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수낙 英총리 만든 내각제 도입 시 윤석열‧이재명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국민 투표 거치지 않은 총리에 대하여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2-10-2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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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우스 오브 카드’ 연상케 하다

    • 인종차별, ‘극복’ 아니라 ‘우회’

    • 의원내각제는 선진적이고 안정적?

    • ‘이 사람아’ 막말도 대통령제 탓인가

    • 수준 미달 정치인 뽑은 죄!

    리시 수낙 영국 총리. [AP 뉴시스]

    리시 수낙 영국 총리. [AP 뉴시스]

    “성장 추구는 숭고한 목표지만 리즈 트러스 총리는 몇 가지 잘못을 했다.” 리시 수낙 전 영국 재무장관이 10월 25일(현지시간) 한 연설 중 한 문장이다. 문제는 저 발언을 한 사람의 현 직책이 재무장관이 아니라는 데 있다. 수낙이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를 알현하고 돌아와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한 연설이다. 신임 영국 총리의 취임사다.

    리시 수낙. 1980년생인 그는 고작 42세의 나이로 총리가 됐다. 200년 만에 등장한 가장 젊은 총리. 게다가 백인이 아니다. 인도계 이민자 후손이며 힌두교 신자다. 영국 역사상 최초의 비백인 총리가 탄생한 것. 식민지였던 인도 출신의 누군가가 식민지를 다스렸던 대영제국의 총리가 됐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남을 장면이다.

    생각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수낙이 영국 역대 총리 중 가장 재산이 많은 부자라는 것, 그의 아내가 인도 제1의 IT(정보기술) 부호의 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수낙 부부가 인종으로는 소수자일지라도 계급으로는 철저히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영국의 제79대 총리인 수낙은 국민의 투표를 통해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일이니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노동당이나 그 밖의 야당 지지자뿐 아니라, 집권당인 보수당의 지지자 중 그 누구도 ‘리시 수낙을 총리로 뽑는다’는 내용의 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국왕 다음으로 높은 권력자

    리시 수낙 영국 총리(오른쪽)가 10월 25일 런던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찰스 3세는 이날 수낙 총리에게 새 정부 구성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총리직을 승인했다. [AP 뉴시스]

    리시 수낙 영국 총리(오른쪽)가 10월 25일 런던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찰스 3세는 이날 수낙 총리에게 새 정부 구성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총리직을 승인했다. [AP 뉴시스]

    2015년, 북요크셔주 리치몬드의 유권자들이 수낙을 하원의원으로 선출했다. 그렇게 하원에 진출한 수낙은 보리스 존슨 전 총리에 의해 재무장관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수낙은 존슨 전 총리가 성추문 혐의를 받던 크리스 핀처 의원을 원내부총무로 임명하자 그에 항의하는 뜻에서 재무장관직을 사임했다. 존슨의 후계자 중 하나로 여겨졌던 수낙은 대중적 인지도를 쌓고 자신만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 후 존슨은 사임하고 리즈 트러스가 총리직에 올랐다. 그런데 트러스 전 총리는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45일 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이렇게 생긴 권력의 공백은 바로 직전 보수당 당대표 겸 총리 선출 경선에서 트러스와 치열하게 싸웠던 수낙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기존에 자신을 지지했던 보수당 의원들뿐 아니라, 총리직 출마 의향을 밝혔던 존슨 전 총리와도 협상에 성공함으로써 경선 없이 보수당 당대표가 됐다. 의원내각제의 성격상 집권당의 당대표는 곧 총리로, 국정 전반을 총괄한다.

    현실에서 벌어진 숨 막히는 정치 드라마인데, 앞서도 말했듯 이 모든 과정에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수낙의 지역구인 북요크셔주 리치몬드의 유권자들을 제외하고 나면, 영국인 중 그 누구도 ‘리시 수낙을 우리의 정치적 대표로 삼는다’는 취지의 투표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리시 수낙을 총리로’ 같은 구호가 걸린 전국 단위의 보통선거가 치러진 적도 물론 없다.

    수낙의 정치 이력은 결국 다음과 같다. 그는 보수당 깃발을 내걸고 출마하면 누구라도 당선될 것이라고 예측되는 보수 텃밭에서 공천을 받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의원직을 얻었다. 일단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후부터는 오직 보수당 내의 당내 정치만으로 수낙의 위치가 결정됐다. 트러스와의 경선 과정 역시 보수당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였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단 한 번의 국민투표 없이, 국왕 다음으로 높은 권력자인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속사정

    이 모든 과정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 유명해진 ‘하우스 오브 카드’를 연상케 한다.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넷플릭스 드라마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치적 협잡과 권모술수에 능한 원내대표가 부통령 자리를 차지한 후 대통령을 제거함으로써 투표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이 시즌1의 줄거리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민주주의는 과대평가 됐습니다”라는 명대사 앞에 고개를 끄덕일 법도 하다.

    그 원작인 마이클 돕스의 소설 ‘하우스 오브 카드’는 한술 더 뜬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을 배경으로, 대중적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귀족 출신 협잡꾼이 총리의 등에 칼을 꽂고 다른 의원들을 매수하고 협박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담아냈다. 노골적인 풍자 소설을 지향하는 ‘하우스 오브 카드’는 주인공의 설정부터 잔인하고 신랄하다. 원내총무 겸 당규 책임자로 “정부에서 가장 예민한 정치 안테나를 가진 각료”, ‘검은 책’에 다른 의원들의 소문과 치부를 담아놓고 관리하는 그런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 능력 덕분에 총리 자리에 오르는 이야기다.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표를 모으려면 낮이든 밤이든 어디로 가야 의원을 만날 수 있는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는 곧 의원들의 비밀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의원이 누구와 손을 잡았고, 누구와 잠을 자고, 국회에 참석할 만큼 멀쩡한 정신인지, 뒷돈을 슬그머니 챙긴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의 아내와 바람이 난 것은 아닌지 알아야만 했다. 날카롭게 벼린 작은 비밀 조각들을 수집해 검은 책 안에 담아 금고에 넣고 잠그는 것이다. 심지어 총리조차 금고 열쇠에 손댈 수 없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필자는 지금 수낙 총리를 향해 악담을 하려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최고 권력자를 국민 다수가 직접 뽑지 않을 수도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건 우리의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 아니다. 정계의 인사이더였던 돕스는 대처 정부에서 사실상 쫓겨난 후 복수심으로 불타며 ‘하우스 오브 카드’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첫 번째 소설이었지만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고 결국 돕스는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귀족 작위까지 받았다. 영국에서도 ‘대체 내가 지지하지도 찍지도 않은 저 사람이 왜 총리가 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대중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널리 공감대를 얻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어떤 통념

    영국 역사상 최초의 비(非)백인 총리,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계 힌두교 신자 총리는, 바로 그런 시스템이 있기에 탄생 가능했던 것일지 모른다. 트러스와의 경선 과정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수낙은 대의원 투표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권리당원 투표에 해당할 평당원 투표에서 크게 뒤지고 말았다. 물론 그의 재산과 탈세 의혹 등이 미친 영향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비백인 그것도 인도 출신이라는 점이 수낙에게 특별히 장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상식적이다.

    말하자면 수낙은 총리가 되면서 영국의 인종차별을 ‘극복’한 게 아니다. 정치 엘리트들끼리 총리를 결정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의 구조를 최대한 활용해 대중 전반에 퍼져 있고 아직 극복되지 않은 인종차별을 ‘우회’했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더욱 가깝다.

    그가 영국의 총리가 된 건 역사적인 일이며 축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영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인종차별을 극복했는지는 앞으로 특별한 이변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총리로서 다음 총선을 진두지휘할 때 비로소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주제에서 섣부른 낙관주의를 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통념을 떠올려 보자. ‘앙겔라 메르켈이 16년간 집권하는 독일을 보라, 의원내각제는 안정적이다. 의원내각제를 택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다양한 군소 정당이 등장해 작은 의석을 가져가면서 연정을 꾸리고 국정에 참여한다. 대통령제를 택한 한국이나 미국처럼 절대 흔들리지 않는 두 거대 정당이 극한대립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 얼마나 선진적인가. 우리 정치의 모든 문제는 대통령제에서 비롯하는 것이므로 대통령제를 버리고 의원내각제로 가야 마땅하다.’

    10월 20일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왼쪽)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굳은 표정으로 사임 의사를 밝히고 있다. 취임 45일 만에 사임해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됐다. [AP 뉴시스]

    10월 20일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왼쪽)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굳은 표정으로 사임 의사를 밝히고 있다. 취임 45일 만에 사임해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됐다. [AP 뉴시스]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앞서 살펴본 영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고작 45일 만에 총리가 사임하는 일이 벌어진다. 특이하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의원내각제는 때로 대통령제보다 역동적이고, 종종 불안정하다.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심지어 국회의원의 임기마저 100% 보장되지 못한다. 집권 여당과 총리가 스냅 선거(snap election)를 제안하면 곧장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원내각제는 대통령제와 비교할 때 국민의 의견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 국정 운영의 최고 결정권자를 뽑는 문제라면 분명히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재명 후보에 비해 24만여 표를 더 받았다. 대통령제의 비판자들은 고작 이런 차이로 누구는 대통령이 되고 누구는 못 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영국을 보라. 그 누구도 ‘나는 이 사람을 총리로 뽑겠소’라고 하지 않은 사람이 총리가 된다. 국민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물론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이듯 영국도 민주주의 국가지만, 두 나라의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다.

    대통령제는 죄가 없다

    자유진영에 속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필자는 영국 최초의 비백인 인도계 총리가 된 리시 수낙을 축하하며, 영국이 정치적 균형과 경제적 활기를 되찾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한국인들이 우리의 ‘정치 문제’를 ‘정치 제도 문제’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문제는 대통령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문제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벌어진 온갖 파행을 떠올려 보자. 나이가 18세 많은 상대 정당 의원에게 ‘이 사람아’라고 막말을 한다. 상식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언론 보도의 탈을 쓴 비방을 국회의원이 전달하면서 장관을 음해한다. 이런 문제가 과연 대통령제 때문인가. 의원내각제를 하면 갑자기 저 국회의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이성적인 타협의 정치가 가능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통령제는 죄가 없다. 의원내각제도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더 나아가 수준 미달의 정치인을 자기 손으로 뽑아서 국회에 보내는 우리 유권자들에게 있다. 우리 스스로 먼저 각성하고 나아지지 않는다면 정치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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