ‘궁성사건’이라 이른다. 8월 15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자살하며 일망타진된다. 4분 35초짜리 녹음테이프는 안전하게 옮겨져 8월 15일 라디오 전파를 타고 일본은 항복 사실을 알렸다. 

독일 군부는 전쟁 원흉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발키리 사건’을 비롯해 여러 쿠데타와 암살을 감행했다. 반면 일본 군부에서는 이와 유사한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역사적 장면마다 매번 일본을 망가뜨린 것은 맹목적 집단 체면에 빠진 잔악한 권력자들이었고, 매번 일본을 구한 것은 영화에서 보듯 일본의 민초였다. 3·1절에 조선팔도를 뒤덮은 민초의 함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신동아 2021년 3월호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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